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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서제일가람(湖西第一伽藍) 속리산 법주사의 문화재 (5)

  • 기사입력 2019.03.22 10:37
  • 기자명 정진해 문화재전문위원

문화재 : 보은 법주사 원통보전(보물 제916호), 보은 법주사 세존사리탑(충북유형문화재 제16호).보은 법주사 마애여래의좌상(보물 제216호), 보은 법주사 철솥(보물 제1412호) 등
소재지 :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법주사로 379, 법주사(사내리)

법주사는 경내에 여러 채의 건물과 석조물이 많은 사찰이다. 팔상전을 지나 쌍사자석등과 사천왕사석등 사이 서쪽 편에 사모정 형태의 원통보전(보물 제916호)이 자리하고 있다. 원통보전은 정유재란으로 소실된 후, 다른 전각과 함께 17세기에 재건된 건물이다. 1974년 보수 공사 중 지붕 상부의 덧추녀를 지지하는 가로대에서 3종의 상량문이 발견되었다. 이중 가장 이른 시기의 상량문은 순치 4년(인조 25년, 1647)에 작성된 것으로 상량문 첫머리에 ‘扶宗樹敎圓照國一都大禪師碧巖堂大祖師覺性比丘’ 라는 서두와 함께 고적당 희연 대사의 주도로 천오라는 승려 도편수가 참여하였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두 번째 상량문은 도광 27년(헌종 13년, 1847)에 보수 공사 후 작성된 상량문으로 원통전 재건 후 200년이 지나간 뒤에 이루어졌으며, 당시는 명칭이 관음전이라 하였다. 세 번째 상량문은 1974년에 작성되었으며, 공사의 도편수는 박상천 목수였다.

▲ 법주사 원통보전

1630년 완성된 <속리산법주사사적기>에 따르면 원통보전의 규모는 6칸이라 표기되었으며, 1909년 조사된 법주사의 재산 현황에는 9칸의 건물이라 하였다. 이 건은 왜란 후 재건되기 전에는 6칸 규모의 정방형 건물이었다가 후에 9칸 규모의 정방형 사모지붕으로 재건된 것으로 보고 있다. 또 다른 보수 기록으로는 고종 29년(1892)에 원통보전을 중수하였다. 또한, 명문이 있는 망와로, 건륭 60년(1795) 명과 대한 융희 3년(1909) 명의 2종류가 용마루 끝에 설치되어 있는데, 왜란 후 두 차례의 보수공사가 있었음을 추측한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홑처마 사모지붕 건물이다. 평면은 정방형이며 내부 중앙에 관세음보살상이 모셔져 있는 중심형 공간 구조를 가졌다. 정면과 측면은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정면이 약 60cm가 더 크며, 그 이유는 정면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판단된다. 내부에는 내진에 4개의 고주를 세우고 사방으로 퇴칸으로 조정하였다. 마루는 우물마루로 구성하였고, 전·후면 방향으로 장귀틀을 놓고 좌우 측면 방향으로 동귀틀을 설치하고 마루청판을 끼워 넣었으며, 전후면에는 변귀틀이 있으나 측면에는 변귀틀 없이 마감하였다.

가구식 기단은 장대석으로, 전면 3단, 그 외면은 2~3단으로 쌓았다. 기단 모서리의 갑석과 면석은 ‘ㄱ’자형이 아닌 ‘一’자형으로 되어 있다. 정면 기단의 중앙에는 소맷돌을 갖춘 계단이 4단으로 설치되어 있다. 장대석 형태의 지대석 상부에 턱을 깎아 삼각형 모양의 소맷돌을 경사지게 설치하였다. 초석은 많이 다듬지 않은 방형의 초반 위에 3단의 원형 주좌를 새겨 기둥을 받치게 하였다. 배면과 좌측면 각 1개소에만 다듬지 않은 자연석 초석을 사용하였다. 기단의 전면 좌우에는 팔각의 활주초석이 세워져 있다.

주심포형식이지만 전체적인 형식과 구조방식은 다포계 형식을 보여주고 있고 출목이 내외 3출목이며, 평방을 사용하고 퇴보를 제공 위에 올려놓고 외단을 수장폭의 운공형으로 처리한 점 등은 조선 중기 이후 다포계 공포의 특징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부분적으로 중앙 칸에 주간포작 대신 꽃 모양의 화반을 사용하는 등 익공계의 표현도 나타나고 있다.

창호는 정면 3칸과 배변 중앙 칸, 좌측면 앞 칸과 중앙 칸에 설치하였다. 우측면은 벽체로만 구성하였다. 정면 어칸 창호는 네 짝으로 된 분합문이고 좌측면 중앙 칸의 창호는 영쌍창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상인방을 바로 문인방으로 이용하고 밑에는 머름대신 하방에서 일정 간격 띄어서 별도의 문지방을 설치했다. 사모지붕 꼭대기에는 둥근 상륜받침을 만들고 돌로 만든 벌병통을 올려 놓아 꼭지점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형태의 원통보전은 고대 불전의 형식을 간직하고 있어 건축사적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 법주사 세존사리탑

속리산 수정봉 아래 적멸보궁 뒤에 세존사리탑(충북유형문화재 제16호)이 자리하고 있다. 이 사리탑에 봉안된 사리는 1362년(공민왕 11) 공민왕이 홍건적을 격파하고 복주(지금의 안동)에서 개경으로 환도하던 중 법주사에 행차하여 통도사에 봉안되어 있던 석가의 사리 3개 중 1개를 법주사로 옮겨와 봉안하였다고 한다. 팔각원당형의 형식을 따른 승탑으로 기단부 위에 몸돌을 얹고 그 위에 지붕돌을 얹었으며, 정상부에 상륜을 장식하였다. 기단부는 상·중·하대로 구성되었으며 평면사각형의 지대석 위에 평면 8각의 기단이 놓여 있다. 기단의 윗면은 경사지게 깎여 있으며 각 면에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던 듯하나 지금은 마멸되어 알 수 없다. 하대도 상면을 경사지게 깎았으며, 하면은 8각의 각 면의 안상 안에 삼산형(三山形)의 꽃무늬를 장식하였다. 중대는 8각의 각 면에 우주와 안상을 조각하고, 안상 안에 삼산형의 화문을 조출하였다. 상대는 8엽의 복판앙련으로 장식하였고, 판단 위에 낮은 부연을 표현하였다. 몸돌은 공 모양으로 아무런 장식이 없다. 지붕돌은 8각으로 낙수면 경사는 상단에서는 심하나 하단에서는 완만하고, 지붕의 각 변은 곡선을 이룬다. 상륜부는 낮은 호형의 원좌 위에 큼직한 원대를 마련하고 그 위에 보주를 장식하였다. 전체적으로 아담한 형태의 사리탑으로 고려 말기의 부도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1973년 보수할 때 철책을 설치하여 보존하고 있다.

▲ 능인전(적멸보궁)

세존사리탑 앞에는 능인전(충북유형문화재 제232호)으로 불리는 적멸보궁이 자리하고 있다. 이 건물은 진신 사리의 예배 장소로 진신 사리가 봉인된 세존사리탑을 볼 수 있도록 건물 뒷면 가운데 부분을 유리창을 내었다. 현재의 건물은 1624년(인조 2) 불에 타 없어진 법주사를 중건할 때 재건하여 능인전(能仁殿)이라 불러 왔었다. ‘능인(能仁)’이란 말은 석가여래의 별칭 중 하나로 능히 일체 중생을 교화하여 이롭하게 하는 분이라는 뜻이다.

전면 3칸, 측면 2칸의 이익공 홑처마 맞배지붕의 건물이다. 건물 지붕의 좌우에는 풍판을 달았고 중앙 칸과 우측 칸에는 자연석의 댓돌이 놓여 있어 들어가고 나가는데 불편을 최소화 하였다. 장대석으로 2단의 기단을 올리고 그 위에 건물을 세웠으며, 정면에는 4단의 석재 계단을 두었다. 좌우 칸에는 궁판을 단 띠살문, 중앙 칸에는 두 짝의 문이 달렸다.

▲ 법주사 마애여래좌상

수정암 가는 길목에 거대한 바위가 있는데, 동쪽을 향해 있는 바위에는 많은 글씨가 새겨져 있고 남향을 하고 있는 바위에는 신라시대의 삼화령석조미륵불의상(三花嶺石造彌勒佛倚像)과 매우 희귀한 의상에 속하는 법의가 돋을새김되어 있는 마애여래의좌상(보물 제216호)이 있다. 옆 바위에 조각된 지장보살과 법주사의 성격을 알려주는 미륵불이다.

▲ 법주사 보살좌상

화사한 연꽃 대좌에 두 다리를 올려 놓고 한껏 벌리고 앉아 있어 부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어깨가 무릎과 같은 모습으로 올라가 있다. 또한 무릎에서 팔로 이어지는 선을 연장하면 직삼각형이 만들어지므로 기하학적인 구도로 되어 있다. 이 뿐만 아니라 낮은 육계와 특이한 나발(螺髮)·계주(?珠) 등도 기하학적이다.

▲ 법주사 마애여래의상

얼굴은 갸름하면서도 원만하다. 하지만 치켜 올라간 눈초리, 길면서 빈약한 코, 위아래로 올라간 입술, 작은 입, 정면을 향하고 있는 도식적인 귀, 군살이 진 턱 등에는 추상성이 보이고 있다. 목에는 굵은 삼도, 수평적인 어깨, 직각에 가까운 두 팔, 삼각형을 이루는 상체와 가느다란 허리, 수평적인 무릎과 직선적인 다리, 규칙적인 옷주름, 날카로운 연꽃의 형태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두 손을 가슴에 모아 설법인을 짓고 있는 모습과 더불어 능숙하면서도 숙달된 조각 기량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 불상이 새겨진 암석 바로 앞에 있는 바위 면에 조각된 지장보살상과 미륵불 바로 옆에 새겨진 짐 실은 말을 끄는 사람과 말 앞에 꿇어앉은 소를 새긴 설화도는 이 불상들이 법상종의 신앙으로 조성되었음을 보여 준다.

▲ 법주사 철솥

법주사 금강문 왼쪽 켠에 솥의 크기를 보면 수천 명이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사발 모습을 하고 있는 이 철솥(보물 제1412호)은 무게가 약 20여 톤으로 추정하고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 솥은 신라 성덕왕 때에 주조되었다고 전해오고 있다. 본래의 위치는 이곳이 아니고 조사각 뒤편, 냇가 쪽으로 30m 떨어진 곳에 있던 것을 이곳에 옮겨 놓았다고 한다. 높이가 120cm, 지름 270cm, 두께는 10~3cm, 둘레는 108cm이다. 승려 3,000명이 먹을 수 있는 장국을 끓였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승려들이 이 솥을 이용하였다고 전해 오고 있다.

이 철솥이 언제 제작되었는지에 대한 아무런 기록이 없어 확인할 수 없지만, 법주사가 가장 융성했던 시기로 보고 있다. 주철을 이용하여 만들었다는 기술사적 측면에서 완벽한 조형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희소가치가 매우 크다고 평가되고 있다.

▲ 법주사 석조

적멸보궁으로 오르는 계단 북쪽에 자리하고 있는 큰 석조(충북유형문화재 제70호)가 하나 있다. 지금은 어떤 목적으로도 사용되지 않고 있지만, 많은 승도가 살면서 사용되었던 물을 저장하는 용기이다. 높이 130cm, 길이 446cm로 저면 남쪽 벽에 너비 11cm의 원공이 있어 실제 용구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석조의 저면에서 구연부에 이르기까지 네 벽이 수직을 이루고 있으며, 안팎에는 아무런 문양이나 조식이 없어 단조로운 모습을 보이고 있으나, 구연부의 윗면자리를 경사지게 깎아내어 모각이 없게 하였다. 현재 모서리 일각에 약간의 파손이 있을 뿐 완형이라고 할 수 있으며, 보존상태도 양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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