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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GO시마을]이희국, 여행

  • 기사입력 2018.06.01 10:32
  • 기자명 이희국


여행
이희국 (1960년~)


신사에서 부적을 팔던 창백한 일본소녀를
마치 전생의 인연인 양
돌아보고 또 돌아보던 때가 있었다

눈앞을 스쳐가던 바바리와 스카프의 여인에 홀리어
한참을 따라가 보았던 로마의 추억도 있었다
공간의 영역을 표류하다가
대기권을 뚫고 나간 우주선처럼
미지를 향해 날던 시절
바람에 날려 온 먼지와 같이
방향조차 모르고 내렸던 거창한 존재감도
하나의 티끌이었다

바쁘다는 핑계로 묵혀두었던 일을 정리하고
때 묻은 관념을 벗어본다

하얀 여백 위를 기어가는 달팽이처럼
촉각을 더듬으며 새 영토를 향해 떠난다

틈만 있으면 어디든 찾아드는 빛처럼


이오장 시인의 시 해설/사람의 모든 행동은 여행이다. 삶을 유지하는 전부가 여행으로 현재를 벗어나 다른 곳으로 이동하든가 미지의 세계가 궁금하여 그곳에 가본다든가 혹은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하여 사냥하는 행위 등 사람은 여행 속에서 살다가 여행으로 끝나는 존재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의식적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과 삶의 과정에서 무의식적으로 하는 여행은 다르다. 지나는 사람 아무에게나 여행을 좋아하느냐고 묻는다면 모두가 좋다고 하지만 자신이 지금 여행 중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게 보통이다. 여행은 모든 사람에게 꿈을 주고 개척정신을 일깨워 인류의 발전 과정에서 빼놓지 못하는 의식행위다. 더구나 행동보다 한발 앞서 나가는 정신을 붙잡아 언어로 표현하는 시인은 여행하지 않는다면 한 줄의 시도 쓰지 못한다. 이희국 시인은 가까운 일본을 여행하며 신사의 부적을 팔던 소녀를 만나고 머나먼 유럽을 둘러보다 아름다운 여인에 홀리어보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지나가는 꿈이다. 미지의 세계에서 보았던 모든 것들이 먼지와 같이 날아가 버리는 티끌이었다. 꿈꾸다 만난 것들은 대기권을 벗어난 우주선이었다. 의식적으로 찾은 여행이 무의식의 종결로 끝났다. 그래서 다시 꿈꾼다. 그러나 삶의 여정은 쉽게 떠나지 못하게 붙든다. 이것을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일까. 무의식적으로 묶인 끈, 관념으로 굳어버린 일상을 뒤엎고 하얀 백지 위에 여행을 그리는 것이다. 그러나 서두르지 않는다. 달팽이 걸음으로 새로운 꿈을 꾸는 것이다. 이것은 실제의 여행보다 더 즐겁고 그 어디라도 떠날 수 있다. 틈만 있으면 어디든지 찾아드는 빛살처럼 꿈꾸던 곳은 전부 갈 수 있다. 한 편의 시에 의식적인 여행의 미비했던 틈을 만들고 다시 여행의 참맛을 그려나간 시적 감각이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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