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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DNA를 찾아서(7회) 기마유목민의 새로운 역사를 전개한 ‘위구르 제국’

  • 기사입력 2020.07.01 16:16
  • 기자명 김석동
▲ 필자 김석동 

2. 기마유목민의 새로운 역사를 전개한 ‘위구르 제국’

위구르인은 누구인가
기마유목민의 진원지 몽골 고원은 흉노(기원전 3세기~기원후 2세기), 선비(기원후 1~3세기), 유연(기원후 4~6세기), 돌궐(기원후 6~8세기) 등이 차례로 지배하다 위구르가 이어받았다. 위구르는 돌궐 시대까지는 몽골 고원에서 활동하였으나 이후 중앙아시아까지 활동 무대를 넓힌 민족이다. 이들은 기원전 3세기경 진秦시대에 몽골 고원에 살던 정령丁零부족에 이어 5세기경 남북조 시대 톈산 산맥 일대에 살던 철륵鐵勒 부족에서 유래했다고 알려져 있다.

수·당 시대에는 회흘回紇(위구르), 회골回?, 송·원 시대에는 외오아畏吾兒로 불렸다. 《구당서》 <회흘전>은 다음과 같이 위구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회흘回紇은 그 선조가 흉노인데 후위 시대에 철륵 부락이라고 불렀다. 그 무리는 아주 작았으나 그 습속이 용맹하고 강했는데 고차高車에 의탁했다가 돌궐에 속하게 되면서 근래에는 특륵特勒이라고 한다. 군장이 없이 주거가 일정하지 않게 물과 풀을 따라 옮겨 다니는데 사람들의 성격이 흉악하고 잔인하나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것을 잘했으며 탐욕이 아주 심해 도둑질하는 것을 생업으로 삼았다. 돌궐이 나라를 건국한 이래 동쪽과 서쪽으로 정벌을 할 때 모두 그의 힘을 밑천으로 삼아 북방의 땅을 제압할 수 있었다7.”

이 기록은 기마유목민 위구르의 조상은 흉노족이라고 밝히고 있는 것과 동시에 기마군단에 대한 당시 중국인들의 두려움과 적대감을 적나라하게 담고 있다.

1930년대 들어 중국 신장성新疆省 정부는 위구르인들에 대해 웨이우얼維吾爾(유오이)라는 호칭을 정했다. 위구르인은 현재 중국의 신장 웨이우얼 자치구(면적 약 166만 km2)에 약 880만 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중국내 위구르인의 99%에 해당한다.

이들은 중국 소수 민족 가운데 인구 규모로 보면 장족, 만주족, 회족, 묘족에 이어 다섯 번째다.

위구르인들은 신장 웨이우얼 자치구 내의 타림 분지, 투르판, 하미, 이리, 우루무치 등 톈산 산맥 북부에 다수 거주하고 있으며, 중국 외에 중앙아시아 지역에도 일부 산재해 살고 있다.

돌궐을 멸망시키고 초원 강자로 등장한 위구르 제국
돌궐을 멸망시키고 초원 강자로 등장한 위구르 제국 위구르는 설연타, 돌궐 등에 복속하다가 8세기 초 후돌궐 혼란기를 틈타 세력을 키웠다. 744년 돌궐 제국을 멸망시키고 쿠틀루그 빌게 카간骨力裵羅이 즉위하여 위구르 제국을 건설했다.

이즈음 당나라에서는 안사의 난(755~763년)이 일어났다. 현종 때 소그드 출신의 안록산과 사사명이 반란을 일으켜 현종과 양귀비가 피신한 사이에 장안을 점령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756년). 그러나 반란 우두머리 두 사람이 모두 살해되면서 실패한 유명한 사건이다.

당나라는 반란 진압을 위해 주변국들에 지원을 요청했고, 이에 위구르는 강력한 기마군단을 보내 반란군을 격파하고 낙양과 장안을 수복해 당나라를 구했다. 다시 왕권을 회복한 당나라는 공주를 위구르 카간에게 시집보내고, 방대한 공물로 보답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위구르는 동방 세계의 최강세력으로 급부상, 100년 가까이 존속한 초원 제국으로 역사에 이름을 올렸다.

위구르 시대에는 유목민 문화에 농경 문화가 도입되면서 도시화와 정착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했고, 이를 토대로 유목민 최초로 성곽도시가 건설됐다. 몽골의 오르혼강 상류에 있는 위구르 제국의 수도 카라발가순은 초원로의 행정 및 교역 요충지로 비문과 성벽이 발굴되어 그들 문명의 흔적을 짐작하게 한다. 이 일대는 이전의 돌궐, 이후의 몽골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몽골 제국의 초기 수도였던 카라코룸이 이곳에서 수십 킬로미터 불과한 곳에 있다. 위구르인들은 실크로드의 중심지에서 동서 교역에 큰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유목과 농경, 동서 문화의 융합을 통해 새로운 위구르 문화를 구축했다. 그들은 초기에는 돌궐 문자를 썼으나 소그드인의 영향을 받아 스스로 위구르 문자를 만들어 사용했고, 높은 수준의 문화 예술을 꽃피우면서 쿠차·둔황·투르판 등지에 문서와 벽화 등 다수의 문화 유적을 남겼다.

위구르 제국은 840년 투르크계 키르기스에게 멸망했으나, 위구르인들은 제국의 멸망 후에도 간쑤, 둔황, 투르판 등 실크로드의 오아시스 지역과 중앙아시아에 투르크계 국가들을 건설했다. 9세기 중반 위구르인들은 실크로드의 허시후이랑 서부 지역에 하서 위구르를 세웠으나 1026년 티베트계 탕구트에 멸망했고, 비슷한 시기에 더 서진하여 톈산 산맥 일대에 톈산 위구르 세력을 형성했으나 13세기 초 칭기즈칸 군에 멸망했다.

중앙아시아에서 전개되는 기마유목민의 역사 중앙아시아 지역은 투르키스탄Trukistan이라 불렸고, 이는 ‘투르크인Turk의 땅Stan’이란 뜻이다. 투르키스탄은 톈산 산맥과 파미르 고원을 경계로 동서로 나누어지는데, 동투르키스탄은 지금의 중국 신장 웨이우얼 자치구이며, 서투르키스탄은 중앙아시아 지역이다.

신장 지역은 1760년 청나라 건륭제 때 중국으로 편입되었으나 그 후에도 민족적 전통을 유지하며 분리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1930~1940년대 두 차례 동투르키스탄 공화국이란 이름으로 일부 지역이 독립을 선언하였으나, 1949년 중국이 재점령하여 독립이 무산되었다. 서투르키스탄은 오늘날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아프가니스탄 등이 있는 땅으로, 이들 국가는 1990년대 초 소련이 해체되면서 독립했다. 이 여파로 동투르키스탄 지역인 중국의 신장 웨이우얼에서도 분리독립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중앙아시아 지역은 오래전부터 기마유목민이 활동해오던 지역이다. 몽골 고원을 평정한 흉노 제국은 중앙아시아 지역 일대까지 정복하여 실크로드를 장악했다. 흉노 이후 이 지역은 유연, 돌궐, 위구르 등이 지배했는데, 특히 9세기부터 위구르인들이 중앙아시아 오아시스 지대에 본격적으로 이주 정착하면서 투르키스탄이라 불리는 계기가 됐다.

10~11세기에는 투르크계 유목민인 카라한 왕조가 중앙아시아에서 세력을 떨쳤으나, 11세기 말~12세기 셀주크 제국과 거란이 서진한 세력인 카라 키타이의 지배를 받았다. 이후 13세기에는 몽골 제국의 차가타이칸국, 15세기에는 티무르 제국 등이 차례로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차지했다. 그러나 16세기 이후 기마유목민 국가들의 세력이 약화되면서 청·영국·러시아 등이 이 지역을 놓고 각축을 벌였다. 그 결과 동투르키스탄 지역은 1760년대 청나라가 차지했고, 서투르키스탄 지역은 1880년대 러시아가 대부분 장악했다.

중앙아시아에서는 위구르인들의 이동 등으로 투르크화가 이루어지면서 동시에 종교적으로는 이슬람화가 진행됐다. 8세기에 당나라는 실크로드를 지배하기 위해 중앙아시아에까지 세력을 확장하여 힌두쿠시 산맥까지 정복했고, 이슬람화한 아랍 세력도 부하라, 사마르칸트까지 진출하는 등 양쪽 세력은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두고 격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751년 톈산 산맥 서북쪽 탈라스강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고구려 출신 고선지 장군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가 압바스의 이슬람 연합군에 패퇴함에 따라 이후 파미르 고원 서쪽의 중앙아시아 지역은 급속히 이슬람화했다. 당나라 시대에 위구르는 회흘回紇, 회골回?로 불렸는데, 위구르인들이 이슬람화하면서 이슬람교가 중국에서 회교回敎 또는 회회교回回敎로 불리게 되었다.

위구르 - 중앙아시아와 한민족의 교류
중앙아시아 지역은 한민족과 뿌리를 같이하는 기마군단이 활약해온 땅이자 실크로드의 관문으로 18세기까지 동서간 문명 교류의 중심이었다.

이 실크로드는 스텝 지역 중심을 통해 동서를 연결하는 통로로, 한반도는 유라시아 실크로드의 출발점이자 종착역이라 할 수 있다. 오래전부터 이 지역은 우리와도 많은 교류가 있었다. 신라, 발해, 고려 시대에 줄 곧 실크로드에서 활약한 상인인 소그드인을 통해서 중앙아시아 및 서방과 교류해왔고, 이러한 흔적은 우리 문화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한반도의 수많은 고분과 유물은 스텝 지역 기마유목민과 한반도의 교류를 말해주고 있는데 이를 통해 우리와 뿌리를 함께 하는 고대 북방유목민의 생활·관습·문화 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수·당나라와 고구려가 대항할 때 중앙아시아를 지배하던 돌궐이 고구려와 동맹 관계였다는 사실은 군사적 이해관련뿐 아니라 알타이 민족으로서의 친연성이라는 측면에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신라는 실크로드를 통해 페르시아 등 서역 문화권과도 활발하게 교류했다. 신라의 무덤에서는 북방계는 물론 다양한 서역 문화의 흔적이 나타난다. 신라에서 발굴되는 유리 제품은 로마 문화권 등 서역에서 유래했고, 경주의 괘릉에서는 서역인의 모습을 한 무인상이 발견됐다. <처용가>의 처용도 신라 헌강왕 때 귀화한 이슬람계 사람이라는 설이 있다.

고구려 벽화에서도 중앙아시아인을 볼 수 있으며, 사마르칸트에 있는아프라시압 궁전 벽화에는 고대 한민족 특유의 복식을 한 두 명의 사신이 그려져 있다.

고려에서도 위구르인들이 활약했다. 몽골 제국은 몽골인과 위구르인의 연합정권 성격으로, 위구르인들은 준지배계층을 형성했다. 이 위구르인들은 몽골군의 한반도 침입 때 참전하거나, 이후 고려가 몽골의 영향력하에 있을 때 관리와 역관 등으로 한반도에 와서 정착하기도 했다. 고려에 들어온 위구르인들은 대부분 이슬람교도로 《고려사》 등에 회회인 回回人으로 표현되었는데, 개경에 이들의 집단 거주지가 있을 정도였다.

고려가요 <쌍화점>에 등장하는 회회아비는 이들을 일컫는다. 설장수라는 위구르인은 고려 관리가 되어 정몽주와 고려 왕조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으나 이후 조선조 때도 등용되어 외교에 공을 세웠다. 몽골과 고려의 혼인 정책으로 고려 왕비가 된 몽골 공주는 대규모 시종들을 대동하였는데, 이때 다수의 위구르인들이 포함되었다. 충렬 왕비가 된 쿠빌라이의 막내딸 제국대장 공주를 따라와 귀화한 장순룡은 장군에까지 이르러 덕수 장 씨의 시조가 되었다. 세종 때 학자 설순은 고려 말 귀화한 위구르인의 후손이다.

돌궐이 위구르에 멸망한 후 투르크인들이 서진하면서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 등지에 여러 나라를 세웠다. 그런데 북방사학자인 전원철 박사가 이들 투르크 국가의 연원을 밝히고 있다. 다수의 북방언어에 능통한 문헌사학자이자 북방사학자인 전원철 박사와 한민족, 그 후예 기마민족들이 유라시아 동부와 서부에 차례로 세운 나라들의 관계에 대해서는 뒤에 기술하고자 한다.

여기서는 우선 위구르 제국과 이어서 등장하는 셀주크 제국과 오스만 제국에 대한 전 박사의 연구, 분석, 고증 내용을 결론만 간략히 소개한다. 전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이 내용은 《사국사》, 《집사》, 《투르크의 계보》 등의 사서에 나오는 내용이다.

돌궐 제국은 잘 알려진 대로 아시나 가문이 건설한 국가이며 745년 위구르의 공격으로 멸망한다. 그런데 돌궐을 제압한 위구르의 왕가는 아시나 가문이 아닌 오구즈Oguz, Oghuz가문이라 한다. 오구즈 가문의 시조는 오구즈칸으로, 바로 이 오구즈칸이 고주몽을 시조로 하는 고구려 왕가의 후예이다. 또한 오구즈칸의 사촌형제들 후손들이 위구르 왕조를 세웠고, 오구즈칸에게 있었던 6명의 아들들 후손들이 수많은 몽골 투르크 국가들을 세웠다고 한다. 다음 장에 소개하는 셀주크 제국, 오스만 제국 역시 오구즈칸의 후예들이 세운 나라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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