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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자성이라 불리운 조선시대 대표적 읍성 ‘해미읍성’

  • 기사입력 2020.03.29 07:17
  • 기자명 정진해(문화재 전문위원)

문화재 : 해미읍성(사적 제116호), 충남기념물 제172호 해미읍성 회화나무
소재지 :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동문1길 36-1

 해미읍성 진남문 © 정진해

읍성은 도성과 구별된다. 고조선의 도성은 왕검성이고 읍성에 대한 기록은 없다. 고려 시대에는 주요 지방 도시에 읍성이 축조되면서 조선왕조에 이어졌다. 토축으로 축성된 읍성은 차츰 석축으로 고치거나 넓게 다시 축조가 진행됐다.

조선 시대의 읍성은 내륙지방에는 비교적 큰 고을에만 있었고, 해안 근처의 고을에는 거의 모두가 있었다. 읍성은 부(府)·목(牧)·군(郡)·현의 행정구역 단위의 등급에 따라 그 크기도 차이가 있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현 남부지역에 69개소, ≪동국여지승람≫에는 95개소, ≪동국문헌비고≫에는 104개소의 읍성이 기록되어 있다.

읍성의 축성은 국정이 혼란한 틈을 타서 왜구가 해안지방에 침입하여 막대한 피해를 줌으로써 이를 방비하여 위해 쌓게 된 성이다. 특히 고려말부터 시작된 국정의 혼란은 왜구의 활동이 심해지면서 이를 효과적으로 제압하기 위하여 조선 태종 17년(1417)부터 세종 3년(1421) 사이에 덕산에 있던 충청병마도절제사영(忠淸兵馬都節制使營)을 해미로 옮기고자 절제사를 지낸 이지실(李之實)을 충청도로 보내 병영을 이설하기에 적합한 곳을 살펴보게 하였다. 성종 22년(1491)에 읍성을 축조하여 영장(營將)이 머물면서 서해안 방어를 맡았다.

이 당시 축조에 관한 기록은 문종 1년(1451) 9월 5일 자의 실록의 기사에 의하면 “해미현 내상성(內廂城)은 주위가 3,352척, 높이가 12척이고, 여장(女墻)의 높이는 3척이다. 적대(敵臺) 18개소 중 16개소는 아직 쌓지 않았고, 문은 4곳이다. 옹성(擁城)이 없으며, 여장이 688개, 해자(海子)의 주위는 3,626척으로 성안에 샘이 3개소가 있다”라고 하여 당시 해미내상성(海美內廂城)의 건물 규모와 배치 상황이 확인된다.

성현(成俔, 1439~1504)의 「청허정기(淸虛亭記)」에 “영락(永樂) 1416년(병신년)에 이산에서 이설한 이래 겨우 남문만이 제 모습을 갖추고 있었는데, 그나마 70여 년이 지나 성문과 관사(館舍)가 날로 퇴이해져 중수하지 않을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병사 조숙기(曺淑沂)가 조정의 허락을 받아 내어 먼저 서문 사영(四楹)을 이루고 동문·남문·북문을 순차로 결구하였는데, “남문에 농석( 石)과 홍예를 만들고 또 후원 솔밭에 정자를 지어 청허정(淸虛亭)이라 하였다”고 한다.

효종 3년(1652)에 병마절도사영이 230여 년간 군사권을 행사하던 성으로 있다가 병마절도사영이 청주로 이설되고 해미현의 관아가 이 성으로 옮겨졌다. 1914년까지 겸영장(兼營將)이 배치되는 호서좌영으로서 내포지방의 군사권을 행사하던 곳이었다. 이때 '해미내상성'(海美內廂城)이 해미읍성(海美邑城)이라 개명됐다.

해미읍성 동문  ©정진해

해미읍성의 축조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기록은 읍성이 절도사여해미현의 동쪽 3리에 자리하고, 석성으로 둘레가 3,172척, 높이가 15척이며 우물 3곳과 군창이 갖추어져 졌다고 하였다.  『해미읍지(海美邑誌)』의 기록은 성벽의 둘레가 6,630척, 높이가 13척이며, 치성(雉城)이 380첩(堞)이며, 옹성(甕城)이 2곳이라고 하였다. 또한 남문은 3칸으로 홍예(虹霓)와 2층의 다락을 두었고, 동문과 서문은 3칸, 북문은 없고, 우물이 6곳으로 성 밖에는 호(壕)가 없다고 했다. 두 기록으로 보면 조선 초기에 설치된 충청병마절도사영과 해미읍성은 별개이던가, 아니면 해미읍성 축조하면서 확장하였던 것이 아닌가 한다.

해미읍성 서문  ©정진해

선조 12년(1579)에 이순신은 3번째 관직으로 충청병마절도사의 군관으로 부임하여 해미읍성에서 훈련원봉사로 10개월간 근무하였는데 당시 전하는 기록에 '공은 구차하게 낮고 고달픈 자리에 있으면서도 자신의 뜻을 꺾고 남을 따른 적이 한 번도 없었으며 상관인 주장에게 부정한 사실이 있으면 극진히 말하며, 이를 바로 잡았고, 청렴한 자세로 자신의 몸을 단속하면서 털끝만큼도 사적인 감정을 개입시키는 법이 없었다‘고 전한다.

해미읍성 암문  © 정진해

적군의 접근을 어렵게 하기 위해 가시가 많은 탱자나무를 성 주변에 심었다고 하여 탱자성이라 불리는 해미읍성은 평지에 타원형이며 성벽은 둘레가 1.8km, 높이는 5m에 이르고 성벽 밖 2m의 깊이의 해자를 팠으며, 남문인 진남문과 동문(잠양루)과 서문(지성루)이 있고 북문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으로 보며 암문 1곳이 있다. 성 내에는 민가와 학교, 동헌(東軒)·어사(御舍)·교련청(敎鍊廳)·작청(作廳)·사령청(使令廳) 등의 관아(官衙) 건물이 있었으나 민가와 학교는 철거하고, 1974년에 동문과 서문을 복원하였다. 또한 동헌 서쪽에 객사(客舍) 터와 아문(衙門) 서쪽 30m 지점에 옛 아문 터, 관아를 둘러싼 돌담의 자취도 확인됐다.

 해마읍성 성벽 © 정진해

읍성의 정문인 진남문은 앞쪽이 아치 모양의 홍예문을 두었고 안쪽은 평거식을 두었다. 위층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의 누각을 두었다. 성벽은 홍예의 좌우 앞으로 나오게 쌓아 성문이 한발 뒤쪽으로 물러나 있는 형태이다. 남문에는 옹성을 두지 않았고 성상에는 여장을 두지 않았다. 진남문 양편 성돌에는 한자로 공주ㆍ청주ㆍ임천 등의 고을 이름이 새겨져 있다. 지역별로 구간을 나누어 쌓았음을 보여 주는 표시로, 요즘으로 치면 ‘시공책임제’였다. 진남문 문루 아래 받침돌에는 ‘황명홍치사년신해조(皇明弘治四年辛亥造)’라는 글자가 붉은색으로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홍치’가 명나라 효종의 연호인 것으로 미루어 성종 22년(1491) 진남문을 새로 고친 것으로 추정되는 표식이다. 치성에는 정면 1칸, 측면 3칸의 우진각지붕의 누각을 두었다.

해마읍성 치성  © 정진해

성내에는 별도의 담으로 둘린 관아건물이 배치되어 있다. 2층 문루 형식의 호서좌영 관아 정문은 3칸, 측면 2칸의 2층 문루 형식의 건물로 아래층 3칸에 달아 그 문으로 통행하고 상층은 누각을 만든 전형적인 관아문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남쪽 정가운데 있다 하여 일명 진남문으로 불린다. 객사는 건물의 중앙 정청에 궐(闕) 자가 새겨진 위패를 모시고 삭망(매월 초하루, 보름)에 관아의 대소 관원들이 국왕에 대한 예를 올렸으며, 좌우의 익실은 조정이나 상부에서 파견된 관원 및 귀빈들의 숙소로 사용되었다. 이 객사는 발굴조사와 고증을 거쳐 1999년 7월에 정면 7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의 건물로 복원했다.

동헌은 병마절도사를 비롯한 현감겸영장의 집무실로서 관할지역의 일반 행정업무와 재판 등이 행해지던 건물이다. 해미 현감겸영장은 인근 12개 군, 현의 병무행정과 토포사(討捕使)를 겸한 지휘였다. 옥사는 1935년에 간행된 <해미순교자약사>를 토대로 복원했으며 내옥과 외곡이 있고, 각각 정면 3칸의 우진각지붕의 건물로 남녀의 옥사가 구분되어 있다. 1790년부터 100여 년간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을 국사범으로 규정하여 이곳에서 투옥 및 처형을 하였는데,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도 이곳에서 옥고를 치르고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해마읍성 해자  © 정진해

책실은 책과 문서를 보관하며 현감의 자제가 거처하던 곳이다. 내아는 관리와 가족들이 생활하던 살림집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의 건물로 2000년 11월에 복원했다.

동헌에서 뒤편 계단을 오르면 해미읍성의 또 다른 면모가 드러난다. 좌우로 소나무와 대나무 숲이 조성된 언덕 한가운데에 정자 하나가 서 있다. ‘맑은 기운으로 욕심을 비우는 곳’이라는 의미의 청허정(淸虛停)이다. 성종 22년 충청병마절도사로 부임한 조기숙이 지은 정자로, 훈련하던 병사들이 휴식을 취하고, 문객들이 글을 짓는 곳이었다. 원래 청허정 자리는 장군당이란 신당이 있었는데 일제 강점기에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 청허정을 세워 해미읍을 내려다보이는 전망대 역할을 하고 있다. 민속 가옥은 옥사 동쪽에 있으며, 조선 시대 부농, 서리(말단관리), 상인의 집을 재현했다.

읍성 내에는 호야나무라 불리는 300년 수령의 회화나무 한 그루가 감옥 입구에 자라고 있다. 이 회화나무는 1866년 병인박해 때 천주교 신자들을 이 나무에 매달아 고문했다고 전해진다.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용은 당시 천주교의 교인이란 죄명으로 해미읍성으로 열흘간 귀양을 왔다. 1790년대 정조 때부터 시작된 천주교 박해는 1866년 병인양요와 1868년 오페르트 도굴 사건 이후 더욱 극심해졌다. 이에 해미진영의 겸영장은 내포 지방 13개 군현의 군사관을 쥐고 있었으므로 해당 자택의 교도들을 모두 잡아들여 모두 해미읍성에 처형하였는데 그 수가 무려 1,800여 명 이상 이었다고 전한다. 이때 처형에 사용되었던 이 회화나무는 천주교 신자들을 끌어내어 이 나무의 동쪽으로 뻗어있던 가지에 철삿줄로 머리채를 매달아 고문하였으며 철삿줄이 박혀있던 흔적이 지금까지도 희미하게 남아 있고 동쪽으로 뻗어 있던 가지는 1940년대에, 1969년 6월 26일에 폭풍으로 인해 부러져 외과수술을 거치고, 2004년 4월에 다시 외과수술 및 토양 개량 등으로 보호 관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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