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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DNA를 찾아서(3)
폭풍처럼 유럽 대륙에 등장한 아시아 기마군단 ‘훈 제국’
 
김석동   기사입력  2020/02/13 [12:52]

2. 폭풍처럼 유럽 대륙에 등장한 아시아 기마군단 ‘훈 제국’

 

사라진 흉노, 훈 제국으로 부활해 유럽 중심부를 강타

 

흉노는 원래 파미르 고원을 중심으로 한 중앙아시아 지역을 지칭하는 투르키스탄(투르크인의 땅이란 뜻)에서 살아온 민족이다. 기원전 3세기경 몽골 고원을 차지하고 최초의 스텝 제국을 건설한 기마군단 흉노는 대완, 대하, 월지, 오손, 누란 등 동투르키스탄 지역 일대를 정복하고, 기원전 1세기경에는 실크로드 중심축을 장악하는 강대국이 되었다. 중국 최초의 통일 왕조인 진, 그리고 이어 등장한 한과 쟁패하면서 세력을 떨쳐오던 흉노는 몇 차례 내분으로 약화되면서 실크로드의 지배권을 중국에게 빼앗기고 기원전 48년 동·서흉노로 1차 분열됐다. 

 

 

그 후 질지가 이끄는 서흉노는 몽골 지역으로부터 서투르키스탄으로 이동했다. 이들은 아랄해와 발하쉬 북부 초원까지 진군했으나 기원전 36년 질지가 한의 진탕에 잡혀 죽자 역사 기록에서 사라졌다. 동흉노는 48년경 화북 지역 일대의 호한야가 지휘하는 남흉노와 몽골 고원 일대의 북흉노로 2차 분열됐다. 남흉노는 3세기 초 중국에 동화·흡수되었고, 북흉노는 한과 선비의 세력에 쫓겨서 서쪽으로 이동하여 2세기 초반에는 투르키스탄 일대에 산재해 살았다. 이후 2세기 중반경 톈산 산맥 북부에서 아랄해 지역으로 다시 이동했다. 

 

이와 같이 흉노 세력은 분열·약화되고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1세기 말에는 중국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그러나 그로부터 약 300년이 지난 4세기(370~375년경) 흉노의 후예들이 이번에는 로마인들 앞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들이 바로 훈 제국을 건설하여 세계사의 전면에 등장한 훈족HUN이다. 유라시아 대초원의 서부 끝으로 가면 벨로루시 남부와 우크라이나 북부의 넓은 지역에 걸쳐 유럽 최대의 습지인 프리페트 습지Pripet Marshes가 나타난다. 이 광활한 늪지대는 사람들이 건널 수 없는 곳이어서 동서양을 가로막는 자연 장벽이 되어왔고, 그래서 드네프르강 서쪽에 살던 이란계 유목민인 알란족들은 동쪽 게르만족의 침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4세기경 이 습지의 동쪽인 우크라이나 대초원은 게르만족 일파인 동고트가 차지하고 있었는데 당시 ‘고트족의 알렉산드로스 대제’라 불리는 에르마나리크 왕이 이끌던 동고트는 주변의 슬라브족을 정복해 거대한 국가를 형성하고 있었다. 대초원을 떠나 서쪽으로 이동하던 훈족은 아랄해 북부 초원 일대에 일시 정착했다가 곧이어 서쪽으로 향해 볼가강, 돈강을 건너 이란계 유목민인 알란족을 정복했다. 그 서쪽으로는 프리페트 대습지가 나타나 잠시 서진을 멈추었지만 마침 사슴 사냥에 나섰던 한 무리의 훈족이 사슴을 따라가다 우연히 습지를 통과하게 되고 드디어 우크라이나 대초원을 발견하게 되었다. 습지를 건너는 길을 찾은 것이다. 훈족은 374년경 발라미르(Balamir, 또는 발람베르Balamber)의 지휘하에 유럽을 향하여 파죽지세로 진격했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세대인 그 옛날 조상들과 매우 흡사한 방식, 즉 말, 나무안장, 등자, 복합곡궁, 삼각철 화살 등으로 중무장한 기마군단의 모습으로 유

럽인들의 눈앞에 혜성처럼 나타났다. 발라미르가 이끄는 훈족 기병은 드네프르강을 건너 동고트를 멸망시키고 서고트도 쫓아버렸다. 쫓긴 고트족들은 훈족을 피해 도나우강을 건너 로마 영토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놀라운 기동성과 뛰어난 기마전술로 게르만족 등 유럽 세력을 순식간에 압도했다. 훈족의 공격은 유럽인들에게는 ‘신의 징벌’ 또는 ‘신의 채찍’이라 불릴 정도로 공포의 대상이었다. 당시 역사가들은 훈족에 대한 기록을 무엇보다 극도의 공포와 증오로 생생하게 가득 채웠다. 

 

필자가 러시아 타타르 공화국의 수도인 카잔을 방문했을 때 박물관에서 훈족을 마치 귀신과 같이 형상화한 그림을 볼 수 있었는데, 바로 이러한 공포를 형상화한 것이었다. 6세기경에 건설된 베니스는 훈족의 침입에 놀란 상인들이 기마군단이 물을 건너지 못한다는 데 착안하여 물 위에 건설한 수상도시이다. 바로 훈족의 유럽 진출을 역사적으로 웅변하는 도시이다. 이후 400년경 다시 발라미르의 아들 울딘이 동유럽 평원으로 공격해 들어가자 놀란 고트족이 헝가리, 이탈리아 반도로 이동했다. 이는 역사가 기록하고 있는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을 촉발시켰다.

 

아틸라의 등장과 위기에 처한 유럽

 

 

수세대에 걸쳐 훈족은 서쪽으로 이동해 로마 국경 가까이에까지 이르렀으나 로마는 크게 긴장하지 않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로마 제국은 훈족을 직접적인 큰 위협으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변방의 게르만족을 공격할 때에는 훈족 기병의 지원을 받는 등 때로는 동맹 관계를 가졌다. 그러나 434년 아틸라가 훈족의 지배권을 확립한 후에는 사정이 완전히 달라졌다. 권력을 장악한 훈족의 왕 아틸라는 우선 주변 지역의 게르만 민족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해 나갔다. 그들은 아틸라의 적수가 될 수 없었고, 로마 주변은 아틸라가 완전 장악하게 되었다. 

 

436년 2만의 부르군드군이 아틸라군에 전멸당한 전쟁이 바로 영웅서사시 ‘니벨룽겐의 노래’의 주제이다. 주변을 정리한 아틸라는 441년 동로마 제국에 전쟁을 선포하고 도나우강을 건너 주요 도시를 초토화했다. 이에 동로마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442년 아틸라군과 굴욕적으로 강화 조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447년에는 동로마 제국을 다시 공격하여 콘스탄티노플을 제외한 발칸반도를 거의 초토화시켰다. 451년에는 라인강을 건너 갈리아를 공격하여 메츠를 점령하고 오를레앙을 포위하는 등 공포의 진군을 계속했다. 

 

452년 이탈리아로 쳐들어가자 서로마 황제는 도주하고, 로마 대주교 레오는 화해를 간곡히 요청했다. 그러나 전염병과 병참 문제가 겹치면서 아틸라는 본거지인 헝가리 대평원의 판노니아로 돌아왔다. 이듬해 453년, 세계사를 바꾸는 대사건이 일어났다. 아틸라가 게르만 제후의 딸 일디코와 결혼 첫날밤에 죽었다. 의문의 사망이었다. 지금도 독살, 과음, 복상사 등 다양한 추측이 있다. 이로써 아틸라가 준비 중이던 콘스탄티노플 정복이 무산되었다. 아틸라가 죽자 세 아들이 왕위를 두고 분열을 일으키면서 훈 제국은 약화되었다. 

 

왕위를 이은 장남 엘라크가 이끄는 훈 기병은 454년 판노니아의 네다오Nedao 강변에서 벌어진 대전투에서 게르만 연합군에 패배하고 러시아 초원으로 후퇴했다. 이로써 게르만 부족에 대한 훈의 지배력은 눈에 띄게 줄어들게 됐다. 468년 훈은 전력을 가다듬어 동로마를 공격하지만 실패하고, 잔존 세력은 흑해

북부로 밀려나 세력을 잃게 됐다. 훈족은 혜성과 같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여 단기간에 엄청나게 큰 세력으로 성장했지만, 지도자의 사망과 함께 갑자기 역사의 장막 뒤로 퇴장하는 ‘초원의 방식’으로 사라졌다.

 

훈 제국 흥망성쇠의 열쇠

 

훈 제국은 면적이 370만 km2를 넘는 유럽 최강 국가였으나 아틸라 사후 급격히 혼란에 빠지며 분열됐다. 그 결과 건국하여 세력을 떨친 지 불과 십수 년 만에 붕괴하면서 역사에서 사라졌다. 먼저 훈 제국의 세계사적 위치를 살펴보자. 유럽인들에게 훈족은 유럽 지역에 혜성과 같이 등장하여 질풍노도를 일으키다 바람같이 사라져버린 흉포한 야만 세력으로 인식되고 있다. 훈족은 기록을 남기지 않았고, 침략당한 쪽에서만 기록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훈 제국은 어느 날 갑자기 아무런 배경 없이 역사 무대에 등장한 신기루와 같은 국가는 결코 아니었다. 

 

그들은 흉노의 후예로 무장·편제·전술 등에서 스키타이에 이어 유라시아 대초원 기마군단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놀라운 기동력과 마상궁술로 무장한 훈족기병의 가공할 전투력은 과거 스키타이, 흉노에 비해 절대 떨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유럽 중심부에서 전쟁을 벌인 최초의 아시아 기마유목군단으로, 그들의 유럽

침입은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과 이에 따른 유럽사의 대변혁을 초래하는 등 세계사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만약 아틸라가 결혼 첫날밤 돌연사를 하지 않았다면 유럽의 역사는 크게 바뀌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훈 제국의 급격한 성장 배경은 무엇인가. 아랄 초원에서 유목 생활을 하던 흉노 잔존 세력은 발라미르·울딘·아틸라로 이어지는 걸출한 지도자를 배출했다. 초원 제국의 역사를 보면, 흉노(묵특), 돌궐(부민칸), 선비(단석괴), 유연(사륜칸), 거란(야율아보기), 몽골(칭기즈칸), 티무르 제국(티무르), 금(아골타), 청(누르하치) 등에서 알 수 있듯이 뛰어난 지도자가 나타날 때 순식간에 거대 제국을 건설했다. 

 

아틸라는 검소하면서 공정한데다, 담대함과 지략에서도 뛰어나 기마군단 최고 지도자의 하나로 꼽힌다. 다음 훈 제국은 스스로의 강점을 최대한 발휘·활용했다. 유목민 기마군단으로부터 이어받은 기동성과 전투력·전술을 통해 단시간 내에 최강의 군사력을 갖추었다. 여기에 포용력도 한몫을 했다. 훈 제국은 훈족이 중심이었으나, 우랄·라인강 사이의 사르마트·알란·오스트로고트·게피다이 등 여러 민족을 유연하게 통합하여 세력을 급속히 키울 수 있었다.

 

그런데 훈 제국은 왜 역사에서 갑자기 사라졌을까? 먼저 아틸라의 영도 아래 통합되었던 민족들이 아틸라 사후 반란을 일으켜 제국의 기초가 뿌리째 흔들린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한마디로 훈 제국은 전성기와 달리 이민족과의 협력·교류·연대를 유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훈 내부적으로도 출중한 리더였던 아틸라가 죽은 후 형제들 간의 세력 분열과 다툼이 겹치면서 국력이 급속히 약화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 결과 훈 제국은 초원의 방식으로 단기간에 강대한 세력을 형성했다가 급속하게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훈족은 누구인가

 

훈족은 4세기 중반에 유럽 동부에 폭풍이 몰아치듯 등장하고 유럽의 지도와 역사, 나아가 세계사를 순식간에 바꿔버렸다. 이렇게 등장한 정체불명의 유목민들을 두고, 과연 그들은 누구인가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어 왔다. 이들은 문자를 사용하지 않아 기록을 남기지 않았고 유적·유물 또한 많이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이들은 아시아 유목민들의 기마군단이며 서진한 흉노 세력의 후예라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터키는 물론 중앙아시아의 투르크메니스탄, 코카서스 지역의 아제르바이젠 등 투르크계 국가에서는 훈족을 투르크 유목민이라 한다. 터키의 국사 교과서는 흉노를 그들의 조상이라 하고, 그 후예가 유럽에 진출한 것이 훈 제국이라고 한다. 몽골 교과서는 흉노 제국을 세운 흉노인들이 유럽에서 아틸라의 훈 제국

(434~453년)을 세워 드네프르강에서 도나우강까지의 광활한 영토를 차지하였으며, 비잔티움 제국으로부터 공납을 받았다고 설명하고 있다. 나아가 아틸라는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는 데 영향을 끼쳐 수많은 국가가 로마 제국에서 해방되어 독립국으로 발전하는 데 기여했다고 주장한다.

 

중국 기록에서는 1세기 말경 흉노가 사라졌다. 이들은 그 후 2세기 후반경 유럽의 기록에 훈으로 등장했다. 많지는 않으나 벽화나 기록에 남은 것을 보면, 훈족은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낮은 코, 검은 머리, 납작한 코의 작은 체구를 가진 전형적인 동양인의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전쟁 수행방법, 무기, 유물 등을 봐도 영락없는 아시아 기마군단이었다. 그들은 스키타이와 흉노에 이어 전형적인 대초원 아시아 기마군단의 전술·전법을 구사했다. 훈족이 사용한 활은 나무와 동물 뿔을 접착해 강도를 극대화한 복합곡궁이었다. 

 

이는 유라시아 대초원 기마군단이 사용하면서 이름을 떨쳤던 무기인데, 바로 고구려의 맥궁과 같은 활이다. 훈족이 사용한 활은 최대 사거리 300m, 유효 사거리 150m나 됐다. 이 외에도 말, 등자 등 이들의 출신을 말해주는 수많은 증거가 있다. 또 ‘동복’이라는 독특한 청동 솥을 사용했는데, 이것은 유목민의 부족장이 제사의식 때 고기를 삶던 용기로 스키타이인과 흉노인들이 다수 제작하고 사용했던 것이다. 

 

동복은 한반도, 만주, 중국 화북 지역, 몽골 고원, 중앙아시아 일대에서 동부유럽으로 이어지는 곳에서 발굴되고 있으며, 유라시아 대초원의 주인공인 기마유목민의 활동 영역을 보여주는 전유물이다. 한반도 남부의 가야 지역 대성동 고분에서도 동복이 발견된 바 있다. 훈족이 유럽에서 위세를 떨치던 시대는 고구려의 광개토 대왕과 장수왕이 정복 전쟁을 활발히 전개해서 동북아의 주인공으로 등장했던 시기이다. 흉노와 우리와의 관계처럼 흉노의 후예인 훈과 우리의 관계 또한 주목의 대상이다. 

 

훈족의 몽고반점, 복합곡궁, 편두·순장 등의 관습, 이동 경로의 많은 유물 등에 대한 해석을 바탕으로 한민족과의 친연관계를 밝히는 연구들이 있다. 훈족이 파괴한 이탈리아 북부 아퀼레이아 시의 성당에는 훈족 기병이 활 쏘는 모습을 그린 프레스코 벽화가 있는데, 이 벽화는 고구려 무용총 벽화와 흡사하다. 독일 제2공영방송인 ZDF TV는 <역사의 비밀> 다큐멘터리(1994)에서 “훈족의 원류가 아시아 최동단의 한국인일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가야 지방 등에서 발굴된 동복이 훈족의 서쪽 이동로를 따라 다수 발굴되고 있고, 또 경주 금령총에서 발굴된 기마인물상에서 말 등에 동복을 싣고 있는 것들을 들어 한민족과 훈족이 직접적인 관계가 있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비밀스런 아시아의 초기 역사에서 훈족의 실제 역사적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세인의 주목을 끈 고고학적 발굴물이 그들의 원래 고향은 아시아 대륙의 최동단일 수 있다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한국의 작은 도시 경주 근교의 묘에서 부장품으로 점토상이 발굴되었다. 말을 탄 사람 뒤에 흔치 않게 생긴 솥이 실려 있는 기마상. 이 솥은 똑바로 세워 말 탄 사람의 등에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런 형태의 그릇은 지금까지 이곳과 훈족의 이동 경

로에서만 발견되었다. (ZDF TV 다큐멘터리)"

 

아틸라 사후 막내아들 이르네크Irnek가 훈 제국의 잔존 세력을 이끌고 중부유럽에서 흑해 북부로 이동하여 아시아에서 서진해온 투르크계 오구르족(오구즈족과 같은 계통으로 알려짐)과 연합하여 불가르 칸국(482~550년)을 건설했고 이들이 후에 발칸반도 쪽으로 이동하여 오늘날 불가리아의 원류가 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편, 훈 제국 멸망 후 훈족은 대부분 동쪽으로 돌아가 흑해와 카스피해 연안 등지에 정착했으나 일부는 중부유럽에 남아있다가 후에 다시유럽으로 서진해 들어온 투르크계 마자르인들과 함께 9세기 후반 헝가리 건국의 주역이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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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0/02/13 [12:52]   ⓒ wng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