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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를 넘기며

  • 기사입력 2020.11.08 20:25
  • 기자명 시인 이오장
  © 시인 이오장

 

 

        페이지를 넘기며 

 

                             이시림 (1940년~ )

   

은행잎 카펫이 갈려있는 카페

의자에 앉아 책장을 넘기고 있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사이렌이 울리며 달려가던 날들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눈보라 치던 벌판을 미끄러지며

오래 걸어왔다

 

몇 번의 위기를 넘기며

겨울 논처럼 돌아앉아서

내 생을 비껴간

비바람과 별들을 그리워한다

 

나는 고향에서 멀리 떠나있고

옛 친구들은 소식조차 없는데

 

또 한 장의 페이지가

넘어가고 있다

 

 

과거를 떠올리는 것은 현재에 대해 아쉬움이 많고 현재는 어느 순간 빨리 지나가기 때문이다. 아무도 붙잡지 못하는 시간인데 과거는 정지되어 언제나 사람의 감성을 건드린다. 어느 길을 정하고 떠나는 인생은 없다. 태어날 때도 마찬가지다. 누가 자신의 삶과 죽음을 정하는가. 아무도 정하지 않았다. 자연 속에서 자연스럽게 사람은 태어나고 주어진 삶을 마친다. 인간이 자연을 지배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고 여전히 자연의 일부로써 살아간다. 그러나 언어를 가진 사람은 기억을 되돌려 현재를 조정하려 든다. 그러나 과거의 기억은 언제나 고뇌의 순간이고 아쉬움의 연장이다. 어느 날 우연히 들린 카페에서 이시림 시인은 과거의 삶을 떠올린다. 한 장 한 장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소란스럽게 겪은 혼란이 덮치고 그 울림의 한 가운데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눈보라 치던 벌판을 걸어와 위기를 넘나들었던 삶은 타인과 비교되지 않지만 자신을 고통스럽게 했던 비바람도 그립고 그 속에서 봤던 푸른 별들의 색깔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과거의 회상은 시인의 삶을 윤택하게 한다. 과거 현재 미래는 시인이 바라보는 언어 창조의 발원지이고 넓은 호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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