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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DNA를 찾아서(8회) 두 번째 밀레니엄 시대를 연 ‘대셀주크 제국’

  • 기사입력 2020.09.21 21:41
  • 기자명 김석동
▲ 필자 김석동 

3.투르크 세력의 서진과 ‘대셀주크 제국’의 건국

알타이 산맥 일대에서 기원한 것으로 알려진 투르크족은 지난 천년 이상의 기간에 걸쳐 아시아를 중심으로 유럽과 아프리카 등지에 100여 개의 크고 작은 국가를 건설했다. 기원전 2천년에 등장한 흉노는 투르크족과 몽골족이 혼재된 유목민 집단이므로 흉노는 투르크의 선조라고 할 수 있다. 투르크족은 아시아동부 알타이 산맥과 톈산 산맥 일대 지역으로부터 몽골 고원을 장악했고, 오랜 기간 서진하면서 유라시아 전체로 그 영역을 확대했다.

터키의 역사 교과서는 최초의 투르크족 국가가 BC 3세기의 ‘흉노(아시아 훈 제국)’라고 서술하고 있다. 흉노가 분열되면서 서진한 세력은 4세기경 ‘훈(유럽 훈 제국)’을 건국하고 질풍노도와 같이 유럽을 엄습하여 세계사를 뒤흔들었다. 동유럽 지역에서는 훈 제국 이외에도 아바르, 사바르, 하자르, 킵차크 등의 투르크 국가들이 세워졌다.

이후 6세기 중엽에 몽골 고원을 통일하고 등장한 ‘돌궐(괵투르크)’은 투르크라는 이름을 쓴 최초의 투르크 국가이다. 745년 돌궐이 멸망하고, 알타이 산맥에 살던 또 다른 투르크계 ‘위구르’가 몽골 고원을 차지하고 새로운 제국을 건설했다. 이 시대를 전후하여 투르기스, 키르기스, 카를룩 등 투르크 국가들이 세워졌다. 투르크족은 오아시스를 따라 계속 서진하면서 이슬람화해 카라한조, 가즈나 제국 등 이슬람 투르크 국가들이 중앙아시아 일대에 세워졌다.

이어 10세기 후반기에 등장하는 투르크족의 거대 국가가 ‘대셀주크제국’이다. 대셀주크 제국은 오구즈Oghuz 투르크계의 셀주크족이 세운 나라이다. ‘오구즈 셀주크족’은 ‘크늑 셀주크족’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셀주크가家의 지도자 ‘셀주크 베이’는 투르크 일파인 오구즈족의 군지휘관으로, 960년경 자신의 부족을 이끌고 중앙아시아에서 남쪽 시르다리아 강변의 잔드 지역으로 이주해 독자적인 세력을 키워나갔다.

당시 서쪽으로 이미 이주한 투르크족들은 이슬람으로 개종했었고, 새로이 이주해온 셀주크가 이끄는 오구즈족도 960년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투르크족과 이슬람이 만남으로써 ‘투르크의 이슬람화’라는 역사적인 대전환기를 맞이하게 됐다. 당시 중앙아시아와 중동 지역 일대에서는 이란계 이슬람 왕조인 사만 왕조(874~999년)와 투르크계 카라한 왕조(999~1232년)가 격렬하게 대치하고 있었고, 이슬람으로 개종한 셀주크는 이슬람의 사만 왕조를 지원했다. 이에 대한 보상으로 사만 왕조는 부하라와 사마르칸트 사이 지역을 할양하여 986년 셀주크 세력이 이곳으로 이주하고 세력을 키워나갔다. 셀주크 베이 사후에는 손자 토

그릴이 사막 원정과 소아시아 동부 원정에 나서 가즈나 제국을 격파하고 1037년 대셀주크 제국을 출범시켰다.

대셀주크 제국의 흥망

토그릴은 제국 출범 후에도 이슬람 압바스 왕조의 칼리프에 대한 권위를 인정하고 이슬람 세력의 일원으로 남겠다고 선언했다. 이후 셀주크제국은 토그릴의 영도하에 수많은 전쟁을 통해 영토를 확장해 나가면서 페르시아를 정복하고 지금의 테헤란 부근인 ‘레이Rey’로 수도를 옮겼다.

또한 바그다드로 들어가 압바스 왕조를 지원하면서 칼리프의 보호자로서 술탄의 칭호를 받았다. 이 시기 셀주크 제국은 아무다리아강에서 유프라테스강에 이르는 방대한 영토를 가진 명실상부한 아시아 대제국으로 성장했다.

1063년 토그릴 사후 그의 조카 알프 아르슬란이 권력을 장악하고 2대 술탄이 되어 정복 전쟁을 이어나갔다. 2차에 걸친 코카서스 원정으로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그루지야(조지아) 등을 차지했고, 동방원정에 나서 투르키스탄 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했다. 이어 1069년 파티마 왕조의 이집트 원정에 나서 소아시아로 진군하다 소아시아 지역의 지배 세력이었던 비잔티움 제국의 견제를 받았다. 이에 셀주크 군은 이집트 원정 계획을 바꾸고 곧바로 비잔티움 제국과 격돌했다.

1071년 지금의 터키 동쪽 끝에 있는 반Van 호수 인근에 있는 ‘만지케르트Manzikert’에서 셀주크 군과 비잔티움 제국 사이에 역사에서 길이 남을 기념비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셀주크 제국 2대 왕 알프 아르슬란이 이끄는 셀주크 군이 황제 로마누스 4세가 이끄는 비잔티움 제국군을 격파하고 로마누스 4세를 포로로 잡았다. 바로 이 ‘만지케르트 전투’의 승리가 투르크족이 소아시아를 영구적으로 점령하는 계기가 되었다.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 대셀주크 제국은 계속해서 소아시아를 정복해 나가면서 대규모로 투르크인들을 이주시켰다. 소아시아 정복이 완성될 무렵에는 ‘소아시아 셀주크’를 비롯한 여러 투르크계 국가들이 소아시아에 들어서게 되었다. 이것이 오늘날 터키가 소아시아에 자리 잡게 된 배경이다. 알프 아르슬란 사후 그의 아들 말리크샤는 제3대 술탄이 되어 소아시아 정복 전쟁을 계속하여 영토를 확장했다. 서부 해안을 제외한 소아시아 전 지역을 차지했고, 팔레스타인, 예루살렘, 트리폴리, 다마스커스, 시리아, 예멘 등 중동 지역을 복속시킨 데 이어, 동쪽으로는 카라한조까지 정복하여 중국과 접경하게 되었다.

1092년 말리크샤가 죽은 뒤 제국 내부의 권력 투쟁이 계속되면서 셀주크 제국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1141년 카라 키타이(서요) 군에게 참패하면서 세력이 급속히 약화되고 여러 지역의 셀주크 국가로 분열되면서 1194년 대셀주크 제국은 막을 내렸다. 소아시아에 세워진 소아시아 셀주크는 대셀주크 제국 멸망 후에도 지속됐지만 1308년 몽골군에 의해 멸망했다.

대셀주크 제국의 서진과 십자군 원정
10세기 이후 기독교인들은 개인 또는 집단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생애를 보냈던 예루살렘 지역으로 성지순례를 했다. 이 시기에 이슬람화한 셀주크 투르크 세력은 서진하면서 비잔티움 제국을 격파하고 이 지역을 차지했다. 위기에 처한 비잔티움의 알렉시우스 1세는 교황 우르반 2세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이로써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 비잔티움제국이 쇠락하는 시기에 기독교 성지회복을 명분으로 한 ‘십자군 원정 crusades’이 시작됐다.

로마가톨릭 교회의 교황 우르반 2세가 주창하여 서유럽 세력은 예루살렘, 안티오크 등 이슬람의 점령하에 있는 기독교 성지를 회복하기 위한 목적으로 십자군을 모집해 원정에 나섰다. 그러나 성지 회복은 명분일 뿐, 각 집단은 서로 다른 목적이 있었다. 로마 교황은 동방정 교회에까지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했고, 유럽 각국의 영주들은 영지 확보를 노렸다. 서유럽 상인들은 시장 개척에만 관심을 두었다. 1095년 교황 우르반 2세는 클레르몽에서 종교회의를 소집하여 가톨릭 교인들을 설득하여 십자군 원정을 결정했다.

이 과정에서 소위 ‘군중 십자군’이라는 일컬어지는 집단이 예루살렘 원정에 최초로 나섰다. 그러나 원정 취지와는 달리 이들은 구심점이나 전술 전략이 전무한 상태에서 학살과 약탈을 곳곳에서 일삼다 정작 셀주크 투르크 군을 만나서는 참패를 당했다.

이후 1096년부터 1099년까지 이루어진 제1차 십자군 원정은 어느 정도 성과를 냈다. 셀주크 제국의 이슬람 지도층이 분열한 사이에 십자군은 안티오크, 예루살렘, 자파 등 주요 도시를 정복하고 중동 지역에 유럽식 봉건체제를 도입해 십자군 국가를 여러 곳에 세웠다. 그러나 셀주크군이 재정비하여 십자군 국가를 압박해오자, 서유럽 세력은 다시 십자군을 모집하여 제2차 십자군 원정(1147~1149년)에 나서나 기동력을 발휘한 셀주크 군의 경기병에 패배하여 성과 없이 끝났다. 1187년 예루살렘이 다시 이슬람 측에 점령되자 예루살렘 재정복을 위해 잉글랜드, 프랑스,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까지 지휘에 나선 제3차 십자군 원정(1189~1192)이 이루어졌다. 이 원정은 잉글랜드의 사자왕 리처드가 사실상 총지휘했다.

리처드 왕은 대셀주크 제국 영역에 있는 예루살렘을 빼앗는다 해도 계속적으로 점령하는 것은 사실상 어렵다고 판단했고, 기독교인의 예루살렘 방문이 보장되도록 셀주크 제국과 휴전 협정을 체결하고 철군했다.

일련의 십자군 전쟁에서 셀주크 제국의 술탄 살라딘은 서유럽 세력의 십자군에 맞서 이슬람 세계를 지켰다. 이후 1290년까지 200년에 걸쳐 총 8차례의 십자군 원정이 이루어졌으나, 십자군 원정은 결국 실패로 막을 내렸다.

십자군 원정 초기에는 기독교 성지 지역을 차지한 이슬람 세력이 정치적으로 분열된 상황이어서 십자군이 어느 정도 전투력을 발휘하고 성지를 정복하는 데 성공하기도 했으나, 이후 살라딘 등 걸출한 셀주크 제국의 지도자가 등장하면서 이슬람 세력이 결집하자 전세는 완전히 역전되었다. 더구나 원정에 참여한 서유럽 국가간 대립과 십자군 자체 내의 내분과 분열, 참여 세력 간 경제적 이해 상충, 십자군의 횡포에 따른 민심의 이반 등으로 십자군 원정은 초라한 성적표로 역사에 기록되고 말았다. 결국 십자군 원정은 서진하는 이슬람 세계와 신흥 서구 세력 사이의 세력 다툼과 이권 쟁탈전으로 귀결되어 버렸다.

대셀주크 제국과 세계 역사, 그리고 우리 역사대셀주크 제국은 10세기경 100년 남짓 존속한 투르크 국가로 세계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첫째, 흉노, 훈, 돌궐 등에 이어 거대한 투르크제국을 건설했고, 이후 오스만 제국이 등장하는 데 바탕이 되는 등 투르크 국가 2천년 역사의 중심부를 장식했다. 둘째, 투르크족은 서진하면서 압바스 왕조의 이슬람을 받아들여 대셀주크 제국이 이슬람의 확장과 세계 종교화하는 데 중심 역할을 하게 하였다. 셋째, 셀주크 투르크 세력이 예루살렘 등 기독교 성지를 점령하면서 서유럽 기독교 국가들의 십자군 원정이 시작됐다. 이 십자군 원정은 유럽과 중동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동서 문명 교류의 장이 열렸으며, 전쟁 중에 지중해 도시 국가들이 경제적으로 성장하여 후일 르네상스 시대가 등장하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또한 십자군 원정 실패는 교황권의 약화와 중세 시대의 종언에 대한 신호탄이 되었다. 특히 이때 시작된 기독교와 이슬람의 종교적인 대립은 십자군 전쟁 이후 지금까지 이어지는 양대 종교간갈등의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한편 앞서 위구르 제국에서 설명한 바대로 북방사학자 전원철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셀주크 제국의 왕가 가문은 오구즈칸의 손자 ‘크닉’의 후손들이다. 그에 따르면 오구즈칸이 고구려 왕가의 후손이며 발해 건국자 대조영의 선조이므로 셀주크 제국과 한민족간에도 특별한 연결고리가 있다. 이에 대해서는 후에 다시 기술하겠다.

4.지중해를 내해로 삼은 600년 역사의 ‘오스만 제국’과 오늘의 ‘터키’

오스만 제국의 성립
투르크족이 투르크라는 이름으로 최초로 세운 나라가 ‘돌궐’이며, 돌궐소멸 후에도 투르크 세력은 서진을 계속하면서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 지역에 여러 투르크 국가를 세워나갔다.

9세기경 중앙아시아 일대에서 이란 방면으로 이주해온 투르크족의 한지파인 오구즈 투르크족은 대셀주크 제국을 건설하고 소아시아 동부에 정착했다가 서진을 계속하여 비잔티움(동로마) 제국의 서부 국경 지대까지 진출했다. 여기서 오구즈 투르크족의 일파인 카이족 족장 ‘에루투그룰’의 아들 ‘오스만’이 일족을 이끌고 1299년 소아시아 셀주크로부터 독립해 오스만 공국을 세웠다. 오스만 공국은 같은 투르크족이자 이슬람 국가인 소아시아 셀주크와 세력 대결하기보다 먼저 이교도 국가인 비잔티움 제국과 영토 확장 전쟁에 나섰다.

오스만 공국은 1206년 출범한 칭기즈칸의 대몽골 제국 세력의 압박으로 서쪽으로 대거 이주해온 투르크족들과 합세해 급속히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다. ‘오스만 1세’는 소아시아동북부 지역을 확보하면서 제국의 기초를 마련하고 1326년 사망했다.

그를 이어받은 아들 ‘오르한’은 부르사, 이즈닉을 차례로 점령하고, 이어 터키 서부에서 지중해로 연결되는 차낙칼레와 다르다넬스 해협을 장악하여 유럽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하였다. 터키가 오늘날 유럽 지역에 영토를 가진 것은 이때부터였다.

이후 오스만은 유럽을 향해 발칸 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해 나갔다. 점령한 지역에는 우선 소아시아 지역의 투르크족을 이주시켜 살게 하면서 점령지를 차례로 투르크의 영토화해 나갔다. 동시에 점령 지역에 거주하던 기독교도 등 비이슬람 교도들에게도 생명과 재산, 그리고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회유 정책을 펴나감으로써 그동안 봉건제도하에 착취당하던 토착민들로부터 호응을 얻었다. 이렇게 전략적으로 발칸 지역에 진출하면서 국가 체제를 정비해 나갔고, ‘무라드 1세(1359~1389년)’ 시대에 이르러서는 드디어 제국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다음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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