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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며 제사 의식을 행하였던 곳 ‘경주포석정지’
 
정진해(문화재 전문위원) 기사입력  2019/10/25 [07:16]

문화재 : 경주 포석정지 (사적 제1호)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454-1

 

▲ 경주 포석정지 전경    © 정진해


옛 신라 경주에는 물과 관련된 곳이 여러 곳이 있다. 생명의 우물 나정, 알영정, 재매정, 분황사 석정, 북천(알천), 서천, 남천, 포석정 등이 있다. 지금은 옛 모습을 찾을 수 없고, 기능마저 상실되어 유적으로 남아 역사의 흔적을 찾아내려는 큰 노력이 진행되고 있다.

 

경주시 배동 454-3번지에는 옛 신라의 별궁 터는 의례 및 연회 장소로 이용되었던 정자 ‘포석정’이 있었던 곳이다. 물을 이용하여 국왕들이 유흥을 즐기던 놀이 공간이라 추정한다. 법흥왕은 울주 두동면 천전리의 대곡천 계곡을 찾아 휴식을 취하였다는 천전리 석각에 그 흔적을 남겼고, 헌강왕은 포석금에 놀러 와서 남산 신의 춤을 보고 왕이 추었다고 한다. 이때 추었던 춤을 ‘이무산신무(御舞山神舞)’ 또는 ‘어무상신무(御舞詳審舞)’라고 <삼국유사>에 전한다. <삼국사기>에 경애왕은 포석금에 놀고 있을 때 후백제의 견훤이 경주를 급습하면서 붙잡혀 자결을 강요당함으로써 최후를 맞이했다고 전한다. 이 충격적인 사건을 계기로 신라는 망국의 절차를 밟고 있었다. 경애왕 뒤를 이은 경순왕이 이후 고려 왕건에게 항복하면서 신라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유흥을 즐기기 위한 공간에는 석구가 있다. 이 석구는 포석정의 부속 건물 중의 하나일 뿐이다. 포석정이라는 정자가 있었고 이곳에 석구가 있었다는 것이다. 포석정에 딸린 석구는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을 즐기기 위한 용도라고 한다.

 

이러한 유상곡수연이 처음 시작된 곳은 4세기 위진남북조시대 서예가 왕희지에 의해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는 353년 저장성 사오싱현의 후이치산 북쪽 난정(蘭亭)이라는 정자에서 명사 41명과 개울물에 몸을 씻고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워 잔이 자기 앞에 올 때까지 시를 읊는 놀이를 하였다.

 

물이 흐르는 물줄기에 물이 멈추었다 갈 수 있는 다양한 홈을 만들어 놓은 물길이다. 이곳의 입구에 술이 담긴 술잔을 띄우면 술잔이 수로를 타고 홈이진 곳에 잠시 머무는 동안 앞에 앉은 사람에게 술잔이 건너고 다시 술을 채워 물에 띄우면 다른 사람에게 건너가는 구조이다. 술잔이 떠내려가는 동안 시 한 수를 짓고 만약 못 지으면 벌주 3잔을 마시며 노는 것이 유상곡수연이라고 한다.

 

▲ 경주 포석정지 곡수거    © 정진해

 

포석정에는 물이 흐르는 ‘곡수거(曲水渠)’가 있다. 모양이 전복의 껍데기처럼 생겨서 포석정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전체의 모습을 보면 거북이가 목을 길게 뺀 모습과도 같아 보인다. 언제 만들어진 것인가에 대한 자료가 없어 정확한 연대를 모르고 있다.

 

그러나 이곳이 유상곡수연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1974년 안압지에서 발견된 16면체 주사위 ‘주구령(酒令具)’에서 그 근거를 찾는다. 통일신라 시대 귀족들이 술자리 연회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주사위이다. 주사위는 술을 마신 사람에게 명령을 내리는 도구라는 뜻이 담겨있다.

 

술을 마신 사람이 주사위를 굴러 한 면이 나타나면 그 면에 새겨진 문구의 지시를 따라야 하는 벌칙을 수행한다. 벌칙은 노래는 부르지 않고 춤만 추는 ‘금성작무(禁聲作舞)’, 술 석 잔을 한꺼번에 마시는 ‘삼잔일거(三盞一去)’ 못된 짓을 해도 가만히 있어야 하는 ‘유범공과(有犯空過)’, 스스로 노래 부르고 스스로 마시기 ‘자창자식(自唱自飮)’, 누구에게나 마음대로 노래를 청하기 ‘임의청가(任意請歌)’ 같은 14가지 벌칙을 수행하게 돼 있는데 당시로는 주사위가 벌칙의 사전이었다.


포석정은 63토막의 화강암을 다듬어 물의 흐름을 세고 완만하게 물길을 만들고 물길에 물을 흐르게 한 뒤 술잔을 띄우도록 한 석조 구조물이다. 물길에 술잔을 띄우면 대략 12곳에서 술잔이 머물게 되는데 술잔이 머물면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이 술잔을 비우며 벌칙이 따랐을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은 포석정이 신라인들이 술을 마시며 풍류를 즐기던 장소로 기억되어 있다. 포석정이 만들어진 유래를 보더라도 유상곡수연을 하였던 중국 명필 왕희지가 했던 것을 본떠서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1998년 포석정 근처의 발굴조사 과정에서 통일신라 이전의 많은 유물과 제사에 사용되었던 그릇들이 출토되면서 이곳이 통일신라 이전부터 신라 왕실의 별궁이었던 장소이자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며 제사 의식을 행하였던 곳이라는 견해가 나오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바로 옆 경주 남산에 140여 곳의 사지와 500여 개의 불상과 석탑이 들어선 곳으로 그 자체가 ‘신라의 성지’라는 해석이 뒷받침해주고 있다.

 

또한 1995년에 발견된 <화랑세기> 필사본에서 ‘포사’, ‘포석사’라는 말이 나와 포석정과 연관되는데, 이것은 포석정이 사당의 기능을 했음을 더해지는 상황이다. 포석정과 가까운 안압지가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서 연회를 벌이기에 더욱 적합한 장소인데 굳이 포석정에서 연회를 하였겠느냐이다. 안압지는 신라인의 대표적인 연회장이고 이곳에서 놀이기구인 주사위가 발견되었으나, 포석정에서는 놀이기구용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다.

▲ 경주 포석정지 유배거    © 정진해

 

경애왕이 927년 음력 11월 포석정에서 잔치를 벌이느라 후백제 견훤이 오는 줄도 몰랐다고 하였다. 그러나 경애왕은 정말로 그랬을까 하는 의심을 품는다. 고려에 도움을 청해놓고 자신은 포석정에서 왕과 왕비를 비롯하여 신하들과 곡수에 술잔을 띄워놓고 노래와 춤을 추었다는 해석이다.

 

그러나 경애왕은 고려에 도움을 청하고 남산 신께 신라의 안위를 빌며 견훤에게 끝까지 저항하다 죽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음력 11월이면 양력 12월 말에서 1월에 해당하는 시기이다. 추운 날 경애왕이 별궁인 포석정에 나가 연회를 열 필요가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삼국사기> ‘경애왕 편’에 나오는 ‘유포석정(遊鮑石亭)’이란 단어에서 ‘유(遊)’자를 ‘놀러 갔다’라고 번역을 한 결과, 포석정은 오늘날까지도 술을 마시고 잔치를 벌이는 장소로 둔갑하여 잔해 내려오게 된 것이다. 같은 글자 ‘유(遊)’자가 삼국유사에도 등장한다. 경덕왕이 백률사를 행차하는 것을 ‘유백률사(遊百栗寺)’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때 ‘유(遊)’자는 ‘가다’의 의미이다. ‘유(遊)’자를 ‘놀러 갔다’라는 해석에 역사는 굳혀지고 있었다. 이러한 해석은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신라의 역사를 왜곡했다는 의견이 등장하고 있다.

 

포석정의 곡수거는 가장 긴 세로축이 10.3m, 가로축이 약 5m, 깊이는 50cm 정도 되는 도랑이 있다. 이 곡수거에 포석정 옆 경주 남산의 계곡에 흐르는 맑은 물을 끌어들였던 것으로 보이나, 이 또한 무리한 해석이 되지 않은지 조심스럽게 접근하여야 할 것 같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물을 끓여 들릴만한 지형이 보이지 않으며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 경주 포석정지 곡수거 입수부    © 정진해

▲ 경주 포석정지 곡수거 입수부와 배수부    © 정진해

▲ 경주 포석정지 곡수거의 모양    © 정진해

 

지금은 포석정 건물의 터는 찾을 수 없고 곡수거 구조만이 남아 있는데 땅바닥의 솟아오름과 꺼짐 등으로 형태가 많이 변형되어 있다. 유배거(流盃渠)는 굴곡진 타원형인데 긴 지름이 6.53m, 짧은 지름이 4.76m이며 타원형 수로의 구배차는 5.9cm이다. 수로의 너비는 약 30cm, 깊이는 20cm이며 타원형 수로의 길이는 타원형의 수로의 길이는 약 22m에 이른다.

 

이 유배거에 물을 담아 술잔을 띄워 실험을 하였는데 결과는 술잔의 크기에 따라 흐르는 속도가 다르고, 술잔 속에 술을 담은 양에 따라 다르며, 절묘한 수로의 굴곡진 곳에서 물이 돌면서 흐르기 때문에 타원형의 수로를 술잔이 흐르는 시간은 약 10여 분이 걸리었다. 이 시간이면 오언시(五言詩)나 칠언시(七言詩) 한 수는 쓸 수 있는 것이다.

 

현재의 상태는 유배거의 머리 쪽에 있는 큰 느티나무 뿌리가 물이 들어오는 입구 쪽을 밀어 올려서 높아진 상태이며 흘러나가는 배수구 쪽은 포석계의 개울에 유실되면서 급속히 낮아져 있다. 유배거는 그간에 보수를 통해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곡수거에 유입한 물은 남산 포석계의 개울물을 나무 홈대로 연결하는 방법도 있지만, 물이 들어오는 부분은 원형으로 이루어져 물을 담는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였고 물이 나가는 배수부 끝은 어떤 형태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현재는 곡수거 형태로 느티나무 뿌리 부분에서 흔적을 감추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형태를 보면 입수부의 원형 부분 위쪽에 또 다른 시설이 있지 않았나 생각할 수 있다. 외부로부터 물이 들어오게 한다면 나무를 홈을 파던가 대나무를 이용하여 물이 입수부로 들어오게 하였을 것이다. 아니면 바가지를 이용하여 물을 퍼 담는 방법을 취했을 가능성도 있다. 곡수거를 돌아 최종적으로 나가는 배수부에도 나무를 이용한 홈통이 있지 않았을 하는 추정을 해 볼 수 있다.

 

▲ 경주 포석정지의 나무    © 정진해

 

지금의 포석정지는 화강암으로 다듬어 만든 곡수거의 형태만 남고 어느 방향에서 물이 입수되고 배수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술 한 잔을 띄워 내릴 수 없는 이곳에 경애왕이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며 제사 의식을 행하였던 곳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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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10/25 [07:16]  최종편집: ⓒ wn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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