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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NGO] 여행길에서 읽는 역사

  • 기사입력 2019.12.16 16:22
  • 기자명 김기옥/시인
▲ 중산 기념당 앞의 손문 동상 

작년 7월 정년퇴직 후 10년 '마지막 휴가'라는 이름을  붙여 중국 광동성 광저우시를 둘러보았다. 시진핑의 일대일로(one belt one road)라는 야욕의 출발점이 광저우라는 이유 때문이다.

이곳은 BC 221년 진시황이 통일하기 전까지는 남월국(南越國)이었는데, 한나라 때는 서한국(西漢國)이었다. 그런데, 서한국이 동이계 사람들의 나라였다는 연결점이 있기에 서둘러 서한남만왕박물관(西漢南蠻王博物館)을 돌아보았다.

동이계의 나라 서한국이 있던 광저우 

이 박물관은 서한 2대왕 文帝(胡.BC 133~111)의 무덤을 발굴한 매장물을 전시하고 있는데, 나는 묘지형태와 매장방식 그리고  文帝를 북방오랑캐를 의미하는 호(胡)자를 붙여 표기해놓은 점으로 보아 서한국을 건립한 민족이 우리 동이족(東夷族)이라는 추론을 해보았다. 

이런 추리를 하게 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다.

첫째. 묘지 조성 방식이 동이족만 사용하는 적총식(積塚式)에 목관(木棺)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둘째. 목관 사방의 손잡이에 한웅시대 18대 치우천왕을 상징하는 도깨비 가면상을 주물로 만들어 붙였다는 점이다.

셋째, 왕의 옥대(玉帶)에 새겨진 상을 용(龍)이라고 해설하는데, 자세히 보면 까마귀(烏)상이라는 점이다. 삼족오, 해, 새는 우리 겨레의 문화이기 때문이다.

넷째. 머리에 상투를 틀었다는 점이다. 상투는 북방 동이족만의 복식이다.

다섯째, 옥 귀걸이가 홍산문화유적지에서 발굴된 원형 돼지 모양(猪形)과 같다는 점이다.

여섯째. 비파형 단검(短劍)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일곱째. 가야금과 같은 금(琴)을 궁중악기로 사용했다는 점이다.

여덟째, 시신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크고 작은 원형의 은장식을 수백 개 부착했다는 점이다. 원형 은장식은 천손(天孫)임을 표시하는 동이족 고유의 상징이다.

아홉째. 묘지 형태가 선비 사(士)자 형태인데, 그것은 한자를 창제한  민족만이 사용할 수 있는 묘지형식이다.

치우천왕의 후손들이 세운 서한국

위와 같은 특이점 외에 더욱 두드러진 점은 '서한인들은 체구가 크고 용맹해서  북월(지금의  하노이)지방까지 다스렸다'는 기록에서 이들이 화하족들과 다른 종족이었으며, 그것이 우리 조상들의 일부였다는 확신을 가지고 이동경로를 더듬어 보았다.

약 4,700여 년 전, 중원의 패권을 놓고 화하(漢)족의 조상인 황제(黃帝) 헌원과 우리 조상 치우천황이 대결전을 벌였는데 ‘치우천황이 져서 강남(양자강 이남)으로 패퇴하였다’는 사기의 기록으로 볼 때 서한국은 치우천황의 후손들이 세운 나라임이 확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이점이 위ㆍ촉ㆍ오 삼국시대까지 남만(=서한)국이 존립한 흔적을 발견하여 서한의 역사와 연원을 밝힐 수 있었는데, 이를 은폐했다는 실토를 들었기 때문이다. 

서한국의 후손들은 강남 일대와 티베트, 네팔 등지까지 묘족ㆍ장족ㆍ백족 등 다양한 이름의 소수민족으로 흩어져 살고 있다. 이들을 다 합치면 1억 5천만 명쯤으로 중국정부는 발표하고 있지만, 일부에서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전까지 이들은 묘족, 강(岡)족 등 민족공동체로 살고 있었으나 중국이 한족 중심으로 개편하면서 이들의 규모가 커서 단합하면 위험해질 수 있으므로 거주 지역에 따라 각각 다른 이름을 붙여 36개의 소수민족으로 분리하여 통치하고 있지만, 그들의 공통 조상이 치우천왕이다. 참으로 가증스러운 처사이고 역사 도적의 일면이기도 하다. 언젠가는 한족으로부터 분리를 추진할 가능성도 점칠 수 있는 부분이다.

치우천왕 같은 영걸의 탄생을 기대하며

이곳은 손문이 혁명을 일으켜 성공한 후 1921~1922년간에 총통으로 집무한 곳이기도 하고, 시진핑이 일대일로라는 야욕을 가지게 한 출발지점이다. 우람한 중산(中山) 손문의 동상 앞에서 소인과 군자(=영웅)의 차이를 생각해봤다. 첫째가 소인은 하루하루 연명할 것을 생각하지만 군자는 남과의 공생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데 있어보였으며, 둘째는 그것이 생각에 그치지 않고 실행하는 데 있는 것으로 보였다. 이런 영웅이 우리나라에도 있었으니 전봉준 장군이었다. 그의 뜻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기에 실패했다. 앞으로도 그런 안목과 실천력을 가진 지도나가 나오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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