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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가 80을 살았다면

  • 기사입력 2019.11.17 21:55
  • 기자명 이영탁 세계미래포럼 이사장

 

논어의 위정(爲政) 편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나는 나이가 마흔이 되어서는 미혹되지 않았고 (不惑), 쉰에는 하늘의 명을 깨달았고 (知天命), 예순에는 남의 말을 들으면 곧 그 이치를 이해하게 되었으며 (耳順), 일흔이 되어서는 무슨 일이든 마음 내키는 대로 하여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 (從心所欲不踰矩)”

 

공자는 익히 아는 대로 2,500년 전 어른이시고 세계 4대 위인 중 한 분이시다. 그러니 이 정도쯤이야 당연한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 번 곰곰이 들여다보자. 나이 40에 불혹의 경지에 들어갔다고?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여러분 가운데 나도 그렇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분이 얼마나 되나요. 그보다는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을 것이다. “나는 나이 40을 훨씬 넘었지만 아직도 불혹과는 거리가 멀어. 살아가면서 갖가지 유혹에 흔들리는 일이 여전히 많아. 남들이 내 속을 들여다본다면 겉과 속이 이렇게 다르냐고 놀랄 걸!”

 

따지고 보면 이럴 수는 있다. 공자는 72년의 생애를 사셨으니 당시로서는 대단한 장수였다. 그때 사람들의 평균수명은 서른을 넘지 않았으리라고 추정된다. 따라서 나이가 마흔을 넘으면 자식들이 결혼해서 손주를 볼 수도 있겠고 대부분의 친구들은 이미 저 세상으로 갔을 것이다. 살아남은 것만 해도 행운이라고 여겨지는 상황에서는 아무래도 크고 작은 유혹에 대범해질 것이다. 거꾸로 지금처럼 평균 수명이 늘어나서 나이 마흔이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는 시기라면 이런 표현을 쓸 수 있었을까. 따라서 나이 40에 불혹이라고 한 걸 요즘 기준으로 봐서는 안 된다는 얘기가 된다.

 

또 가끔씩 이런 생각을 해본다. 공자가 만일 80세 이상 사셨다면 나이 80을 두고는 뭐라고 하셨을까? 불혹(不惑,40)→지천명(知天命,50)→이순(耳順,60)→종심(從心,70)을 지나 80세에 이른 경지를 뭐라고 표현했을까? 나이 40에 이미 불혹의 단계에 들어선 어른이 하늘의 뜻을 깨닫고 나서 이순과 종심의 단계를 지난 다음에는 어떤 경지에 다다를까? 가늠하기 어려운 문제이지만, 그래도 감히 소견을 내 본다면 무심(無心)이 아닐까 한다.

 

여기서 무심이란 어떤 경지를 의미하는가? 불교에서는 온갖 그릇된 생각을 떠난 마음상태, 망념을 벗어난 진심이 바로 무심이라고 한다. 망심(妄心)이 일어나지 않으면 드디어 깨달음에 이르는 경지다. 무념무상의 상태로 수행에 정진하는 사람을 무심도인이라 한다. 이 경우 세상에는 범상한 마음도, 부처님의 마음도 없고 그저 무심한 상태가 된다. 이런 말이 있다. 만약 부처를 구하고자 한다면 그 마음이 곧 부처이고, 도를 알고자 한다면 무심이 곧 도이니라.

 

무심은 원래 분별이 없는 마음을 뜻한다. 우리는 흔히 무심과 무관심을 혼동하는 수가 있다. ‘저 사람은 나에게 너무 무심해서 싫다’고 할 때 무심은 무관심을 뜻한다. 이런 관심 또는 무관심은 이해관계를 전제로 한다. 불교에서 모든 것을 따지고 계산하는 마음을 가리켜 분별심이라 한다. 이해관계를 먼저 따지니 손해 보는 일은 하지 않고, 본의 아니게 할 수 밖에 없을 때는 불만이 쌓이게 마련이다. 무심은 넓고 큰 세상의 이치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이처럼 눈앞의 이해관계에만 집착하는 분별심을 온전히 벗어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무심의 경지에 다다르게 되면 자기중심적인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세상을 향한 집착이나 원망, 짜증 같은 일이 없어진다.

 

무심은 단지 불교 뿐 아니라 모든 종교가 지향하는 공통점이라 생각한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종교는 저마다 선(善)을 전제로 한 교리를 갖추고 있다. 인간의 삶에 중심을 잡아주는 삶의 교본이기도 하고, 한 평생 살아가는 데 필요한 나침반이기도 하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무심의 경지야말로 모든 종교가 제시하는 인간의 궁극적인 모습이 아닐까.

 

결국 무심이란 인간이 지닌 잡다한 근심과 걱정, 시기와 질투, 욕심과 망상을 모두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의 상태에서 만족하는 것이다. 일찍이 맹자가 상선약수(上善若水)를 강조하였듯이 흘러가는 강물처럼 순리대로 살아가는 삶이 곧 무심이다. 그럼으로써 진정한 자아와 참된 도를 만날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 진리와 행복을 거머쥐게 될 것이다. 이것이 곧 인간이 염원하는 무병장수를 성취한 다음 무념무상, 해탈의 경지로 들어가는 모습이다. 가장 멋지고 아름다운 인간 최후의 모습, 그것이 바로 무심이 아니겠는가.

 

요즘 필자도 칠순에 접어들면서 주변의 친구들과 이런 얘기를 가끔 한다. 나이는 들었지만 지금이 젊었을 때보다 훨씬 좋다고. 100년을 살아온 김형석 교수도 60세 이후 일생에 있어 가장 행복한 기간이 온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마도 세상사 이런 저런 욕심과 집착에서 벗어나 주어진 것에 만족하려고 노력하는 때문일 것이다. 이것이 곧 장차 무심의 경지로 다가가기 시작하는 첫 단계라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그러나 주위를 둘러보면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무심은 고사하고 불혹의 근처에도 못간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특히 고위공직자 후보들의 말은 번지르르한데 실제 행적을 펼쳐보면 딴판인 경우가 왜 그리 많은지. 이런 사람들에겐 무심은커녕 불혹이든 뭐든 소귀에 경 읽기가 아니겠는가. 세월도 무심하고 하늘도 무심하다지만 사람이 진정으로 무심의 경지에 이르기는 그만큼 어려운 모양이다. 그래서 인간을 두고 일찍부터 한없이 미약한 존재라고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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