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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人不識蓬萊島) 세상사람 신선이 사는 섬 알지 못한 ‘보길도 세연정’

  • 기사입력 2018.08.31 13:48
  • 기자명 정진해 문화재전문위원

문화재 : 보길도 윤선도 원림(명승 제34호)
소재지 : 전남 완도군 보길면 부황길 57, 등 (부황리)


해남 땅 끝에는 보길도가 떠나는 여객선이 손님을 기다린다. 정해진 시간이면 사람이 탔던 타지 않았던 보길도로 향한다. 바다는 많은 부표가 어장임을 표시해 두었고 그사이 물길로 유유히 빠져나가는 여객선은 노화도에서 잠시 하선과 승선의 과정을 밟고 다시 운항한다. 방향을 정한 여객선은 보길도에 도착하면서 해남 땅 끝 마을에서 탔던 사람을 모두 내리고 뒤돌아갈 사람을 다시 태우고 뒤돌아 떠나간다.

보길도에 도착하여 송시열과 윤선도의 흔적을 찾는 것이 보길도에 온 가장 큰 의미가 있다. 보길도의 맨 동쪽 끝 해변의 바위에는 조선 중기의 대학자이며 정치가였던 우암 송시열의 생애 마지막 시를 바위에 새겨 후세에 보기를 바랐던 것 같다. 조선 숙종 15년(1689) 때 왕세자 책봉 문제로 당파 간 논쟁이 심화되자 송시열은 제주도로 유배 길에 올랐다. 풍랑으로 더는 제주도로 못 가고 이곳 보길도에서 잠시 머물게 되었다. 이때 송시열의 나이 83세였다. 이곳에 그의 숙명적인 대립 관계였던 남인의 영수 윤선도가 살았던 곳임을 알고도 그의 흔적을 세연정에 발길을 돌리지 않고 이곳 바위에 자신의 심정을 새겼다.

八十三歲翁(팔십삼세옹) 여든 셋 늙은 몸이
蒼波萬里中(창파만리중) 푸른 바다 한가운데에 떠 있구나
一言胡大罪(일언호대죄) 한 마디 말이 어찌 큰 죄가 될까
三黜亦云窮(삼출역운궁) 세 번이나 쫓겨가니 신세가 궁하구나
北極空瞻日(북극공첨일) 북녘 하늘 해를 바라보며
南溟但信風(남명단신풍) 다만 남녘 바다의 바람만 믿을 수밖에
貂?舊恩在(초구구은재) 담비 갖옷 내리신 옛 은혜 있으니
感激泣孤衷(감격읍고충) 감격하여 외로운 속마음 눈물 지우네

바위 절벽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글귀는 서인의 영수답게 고산 윤선도의 땅이지만, 바위에 자신의 심정을 새긴 것은 고산과 우암은 서로 대가답게 신뢰했음을 엿볼 수 있다. 우암이 몸져누워있을 때 내로라하는 의원이 못 고친 병을 고산이 보내준 약을 먹고 나았던 우암, 이들의 관계는 어디까지였을까 라는 생각으로 20리 길이나 떨어져 있는 고산이 13년 동안 머물었던 세연정으로 발길을 돌린다.

▲ 세연정


조선 중기 문신이며, 시인인 고산 윤선도(1587~1671)가 51세 때 인조 15년(1637)에 왕이 남한산성에서 청나라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는 세상을 보지 않으리라 하고 울분을 참지 못해 제주도로 떠나는 중 길목에 상록수가 우거진 섬 하나를 발견하고 제주도 가는 것을 포기하고 터를 잡았다. 그곳이 바로 보길도이다. 이곳에 집을 짓고 주변의 경관을 둘러보며 곳곳에 자연에 걸맞은 이름을 남겼다. 13년간 글과 마음을 다듬으며. ‘어부사시사’와 같은 훌륭한 시가 문학을 이루어 냈었다.

윤선도는 18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해 왔다. 마지막 유배 8년을 송시열과 싸우다가 함경도 삼수로 가서 살았고 유배에서 풀릴 때 나이가 81세였다. 다시 보길도에 들어와 3년을 더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송시열은 보길도에서 제주도를 가는 동안 보길도 바닷가 어느 바위에 새긴 글을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해 제주에서 조사받으러 한양으로 올라오는 도중 숙종이 내린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 윤선도와 송시열은 제주도로 가는 목적지는 같았다. 윤선도는 제주도로 가는 뱃길에 아름다운 상록 풍광에 놀라 이곳에 거처를 정하고 살게 되었고, 송시열은 귀양 가는 뱃길에 풍랑을 만나 보길도에 잠시 머물다 간 곳이다. 윤선도는 보길도 깊숙한 곳에 터를 잡고 ‘어부사시사’를 남겼고 송시열은 바위에 자신의 심정을 시로 남겼다.

▲ 연못


우리나라 3대 정원에 꼽힌다는 담양의 소쇄원과 영양의 서식지는 세연정보다 자연을 끌어안은 것이 어머니의 품 안이라 생각한다면, 세연정은 어머니의 넓은 마음을 끌어안은 것과 같이 넓은 곳이다. 처음 보길도에 발을 딛고는 격자봉 아래 거처할 집을 짓고 낙서재(樂書齋)라 이름 지어 본체로 삼으며 은둔생활을 시작했다. 67세 되던 해에 낙서재 건너 개울가에 연못을 파고 ‘무민당(無悶堂)’과 ‘정성당(靜成堂)’을 짓고 집을 세워 ‘곡수당’이라 하였다. 산 중턱 위에 집을 지어 ‘동천석실’이라 하였다. 연못을 만들어 놓고 주변의 산세를 보니 “지형이 마치 연꽃 봉오리가 터져 피어나는 듯하여 부용(芙蓉)이라 이름 지었다“고 하였는데 『고산유고(孤山遺稿)』에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보길도지』에서 고산은 이곳을 부용동이라고 했다.

芙蓉城是芙蓉洞(부용성시부용동) 부용동은 중국의 부용성으로
今我得之古所夢(금아득지고소몽) 옛날 꿈꾸던 부용의 절경을 얻었네
世人不識蓬萊島(세인불식봉래도) 세상사람 신선이 사는 섬 알지 못하고
但見琪花與瑤草(단견기화여요초 ) 단지 기화와 요초만 찾고 있구나

▲ 회수담


계곡의 북쪽에는 ‘세연정’을 세워 연못 주변에 물과 바위와 대(臺)와 소나무, 대나무 등을 심어 부용원림생활을 하면서 책을 읽고 뱃놀이도 하며 자연을 벗 삼아 지냈다. 85세의 나이로 일곱 차례나 부용동을 드나들며 생활했다. 주로 생활한 공간은 낙서재이며 뒤에는 소은병(小隱屛)을 두었는데, 이것은 주자가 그의 고향에 낙향해 경영한 무이구곡에 있는 대은봉(大隱峰)과 마주한 소은병을 본뜬 것이다.

세연정에서 부용리 쪽으로 약 1.5㎞쯤에 낙서재 건너편 산비탈에는 동천석실(洞天石室)이 있다. 이곳은 넓은 공간으로 석문, 석담, 석천, 석폭, 석대, 희황교 등을 배치하였고, 석문 안의 반석에는 다도를 즐기던 흔적이 있고 그 주위로는 건물터가 있다. 윤선도는 이곳을 부용동 제일의 절승이라 하였다. 이곳을 둘러보면 아름다운 8곳이 있어 팔경이라 부르는데, 제1경은 蓮糖曲水(연강곡수)로 곡수당의 연꽃을 가리키며, 제2경은 銀屛淸風(은병청풍)으로 은병 석벽에 부는 맑은 바람을 일컫고, 제3경은 然亭孤松(연정고송)으로 세연정의 홀로선 소나무를 일컫고, 제4경은 水塘老柏(수당노백)으로 곡수당의 늙은 동백, 제5경은 石室暮煙(석실모연)으로 석실에 감도는 저녁연기를 일컫고, 제6경은 紫峰歸雲(자봉귀운)으로 격자봉을 두른 해운을 일컫는다. 제7경은 松峴捿鴉(송현서아)로 솔새에 둥지를 튼 갈 까마귀 떼를 일컫고, 제8경은 薇山遊鹿(미산유록)으로 미산에 뛰노는 푸른 사슴을 일컫는다.

▲ 서대


동천석실에서 남쪽 부용리에 인접한 평지 일대에 낙서재와 무민당·곡수당을 짓고 세상의 명리를 떠나 꾸밈없는 생활을 영위하였으며, 이 밖에도 주변 자연경관에 따라 다양한 이름을 붙였는데, 낭음계, 승룡대, 하한대, 혁희대, 독등대, 상춘대, 언선대, 오운대, 조산, 미산, 석전 등이 그것이다.

원림의 중심이 되는 세연정은 자연석을 쌓은 기단을 조성하고 그 위에 건물을 세웠으며, 정면 3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의 건물로 출입문을 제외하고는 모두 난간들 둘렀고, 칸마다 들문을 달았다. 앞의 연못에는 크고 작은 바위가 수면 밖으로 나와 있어 마치 연못에서 동물들이 꿈틀거리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정자의 중앙에 세연정, 동쪽에 호광루, 서쪽에 동하각, 남쪽에 낙기란 이란 편액을 걸었으며, 또 서쪽에는 칠암헌이라는 편액을 따로 걸었다.
세연정을 중심으로 좌우에 연못과 계담, 판석재방과 동대, 서대, 옥소대, 칠암, 비홍교와 동백나무, 대나무, 소나무 숲이 울창하게 우거져서 아름답다. 또 고산의 유적으로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는 행사인 유상공수를 하던 낭음계, 용이 승천하는 승용대, 연정이 있었던 조산과 여름에도 한기를 느낀다는 하한대, 고향을 그리워하며 임금이 계신 궁궐을 바라보던 혁희대, 석전, 미산 등 경승의 산봉우리마다 고산은 상징적 이름을 붙였다.

▲ 판석보


연못에는 판석보(석조보)가 놓여 있다. 일명 ‘굴뚝다리’라 부르며, 연못이 건조할 때는 돌다리가 되고 우기일 때는 폭포가 되어 항상 일정한 수면을 유지한다. 연못에는 많은 바위가 얼굴을 내밀고 있지만, 그중에 계담에 있는 칠암 중의 하나이다. ‘혹약제연’이란 효사에서 따온 말로 마치 힘차게 뛰어갈 것 같은 큰 황소의 모습을 닮았다고 하여 혹약암이라 부른다. 동대와 서대는 세연정의 좌우에 가로 6.7m 세로 7.5m 높이 1.5m 위에 쌓은 평형 축단으로 군무(群舞)를 하기 위해 만든 공간이다. 동대는 2단이, 서대는 춤을 추며 도는 나선형 구조로 3단이 남아 있다. 회수담(回水潭)은 세연정 동쪽 축단 밑의 계담(溪潭)에서 인공연못으로 흘러드는 터널식 수입구(水入口)가 있다. 계담 쪽에서 물이 들어가는 수구(水口)는 다섯 구멍이어서 이를 오입 삼출(五入三出)이라 하는데, 이 구조는 아주 독특한데 물막이 석축에 다섯 곳의 습수구를 만들어 흐르는 물을 받아 모으되 배출하는 구멍은 세 곳만 만들어 들어오고 나가는 수량을 조절할 수 있도록 하였다. 비홍교는 [보길도지]에는 '세연정이 못의 중앙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정자 서쪽, 제방 동쪽 겨우 한 간쯤의 넓이에 물이 고여 있으며, 중앙에는 거북이가 엎드려 있는 형상의 암석이 있다. 거북이 등에 다리를 놓아 누에 오른다고 기록하고 있어 이 다리를 비홍교라고 불렀다.

▲ 흑약암


윤선도는 1637년부터 85세에 이르기까지 일곱 차례나 보길도에 왔다 갔다 하면서 13년 동안을 머물렀다. 이곳에서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40수와 32편의 한시를 남겼다. 보길도의 자연을 완성한 한국의 정원유적이 어우러진 제일의 명소로 이루어진 경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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