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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DNA를 찾아서(9회) 지중해를 내해로 삼은 600년 역사의 ‘오스만 제국’과 오늘의 ‘터키’

  • 기사입력 2020.09.26 15:05
  • 기자명 김석동
▲ 필자 김석동  

세계 제국으로의 확장

오스만 제국은 무라드 1세 사후에도 발칸 지역에서의 영토 확장을 지속하면서 주변의 비잔티움 세력을 격파하고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위협했다. 그즈음 중앙아시아 일대에서 혜성과 같이 나타나 ‘티무르 제국’을 건설한 ‘티무르’가 오스만 제국을 공격했다. 티무르는 몸소 전쟁터를 누비며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아 ‘전쟁의 신’이라 불리는 최고의 인물이다. 1402년 앙카라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의 ‘바예지드 1세’는 티무르에게 참패를 당하고 포로로 잡혀 끝내 자결했다. 이 전쟁으로 오스만은 세계 제국을 향한 발걸음에 급제동이 걸리고 붕괴 위기까지 처하게 됐다. 이후 약 50년 동안 오스만은 세계사에서 거의 잊힌 국가가 되었다.

1421년 즉위한 ‘무라드 2세’는 앙카라 전쟁 패전 후 벌어진 오스만 계파간 내전을 극복하고 비잔티움, 헝가리, 십자군 등 유럽 세력과 크고 작은 전쟁을 벌여 국가를 재건해 나갔다. 1451년 메흐메드 2세는 왕위를 계승하면서 소아시아를 완전 장악하고 흑해 일대를 차지한 데 이어 1453년에는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을 점령했다.

이로써 천년 역사의 비잔티움 제국은 멸망하고, 오스만 제국은 동서를 망라한 세계 제국으로서 전성기를 맞이하게 됐다. 메흐메드 2세는 동로마 정복에 이어 서로마 제국의 본거지인 이탈리아 정복 전쟁에 나섰으나 1481년 사망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후 오스만 제국은 베네치아 등 지중해 주변 세력과의 전쟁을 거치면서 강력한 해군력까지 확보하게 되었고, 아프리카에 진출하여 이집트의 이슬람 국가인 맘루크를 정복했다. 맘루크를 정복한 술탄 ‘셀림 1세’는 압바스 왕조로부터 칼리프 지위를 이어받아 이슬람교의 수장이 됨으로써 정교일치의 ‘술탄 칼리프’ 시대를 열었다. 1520년 즉위한 술레이만 1세는 46년간 제국을 통치하면서 지중해에서 로도스 기사단을 몰타로 쫓아낸 후 튀니지 등 북아프리카 전역을 점령한 데 이어 포르투갈, 스페인 함대를 제압하고 지중해의 주인공이 되었다.

유럽 지역에서는 헝가리와 오스트리아를 공략하여 합스부르크 왕가와 대치했고, 동방 지역에서는 시아파 무슬림 국가인 사파비 왕조를 제압하는 등 오스만 제국의 황금기를 열었다. 이 시기의 오스만 제국은 발칸, 아나톨리아 등 동로마 제국의 영토, 서아시아 및 우크라이나, 중동, 북아프리카 일대를 지배하면서 지중해를 내해로 삼은 대제국으로 성장했다. 오스만 제국은 17세기 중반까지 정복을 계속하여, 서쪽으로는 합스부르크 왕가, 동쪽으로는 사파비 왕조, 북쪽으로는 러시아 세력과 대치하는 등 17세기까지 세계 최강의 국가로 자리 잡았다. 영토는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3개 대륙을 아우르는 560만 km2(한국의 56배)에 달했고, 경제적으로는 동서 교류의 중심 역할을 하면서 최대의 번영기를 구가했다. 문화적으로는 비잔티움 문화와 이슬람 문화를 융합하여 새로운 다원적 문화를 창출했다.

오스만 제국의 쇠락과 터키 공화국의 출범
1571년 레판토 해전을 고비로 오스만 제국은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근대화한 유럽 세력에 밀리던 오스만 제국은 다시 오스트리아 원정에 나서 1683년 오스트리아의 빈을 공략했다. 그러나 폴란드의 기독교 연합군에 패배하여 헝가리, 우크라이나 등을 상실하면서 유럽에서의 세력이 꺾이게 되었다. 18세기 초 남진하는 ‘피오트르 대제’의 러시아군에게 승리하였으나, 오스트리아와 베네치아가 연합함에 따라 발칸반도에서도 세력이 약화됐다. 18세기 후반 오스만 제국은 지중해로 세력을 확장해오는 ‘예카테리나 2세’의 러시아와 6년에 걸친 전쟁(1768~1774년) 끝에 불리한 조약을 체결하게 되어 흑해와 인근 유럽 지역에서도 영향력을 잃어버렸다.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의 보호령이었던 크리미아 칸국을 러시아 제국에 흡수해 다르다헬스 해협을 통과하여 지중해로 나갈 수 있는 길을 열었다. 크림반도의 세바스토폴항이 러시아 흑해함대의 기항으로써 흑해 - 다르다넬스 해협 - 지중해에 이르는 거점이 된 것은 바로 이때이다.

19세기에 들어, 힘을 잃은 오스만 제국에 프랑스와 영국 등 유럽 열강들이 침범해왔고, 내부에서도 기독교인들의 반란, 그리스의 독립 등 민족주의 반란이 이어져 ‘유럽의 병자’라고까지 불릴 정도로 쇠퇴했다. 한때 개혁운동을 통해 국권 회복의 노력을 기울였으나, 러시아와의 크림전쟁(1854~1856년) 이후 국력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1877년 러시아가 발칸을 침공하면서 오스만 제국의 발칸 영토는 자치, 분할 등으로 떨어져 나갔다. 오스만 제국은 20세기 들어 발칸 전쟁(1912~1913년)과 제1차 세계대전(1914~1918년)을 거치면서 해체기에 돌입했다. 이후 오스만 제국의투르크인들은 치열한 건국 투쟁을 벌였고, 1908년 청년 터키혁명을 거쳐 1923년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에 의해 터키 공화국이 세워져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터키는 어떤 나라인가
터키는 국토의 3%가 유럽 지역인 발칸반도 남단에, 97%가 아시아 지역인 아나톨리아 반도에 위치하고 있다. 인구는 8천만 명, 면적은 78만km2(우리나라의 약 8배)로, 8대 자원국, 6대 관광국이다. 6·25 참전국가이며, 투르크족의 후예가 세웠다.

▲ 아야소피아(이스탄불) 

터키는 1950년 6·25 당시 한 개 여단병력을 파병했는데, 유엔군 중 네번째로 많은 군대였다. 참전 결정 당시 터키 신문은 ‘우리는 형제를 위하여 피를 흘리러 간다’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고, 출정식에서 터키군 여단장은 “장병여러분, 한국은 우리와 피를 나눈 혈맹국 …”이라는 인상적인 연설을 했다. 즉 유엔군으로 참전하여 형제국가가 된 것이 아니라, 형제 국가이므로 참전한다고 선후관계를 분명히 했다.

유엔군 중 가장 용맹했던 군대로 알려진 터키군은1 만 5,000명 참전하여 미국, 영국에 이어 3번째로 많은 741명이 전사했다. 터키군은 6·25의 10대 전투 중 2개 전투를 해냈다. 청천 강변에서 중공군을 저지하고 유엔군의 후퇴를 지원한 ‘군우리 전투’, 지금 용인시 김량장역 인근에서 중공군이 구축한 진지를 백병전으로 분쇄하여 중공군 1,900명을 섬멸한 ‘금양장리 전투’ 등이 그것이다.

스키타이, 흉노, 선비, 돌궐 등 과거 몽골 고원에서 유래한 기마군단은 하루에 수십 킬로미터를 진군하는 놀라운 기동력과 강궁으로 공포의 전투력을 과시했고, 이후 거란·여진·몽골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것들이 터키군에게 그대로 이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봄직하다.

필자가 터키 여행 때 들은 얘기다. 터키 국민들은 축구를 너무 사랑하는데, 혼자 TV를 보는 것이 아니라 광장에서 모두 모여 응원을 하는 유별난 문화를 갖고 있다. 터키는 유럽축구 리그에 참가하고 있고, 터키 게임은 대다수 국민이 열광적으로 응원한다. 2002년 한일월드컵 때 예선전인 ‘터키 - 브라질전’이 한국에서 열렸고, 한국인이 주심을 맡았다(브라질은 강력한 우승 후보국이었고, 실제 한일 월드컵의 우승을 거머쥐었다). 그동안 유럽리그에서 편파적인(?) 대우로 가슴앓이를 해온 터키 국민은 이 소식을 접하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전반전은 터키가 리드했으나 후반 동점이 되었고, 종료 직전 브라질 선수의 할리우드 액션으로 한국 주심이 터키 선수를 퇴장시키는 사태가 일어났다. 결국 터키는 역전패했다. 터키인들의 실망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한국에 대해 극도의 서운함을 나타냈다.

그런데 브라질전 이후 다행히 터키는 선전을 거듭하여 사상 처음 4강까지 진출했다. 모든 터키 국민이 TV로 지켜보는 가운데 시작된 한국과의 3·4위전에서 터키 국가와 함께 초대형 터키 국기가 한국 관중석을 뒤덮으면서 내려왔다. 한국 관중은 열화와 같이 터키를 응원했다. 바로 그 순간 모든 TV 앞의 터키인들은 기립하여 울었다. “역시 피는 물보다 진하다”라고 외치면서.아무튼 터키인들이 한국인과 한국문화에 대해 가지는 심정적 태도는 애틋하고 특별한데, 이는 과거 역사에 대한 인식에 기초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제 그 배경이 되는 과거 역사를 돌아보자.

▲ 6.25 참전 터키군  

터키인들의 역사 인식

터키는 기마민족이 세운 국가이다. 터키에서는 그들의 조상이 몽골 초원에서 유래한 투르크족이며, 흉노와 돌궐뿐 아니라 대셀주크 제국과 오스만 제국까지 자기들의 역사로 인식하고 있다. 1952년 터키는 건국 1400주년 기념제를 가졌는데, 그 건국기념 년도가 ‘부민 카간’이 돌궐을 건국한 AD 552년이다. 돌궐 건국이 오늘날 터키 건국이란 뜻이다. 터키인들은 이런 인식을 공유하고 있고, 자기들의 유래에 대해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터키 초등 6학년 사회 교과서는 투르크의 최초 국가는 흉노Asian Hun Empire이며, 그 영역은 만주 - 몽골 - 남시베리아 - 북중국 - 위구르 - 티베트 - 중앙아시아 지역까지 포괄한다고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투르크라는 이름으로 건국한 최초의 나라는 돌궐the Gok Turk Empire(AD 552~744년)이고, 위구르가 돌궐을 멸망시켜 투르크를 이어받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초등 7학년 과정에서는 투르크가 아나톨리아 반도에 진출한 과정과 오스만 제국의 건국에 대해 가르친다. 초등 8학년 과정에서는 ‘아타튀르크 케말 파샤’의 현대 터키 건국, 제2차 세계대전 및 한국전쟁 참전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다. 중급 9학년 역사 교과서에서는 투르크가 중앙아시아에서 동서로 확장되는 과정, 그들이 과거에 건국했다는 흉노, 돌궐, 위구르 제국의 영역에 대해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중급 12학년 역사 교과서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 대해 자세히 풀이하고 있다.

이와 같은 터키인들의 역사 인식 바탕 위에 한국과 터키의 남다른 관계가 형성되고 있다. 우선 몽골 고원에서 유래한 흉노 제국을 터키의 고대사로 보기 때문에 한민족은 혈통적으로 매우 가깝다는 인식을 갖고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도 돌궐이 당나라와 대결할 당시 이웃한 고구려와는 동맹 관계에 있어 지금도 한국을 형제국가로 생각해 ‘칸카르데시(피를 나눈 형제)’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

1965년 동돌궐의 영역이었던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의 아프라시압 궁전에서 발견된 7세기경의 벽화에 고구려인 사신 두 명의 모습이 보이는데, 이는 우리 민족이 중앙아시아 지역과 활발히 교류했던 역사를 입증하고 있다.
오스만 제국은 아나톨리아, 흑해, 발칸반도, 헝가리, 중동, 이집트는 물론 지중해를 장악하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발칸반도는 16세기부터 오스만 제국이 400년간 지배했는데, 395년 로마 제국이 동서로 분리될 당시 이 지역을 경계로 하여 서부는 서로마의 가톨릭, 동부는 동로마의 정교 영향권에 있다가 오스만 제국 지배로 이슬람화했다. 그 이후 이 지역은 종교와 민족이 복잡하게 혼재된 문명충돌의 화약고가 되었다.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 코소보 등지에서는 1990년대까지 현대사에서 가장 참혹한 전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지금도 이 지역을 여행하다 보면, 총과 포탄 자국이 남아있는 건물들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우리 고대사에서 본 터키

흉노 - 돌궐 - 터키로 이어지는 투르크의 역사는 우리 고대사와도 연관이깊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1931년 <조선일보>에 연재한 <조선사>(오늘날의 《조선상고사》)에서 “조선족 흉노족은 우랄어족으로 조선족이 분화하여 조선, 선비, 여진, 몽고, 퉁구스 등의 종족이 되고, 흉노족이 흩어져서 돌궐, 헝가리, 터키, 핀란드 등의 종족이 되었는데…”, “여진, 선비, 몽고, 흉노 등은 본래 아我의 동족”, “조선, 만주, 몽고, 터키 네 민족은 혈족”, “조선이나 만주나 몽고, 터키, 헝가리, 핀란드가 3천 년 이전에는 적확히 하나의 혈족”이라고 밝히고 있다. 행촌 이암선생의 《단군세기》8는 단군 시대 초기에 흉노와 몽골이 고조선으로부터 분리되어 나간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기마민족 국가인 고조선에서 흉노와 돌궐이 분파되었고, 이들 일파가 터키로 이어지게 되어, 오늘날 우리와 터키가 남다른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이를 좀 더 부연한다면, 단군조선은 BC 2333년에 건국되었고, 단군조선 건국 세력인 고조선족은 세월이 흐르면서 유라시아 대륙 동부에서는 부여, 선비, 몽골, 오환, 거란, 여진 등으로 이어지고, 유라시아 대륙 중부·서부에서는 흉노와 훈 제국, 돌궐, 위구르, 셀주크 제국, 오스만 제국, 터키 등으로 이어지게 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에서는 흉노를 ‘호胡’로, 선비 등 그 동쪽 민족을 ‘동호東胡’로 칭하고 있다. 당시 문헌에서는 호와 동호의 구별이 분명치 않으나, 대체로 ‘호’는 투르크계, ‘동호’는 몽골 퉁구스계로 보고 있다. 이들이 지내온 곳, 살고 있는 곳에서는 언어는 물론 생활풍습, 사회 체제, 전쟁 양식 등에서 너무나 많은 유사점들이 나타나고 있어, 고대로부터의 그들의 관계가 남다르지 않다는 것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주 터키 한국대사관 공관 홈페이지에는 “우리나라와 터키는 중앙아시아 부근 이웃에서 같이 활동하다가 우리나라는 동진하여 한반도에 정착하고, 터키는 서진을 거듭하여 약 8,000km 떨어진 아시아 대륙의 서단아나톨리아 반도와 유럽의 동남쪽 끝인 트레이스 반도에 정착하게 된먼 역사적 배경을 공유하고 있다. 고려 말에는 원나라를 통하여 들어온 투르크계 위구르인들이 한반도에 정착하여 현재 3만 명 가까운 후손들이 한국에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관계는 6·25 전쟁을 통하여 다시 맺어지게 되었습니다”라고 쓰여 있다.

한편 앞서 위구르 제국과 셀주크 제국을 설명하면서 밝힌 대로 북방사학자 전원철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위구르 제국, 셀주크 제국뿐 아니라 오스만 제국 역시 오구즈 가문이 세운 나라이다. 즉 오구즈칸의 손자 중 ‘크닉’의 후손이 11세기에 셀주크 제국을 세웠고, ‘카이’의 후손이 13세기 말 오스만 공국과 이어지는 오스만 제국을 세웠다. 따라서 셀주크 제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오스만 제국도 한민족과 특별한 관계에 있다 할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뒤의 북방 기마민족과 한민족의 관계편에서 다시 설명하겠다.

기마군단이 맹활약하던 유라시아 대초원(동서 스텝 지역)의 양단에 지금까지 건재한 국가가 한국과 터키가 아니겠는가? 터키인들이 민족의 기원과 자기 역사에 대해 인식하고 후손에 교육하고 있는데 반해, 오랜 고대사를 가지고 있는 우리는 오히려 한민족의 활동 무대를 한반도 중심으로 축소하고 우리 역사를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 시대 이후로 위축시키는 교육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근간에 일부 학자들을 중심으로 고조선사와 부여사를 비롯한 한국 고대사에 대한 연구와 저술 활동이 계속되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역사는 왜곡되어서도, 과장되어서도 안된다. 그러나 보다 넓은 시야로 역사의 흐름을 꿰뚫어보는 노력은 필요하다. 그래야 대한민국이 이룩한 현대사의 기적을 설명할 수 있고, 한국경제의 성장 에너지원을 찾아 나가면서 우리의 미래에 대한 청사진을 보다 자신감 있게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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