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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DNA를 찾아서(14회) 티무르와 무굴제국의 역사적 의의

  • 기사입력 2021.01.03 10:31
  • 기자명 김석동
▲ 필자 김석동  

티무르 제국의 역사적 의의

티무르는 동서를 잇는 실크로드의 부활이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 군사력을 동원해 끊임없는 원정에 나섰던 인물이다. 그는 기존의 기마군단에 페르시아 등지에서 도입한 포병 기술을 접합해 경기병, 중기병, 포병, 보병으로 이루어진 강력한 티무르 군을 조직했다.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티무르는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실크로드의 중심부를 장악하고 세계 최대의 시장을 열었다. 당시 유럽을 공략하던 오스만 제국으로 인해 실크로드가 막혀버리자, 오스만 제국을 앙카라 전투에서 궤멸시키고실크로드를 부활시켰다.

그러나 티무르의 꿈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유목민의 군사력과 정주민의 경제력을 통합하여 칭기즈칸 이후, 최초이자 최후의 대륙의 지배자가 되었다. 티무르 제국은 중앙아시아·이란·아프가니스탄을 지배했다.

남북으로는 러시아 내륙에서 북인도까지, 동서로는 중국 변경에서 아나톨리아 반도까지 정복했다. 티무르 제국의 수도 사마르칸트는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실크로드의 중심으로, 14세기 당대 최고의 도시로 발전했다.

티무르는 전쟁에서 승리한 후 점령 지역의 건축가나 설계자 등 기술자들을 대거 데려와 제국의 수도 사마르칸트를 건축적으로 뛰어난 계획 도시로 건설하는 데 진력했다. 비비하늠 모스크, 샤히진다 성묘, 구르 에미르 등 수많은 기념비적인 건축물들이 사마르칸트의 영광을 오늘날까지 증거하고 있다. 티무르의 건축 사랑은 후손들에게까지 이어져 사마르칸트는 물론 부하라 등 주요 도시에 티무르 제국의 문화를 자랑하는 건축물들이 세워졌다.

에드워드 크리시는 《오스만 제국사》에서 인류 역사에서 알렉산드로스, 카이사르, 아틸라, 칭기즈칸, 나폴레옹조차도 그와 비교할 수 없다며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대몽골 제국의 칭기즈칸처럼 아미르 티무르도

오랫동안 역사 속에 파묻힌 존재였다. 유라시아 제국 건설을 위한 위대한 설계자이자 실행에 앞장섰던 이 지도자는 1991년 소련 붕괴 전까지 600년간 잊히고 묻혔다. 중앙아시아가 실크로드의 중심 지역으로 다시부상하면서 티무르의 존재도 재조명되고 있다.

▲ 티무르 무덤 (구르 에미르, 사마르칸트)  

3. 몽골 - 티무르 제국을 이어받은 인도의 이슬람 왕조 ‘무굴 제국’

인도에 진출한 칭기즈칸의 후손 바부르

대몽골 제국의 칭기즈칸은 네 아들에게 영토를 분봉하여 둘째 아들 차가타이의 칸국은 지금의 신장 웨이우얼 지역인 톈산 산맥 남북의 중가리아 분지와 타림 분지에서 우즈베키스탄의 아무다리야강에 이르는 지역을 차지했다. 차가타이 칸국 출신인 티무르는 칭기즈칸의 후손으로 자처하면서 칭기즈칸의 대몽골 제국을 재건한다는 기치로 차가타이 칸국을 멸망시키고 중앙아시아 일대에 티무르 제국을 건설했다.

티무르 제국이 멸망한 뒤, 노마드의 영걸 ‘바부르Babur’가 등장했다. 그는 티무르의 후손으로, 1483년 중앙아시아 안디잔에서 출생해 트랜스 옥시아나의 페르가나를 물려받았다. 야심찬 바부르는 선조 티무르가 심혈을 기울여 건설한 도시 사마르칸트를 빼앗기 위해 정복 전쟁에 나섰다. 그러나 중앙아시아 정복이 여의치 않자 인도 정복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북인도 지역에는 11세기 초부터 투르크 기마군단이 진출하여 왕국을 세웠다.

이후 북인도는 투르크계 노예 왕조, 할지 왕조 등을 거쳐 티무르가 제국을 세웠으나, 16세기 초에는 힌두교나 이슬람교의 군주가 지배하는 여러 왕국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1398년 티무르는 비단길과 티무르 제국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북인도를 점령하고, 그 땅을 손자인 술탄 무하마드에게 물려줬다. 그로부터 1세기도 더 지난 후에 바부르가 조상의 연고권을 내세우면서 델리로 진군한 것이다.

바부르는 카불에서 지배권을 확립하고 라호르를 거쳐 1526년 델리 북쪽에서 벌어진 파니파트Panipat 전투에서 승리했다. 바부르는 1만 2,000명의 기마군을 이끌고 코끼리 1,500마리를 앞세운 18만 명의 술탄 이브라힘 로디의 대군을 격파하고 델리를 점령해 무굴 제국을 세운것이다. 무굴Mughul은 ‘몽골에서 온 사람들’이란 페르시아어에서 기원한 것으로, 몽골 제국은 중앙아시아에서는 티무르 제국, 이어 인도 땅에서는 무굴 제국으로 역사에 재등장했다.

▲ 무굴 제국 영토  

바부르는 몸소 전쟁터를 지키고 전투에 앞장서는 등 기마군단 특유의 강인한 리더십을 발휘했다. 그는 편안한 잠자리를 거부하고 병사들과 같이 야영하면서 동고동락했다. “병사들이 눈과 폭풍 속에 있는데 어떻게 편안하게 따뜻한 곳에서 잘 수 있겠는가”, “친구와 더불어 죽는 것은 결혼식과 같다”고까지 말할 정도였다. 바부르의 무굴 제국 재위 기간은 4년에 불과했으나, 영토를 확장하고 반란을 평정하는 등 제국의 기초를 공고히 했다. 그는 유라시아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왕조를 세웠으나, 사마르칸트마저 차지하여 티무르 제국을 복원하려는 꿈은 이루지 못하고 1530년 사망했다.

바부르의 후계자들에 의한 대무굴 제국의 건설

1530년 바부르 사후 장남 ‘후마윤Humayun’이 왕위를 계승했다. 후마윤도 영토 확장 전쟁을 지속했으나 1540년 아프간 왕조에 패배하여 페르시아로 망명했다. 그러나 절치부심 끝에 페르시아의 도움으로 1555년델리를 수복하여 무굴 제국 재건의 초석을 놓았다.

후마윤에 이어 1556년 제3대 ‘악바르Akbar’가 왕권을 이어받았다. 악바르는 일찍이 선왕의 정복 전쟁에 참전해 용맹을 자랑하는 등 무굴 제국을 대제국의 반열에 올려놓은 인물이다. 북인도 전역과 라자스탄, 구자라트, 펀잡, 벵골, 인도 중남부 지역, 아프가니스탄 등지에까지 영토를 확장하여 대제국을 건설했다.

그는 페르시아어를 공식 언어로 채택하고 국가 제도를 개혁하여 중앙집권적 왕정으로 기반을 확고히 다졌다. 동시에 무굴 제국의 힘을 과시하는 건축물들을 곳곳에 세워 예술과 수공업의 꽃을 활짝 피게 했다. 그는 델리의 명물 ‘시크리’의 궁전 등 수많은 기념비적인 건축물을 남겼다. 무굴 제국을 50년간 통치한 후 1605년 사망했다. 악바르 이후 150년간이 무굴 제국의 전성 시대였다.

악바르의 뒤를 이어 아들 ‘자한기르’가 즉위하여 오랜 숙원인 중남부의 데칸 지방 공략에 나섰으나 오히려 서북의 아프간 지방을 잃어버렸다. 그의 사치와 연이은 실정으로 제국의 확장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4대 자한기르에 이은 5대 ‘샤 자한Shah Jahan’은 결단력 있는 지도자로, 데칸을 무력으로 굴복시키는 등 제국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당시 세계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1억 3,000만 명의 대제국 지배자가 되었다.

▲ 타지마할    

그러나 그 또한 선조 때부터의 꿈인 사마르칸트 정복은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상업과 수공업으로 경제적 번영을 누리면서 지금의 올드 델리를 건설하고 수많은 기념비적인 건축물을 남겼다. 오늘날 전 세계인을 감동시키는 ‘레드 포트’, ‘자마 마스지드’, ‘타지마할’ 등이 대표적이다. 아그라의 타지마할은 열네 번째 아들을 낳다 죽은 부인 ‘뭄타즈 마할’을 위해 세운 찬란한 건축물로, 뒤에 인도의 시성 타고르는 “황제가 시간에 마술을 걸려 했다”고 읊었다.

황혼을 맞이하는 무굴 제국

30년간 통치한 샤 자한이 자리에 눕자 네 아들 중 ‘아우랑제브Aurangzeb’가 아버지 샤 자한을 감금하고 무력으로 정권을 차지했다. 그는 즉위 직후부터 원정에 나서 1687년에는 데칸 지역까지 정복하고 인도 전역을 지배했다. 선왕들의 종교유화 정책을 버리고 엄격한 수니파 이슬람으로 복귀하여 비이슬람교도에 대한 세금 부활 등 종교차별 정책을 취했다.

이에 힌두교, 시크교 등 비이슬람 세력이 반발하여 반란이 일어났고, 이에 대응해 종교 탄압이 가속화됐다. 무굴 제국은 아우랑제브 때 가장 넓은 땅을 지배했으나, 중남부의 마라타 세력과 오랫동안 전쟁을 벌이는 등 수많은 전쟁으로 국고가 바닥나고 비이슬람교도 차별로 분열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1707년 아우랑제브가 원정 도중 죽자 후계 싸움으로 분열이 이어지며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의 침공이 이어져 제국은 더욱 급격히 약화됐다.

▲ 자마 마스지드  

무굴 제국의 세력 약화는 유럽 세력의 침투를 가속화했다. 1498년 ‘바스코 다 가마’가 희망봉을 거쳐 캘리컷에 이르는 인도 항로를 개척한 후 포르투갈을 선두로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등 유럽 각국의 진출과 침투가 이어졌다. 1600년 동인도 회사를 세운 영국은 무굴 제국이 약화되는 18세기 이후 프랑스를 제압하고 식민지배 영역을 급속히 넓혀 나갔다.

그러다 마침내 1857년 무굴 제국의 힌두교와 이슬람교도로 이루어진 군대 ‘세포이’가 마지막 황제를 복위시키기 위해 일으킨 전쟁(세포이 항쟁)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무굴 제국을 완전히 멸망시키고 인도를 차지했다.

▲ 레드 포트  

무굴 제국은 정복자 이슬람과 토착 힌두 문화는 물론 실크로드를 통해 유입된 페르시아 문화 등 다양한 문화가 융합된 새로운 문화를 창출했다. 궁전, 성, 탑, 사원 등 지금도 남아있는 무굴 제국의 수많은 기념비적인 건축물들, 그리고 회화 등 예술품들은 실크로드가 무엇을 전하고 전해 받았는지를 웅변하고 있다.

무굴 제국의 역사적 의의

인도를 대표하는 왕조인 무굴 제국은 이슬람 왕조이나 그 근원은 티무르 제국 - 몽골 제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국명 또한 몽골을 이어받았고, 초원 제국의 역사를 19세기 중엽까지 이어왔다. 대몽골 제국이 세운 원나라는 1368년, 명에 의해 멸망했다. 그러나 칭기즈칸 후예들이 건설한 제국들은 그 이후에도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킵차크 칸국은 러시아를250년간 지배했고, 차가타이 칸국을 이은 티무르 제국은 1526년까지 존재했으며, 티무르 제국을 이은 무굴 제국은 1857년까지 330년간 유지되었다.

티무르는 칭기즈칸의 후손으로 자처했다. 칭기즈칸의 4대 선조인 ‘카불칸’의 형제인 ‘카촐리 바하두르’의 8대손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티무르는 칭기즈칸의 종 5대손이 된다. 그리고 바부르는 티무르의 직계 5대손이다. 티무르 제국과 무굴 제국 모두 기마군단의 강력한 전투력을 바탕으로 영토를 넓혀 나갔다. 티무르 제국은 몽골 제국을, 무굴 제국은 티무르 제국을 롤 모델로 하여 ‘옛 제국의 영광을 회복’이라는 꿈을 키워나갔던 것이다. 무굴 제국의 멸망으로 12세기에 출범한 몽골 제국은 대단원의 막을 내렸으나, 이들 초원 제국은 역사에 길이 남게 될 것이다.

무굴 제국은 무력으로 인도를 정복했으나, 문화적으로는 이슬람 - 힌두 문화를 융합하고 실크로드를 통해 동서 교류를 주도하여 찬란한 건축과 회화 등을 자랑하는 예술의 시대를 열었다. 특히 악바르 대제 시대에는 종교간 화합 정치로 민족적 화해가 지속되어 힌두 - 이슬람 문화가 공존하면서 국가의 안정과 번영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악바르 대제후 황제들은 시아파에서 수니파로 기울어지고, 아우랑제브 때에는 힌두교를 불법화하고 사원과 학교를 폐쇄하는 등 종교탄압을 하면서 피정복민들의 반발과 반란을 초래해 제국의 근본까지 흔들리게 되었다.

무굴 제국은 정복자 이슬람과 토착 힌두 문화는 물론 실크로드를 통해 유입된 페르시아 문화 등 다양한 문화가 융합된 새로운 문화를 창출했다. 궁전, 성, 탑, 사원 등 지금도 남아있는 무굴 제국의 수많은 기념비적인 건축물들, 그리고 회화 등 예술품들은 실크로드가 무엇을 전하고 전해 받았는지를 웅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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