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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서제일가람(湖西第一伽藍) 속리산 법주사의 문화재 (4)

  • 기사입력 2019.03.08 10:26
  • 기자명 정진해 문화재전문위원

문화재 : 보은 법주사 석련지(보물 제64호), 보은 법주사 대웅보전(보물 제915호), 보은 법주사 소조바로자나삼존불상(보물 제1360호)
소재지 :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법주사로 379, 법주사(사내리)

법주사 석련지는 금강문을 지나 서쪽 편으로 보면 보호각 내에 자리하고 있다. 돌을 다듬어 만든 연못을 일컫는다. 이곳에 물을 담고 연꽃을 띄워두었다고 한다. 불교에서 연꽃은 극락세계를 뜻하며 사찰의 건축물과 석조물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꽃 중의 꽃이다.

▲ 법주사석련지

인도에서는 연꽃을 이르기를 만물을 탄생시키는 창조력과 생명력을 지닌다고 했다. 그것은 연꽃이 맑고 깨끗하며 다른 꽃과 달리 진흙 속에서 자란다는 이유이다. 또한 꽃잎이 많고 아름다워 하늘의 보배로운 꽃으로 추앙받고, 꽃이 피는 동시에 열매를 맺기 때문에 인과의 이치와 맞아 연꽃을 불상의 받침대를 연꽃으로 표현한다. 연꽃은 잎이 위쪽으로 피는 모양을 앙련이라 하고 아래쪽으로 피는 모양을 복련이라 한다.

석련지는 앙련으로 피어있는 연꽃이다. 연꽃은 네 가지의 덕을 가진다고 하였다. <화엄경탐현기(華嚴經探玄記)>에 설명하기를 “향(香, 향기), 결(潔,고결), 청(淸, 맑음), 정(淨, 깨끗함)이 그것이다”라 하였다. 비록 중생이 사는 세간이 무명과 탐욕으로 얼룩져 있지만, 진리를 상징하는 연꽃은 청정하고 깨끗하여 맑은 향기를 전한다는 의미이다. 출가하여 수행하는 스님들이 착용하는 가사를 연화의(蓮華衣), 연화복(蓮華服)이라고 하는 것도 연꽃이 세간에 물들지 않고 청정함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 법주사석련지

석련지는 신라 성덕왕 19년(720) 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높이가 1.95m, 둘레 6.65m에 이르는 석조물이다. 8각의 받침석 위에 3단의 굄과 한 층의 복련대를 더하고 그 위에 구름무늬로 장식된 간석을 놓아 석련지를 떠받쳐 있는 모습이다.

여러 장의 판석으로 구성된 지대석 위에 8각의 하대석을 놓았다. 지대석 바깥쪽은 장대석을 1줄로 돌려 구획을 마련하였다. 하대석의 각 면에는 좌우에 우주를 모각하였고, 우주 사이에는 측면에서 본 연화문을 오목 새김 하였다. 위에는 덮개돌 모양으로 이루어졌고, 그 윗면에는 피라미드 모양으로 높지간 2단의 굄과 그 위에 1단의 낮은 굄을 돌리고 그 위에 8각의 각 면마다 2장의 꽃잎을 아래로 향해있는 복련을 돋을새김 하였다.

복련은 앙련보다 먼저 꽃을 피운 꽃잎이다. 꽃 봉우리를 감싸고 있다가 꽃을 피울 때면 가장 먼저 피어야 다음에 앙련을 피운다. 복련은 희생을 감수하고 꽃을 피워 앙련의 버팀이 되고 고고한 자태로 피울 수 있도록 한다. 그래서 복련은 늘 아래에 있고 앙련은 위쪽에 있다. 석련지의 복련과 앙련 사이에 구름이 받치고 있다. 구름은 성스러움, 풍요, 천지창조의 원동력으로 표현되어 왔다. 구름은 움직이는 기체로 변화하는 형태를 지니고 있어서 환상적 경지나 천공의 변화하는 상태를 표현하기에 적합한 소재였다. 우주의 자연현상을 형상화시킨 구름무늬는 용이나 봉황과 같은 신령스러운 상징물과 함께 쓰여 상스러움을 더해주고 있다.

▲ 법주사석련지

불교에서는 수도승을 운수객(雲水客) 또는 운수승(雲水僧)이라 부르며, 물과 구름을 승려이자 수행에 비유하였다. 구름과 물이 흐르는 것은 번뇌와 무상의 표상이었으며, 구름의 구속되지 않는 모습은 초월적인 원리로서의 무아심의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구름은 물을 지니고 있다. 석련지의 연꽃이 화려한 꽃을 피우기 위해 물이 필요하다는 의미를 지닌다. 복련은 시들어가는 첫발이라면 앙련은 피기 위한 준비이기도 하다. 화려한 꽃을 피우기 위해 물이 필요하고 그 물을 구름에서 취한다는 것이다. 석련지 상대석 구름무늬는 아래에서 올라와 위에서 꽃처럼 피어나는 여의두처럼 생긴 운문이다. 이러한 구름은 물을 지니고 있는 구름이므로 그 위에 연꽃이 활짝 피어있는 모습은 늘 꽃이 피어 있기를 바라는 신라 사람들의 욕망이 아닌가 한다. 상대석 위의 연지는 꽃이 완전히 피어 있는 파련이 아니고 아직 피기를 기다리는 꽃이다.

석련지 겉면 아랫부분에는 1장의 꽃잎이 위포 피어 있는 앙련의 연꽃 무늬 8장이 돌려져 있고, 가운데 부분부터 윗부분까지에도 앙련의 연꽃무늬 8장이 한 송이의 연꽃의 완성을 위해 돋을새김 하였다. 8장의 꽃잎 가운데에는 동그랗게 보상화를 새겨 장식하였는데, 이 문양은 통일신라시대에 성행하였던 문양이다. 좌우대칭으로 완성된 팔메트의 꽃잎이 연속되면서 4잎에서 6잎, 8잎, 10잎 등을 이룬 연화문 형태의 무늬이다. 불교에서 보상화는 이상화로서 다른 말로 ‘만다라화’라고도 한다. 보상화문은 크고 웅장하여 꽃잎이 나타내는 중량감과 함께 세련미가 넘쳐난다.

석련지 몸통 상부에는 세로로 세운 짧은 동자주를 세우고 둥글게 난간을 둘렀는데, 그 위로도 짧은 기둥을 새긴 후 난간 모양이 되도록 조각되어 마치 난간이 두 줄로 된 듯하다. 난간 아래의 벽에는 천인상과 함께 보상화문을 돋을새김 하였다. 일부가 남아 있지만, 화려함이 한층 돋보인다.

석련지의 전체적인 모습이 아름다운 비례를 갖추었고, 겉면에 복련과 앙련이 조화롭게 배치되었다. 구름을 배치하여 연꽃이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꽃이며, 또 한 송이의 꽃을 가꿀 수 있는 연못이 인과관계를 엮는 상징적 석조물이 아닌가 한다. 세부의 조각 수법이 우수하고 조형도 세련되어 보이므로, 대체로 8세기경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 법주사대웅보전

법주사 대웅보전은 우리나라 무량사 극락전, 화엄사 각황전과 함께 3대 불전 가운데 하나인 중층전각이다. 신라 553년(진흥왕 14)에 창건되고 776년(혜공왕 12)에 중창하였으며, 그 후 임진왜란으로 불탄 것을 1624년(인조 2)에 벽암이 중창한 후 여러 차례 수리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진표 스님이 중창하면서 미륵불을 봉안하기 위해 용화보전(미륵전)을 두었는데, 고려시대에는 산호보광명전(珊瑚普光明殿)이라 하였다. 이 건물은 흥선대원군이 고종 9년(1872)에 헐어 버릴 때까지는 법주사의 중심이었다. 근년에 33m의 높이로 조성한 청동미륵대불이 지금 그 자리를 대신한다.

▲ 법주사대웅전계단 파련화

정면 7칸, 측면 4칸의 다포계 팔작지붕 건물로 높이가 약 19m에 이른다. 아래층은 높고 위층은 낮아 탑의 형식 비례를 보인다. 정년의 7칸은 모두 살문을 달았고 좌우 축면의 1칸과 뒷면 가운데 칸에는 외문짝을 달았다. 포는 내외 2출목으로 짜 기둥 위와 기둥 사이의 평방 위에도 공포를 놓은 다포식이다. 공포는 1층은 내외 2출목이고 2층은 내외 3출목이다. 또한 1층 살미는 수서형이고 2층 살미는 앙서형이다. 공간포는 전체적으로 매 칸마다 1구씩 배치되었다. 제3살미는 끝에 솟은 연봉이나 연꽃이 조각되었다. 위쪽의 보머리는 주심포 상부에서 4모를 죽인 8각형이고, 간포 상부에는 당초문, 창방머리에는 연화당초각(蓮花唐草刻)이다.

2층의 살미는 제1살미, 제2살미가 수평에 가까운 기울기로 길게 뻗어 살짝 올린 앙서이고, 제3살미는 끝을 뾰족하게 하고 밑면은 둥글게 하였다. 주시포 위는 끝을 마름모꼴로 마무리한 보머리를 놓았고, 간포 위 제3살미와 겹판을 이루면서 머리 부분을 둥글게 한 보머리를 얹었다. 또한 공포 위에 3겹 퇴보를 얹고 나서, 퇴보 사이에 낮은 벽(상벽)을 쌓아서 층급을 이룬 다음 벽면을 짧은 동자기둥으로 분할하였다.

▲ 법주사대웅보전 소조비로자나삼존불상

법당 내에는 1626년 벽암이 중창할 때 보살상이 없이 모두 흙으로 만든 불상으로만 조성된 소조삼존불상(塑造三尊佛像) 법신(法身)인 비로자나불, 왼쪽에 보신(報身)인 노사나불, 오른쪽에 화신(化身)인 석가모니불이 있다. 중관 해안스님이 1630년에 찬술한 「속리산대법주사대웅대광명전불상기(俗離山大法住寺大雄大光明殿佛相記)」에 대웅보전을 ‘대웅대광명전(大雄大光明殿)’으로 기록하고 있어서 불상의 성격을 추측할 수 있다. 석가모니불상을 뜻하는 대웅과 비로자나불상을 의미하는 대광명이 함께 사용되었다. 전각의 불상을 ‘삼신(三身)’으로 명명하고, ‘하나가 셋이며, 셋이 하나[일즉삼, 삼즉일(一則三, 三則一)]’라고 기록하였다. 발원문에 의하면, 17세기에 활동했던 조각승 현진(玄眞)과 청헌(淸憲) 등 17명의 승려가 함께 불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중건과 불상의 조성을 주도한 사람은 1624년에 팔도총섭(八道摠攝)으로 임명된 벽암 각성(碧巖 覺性, 1575-1660)이었다.

▲ 법주사대웅보전계단 원숭이상

대웅보전을 오르는 답도 좌 우 위에 원숭이 조각상과 눈이 마주친다. 우리나라에 살지 않는 원숭이가 왜 이곳에 있을까? 경전에 원숭이는 부처님에 꿀 공양을 올렸을 뿐 아니라 근처에 흙을 파 부처님이 목욕하실 연못을 만들었다고 한다. 자기 몸을 희생해서 많은 원숭이를 구했다 해서 원숭이가 자비심과 자기희생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동물로서 불교에 나타나고 있다. 중국 명나라 오승은이 쓴 <서유기>에서 원숭이는 지혜의 상징으로 부각되기도 한다. 당나라 황제의 칙명을 받아 인도로 불전을 구하러 가는 현장법사를 보필하며 여의봉을 휘두르는 신통력으로 험난한 구법여정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일등 공신이기도 하다. 인간과 교감을 나누거나 조력자로 등장해 사람과 친숙한 원숭이는 부처님을 존경하고 법을 지키는 역할을 상징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대웅보전 계단에서 많은 인간과 교감을 나누기 위해 이곳에 자리하고 있다. 원래의 원숭이는 용화전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고 이것은 새로 만들어 교체된 것이다.

▲ 법주사대웅보전계단 소맷돌

또한 계단의 소맷돌에는 모란무늬와 곱팽이 함께 나타나고 곱팽이문 앞에는 안상이 새겨져 있다. 모란무늬는 기쁨과 즐거움을 상징하는 무늬이고 곱팽이문은 시작과 끝을 상징하는 의미를 갖는다. 답도 좌우의 계단 가장 위에는 파련문이 각각 하나씩 새겨져 있는데 이것은 창조와 번영의 뜻을 가진다. 이러한 파련문은 불국사의 연화교와 칠보교에서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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