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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칭의 기억

  • 기사입력 2021.04.20 22:38
  • 기자명 方山 이희영
▲수필가, 정보체계학 박사, 화랑대문인회 회원, 방산 이희영

몇 년 전, 나는 코칭하러 다녔다. 어느 날 가방을 챙기는데 아내가 물었다. “돈은 받아요?” “돈은 무슨∼ 무료봉사지!” 늘 하는 말이다. “돈도 안 받으며 뭐 하러 다닌담.” 아내 얼굴에 쓰여 있다.  ‘봉황의 마음을 참새가 어찌 알랴!’ 스스로 위안했다.  

  오래 전 현직에서 은퇴했다. 그리고 고민했다. 인생의 후반부를 어떻게 살아야 하나? 인생의 전반부는 남으로부터 받는 삶이다. 인생 2막은 남을 위해 뭔가 주는 삶을 살기로 했다. 산전수전(山戰水戰) 다 겪은 인생이다. 그 경험을 다른 사람을 위해 쓰기로 했다. 늦은 나이에 연세대학교 코칭아카데미에 등록했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내 돈 내고 공부한 건 이때가 처음이다. 미국, 영국에서 석·박사를 취득할 때도 다 나랏돈으로 공부했었는데... 도대체 뭔 일이람. 

 코칭이라고 하면 운동선수를 코치하는 것이라 생각하는데 여기서는 일반 사람을 코칭하는 것이다. 상담과 비슷하다. 상담은 분석적이면서 해결책을 제시해 준다. 그러나 코칭은 해결책을 주지 않는다. 상대가 스스로 깨닫게 도와주는 것이다. 이런 기술을 배우는 데 1년이 걸렸다. 내친김에 장로회신학대학원에서 기독교 상담과정 2년을 이수했다. 한국코치협회의 자격증 2개를 비롯해서 여러 개의 코치 자격증을 더 땄다.

 그날은 육군교도소로 코칭을 가는 날이었다.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한 번도 교도소에 가본 적도 없던 사람이다. 아니 경찰서에도 가본 적이 없던 나였으니 가는 길 내내 설레는 마음이었다. 육군교도소는 원래 남한산성에 있었으나 장호원으로 옮겨져 있었다. 그날은 수요일이어서 수감자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면서 진행되었다. 수감자들은 줄지어 교회 안으로 들어와 의자에 앉았다. 등 뒤에 크게 ‘희망’이라고 쓰인 글귀가 퍽 인상적이었다. 간혹 나이가 든 사람도 보였지만 대부분은 앳된 병사들이었다.

 죄인이라는 선입견인지 무서웠지만, 살펴보니 잘생긴 얼굴들이었다. 저들은 무슨 죄를 지어 이곳에 들어왔을까? 나는 이 중에 누구를 만나 어떻게 위로해 줄 수 있을까? 과연 나의 코칭을 받아 줄까? 이런저런 생각 중에 죄수복을 입은 한 사람이 내 앞으로 다가왔다. 아마 내가 나이가 많은 코치이다 보니 그들 중 나이 많은 수감자를 내게 보낸 것 같다. 

 40대로 보이는 가름한 얼굴이었다. 나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두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다. “저도 군인 출신이에요, 대령으로 만기전역했어요” 그 말은 들은 그는 가늘고 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의아하고 놀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며, 이내 “아∼ 그렇습니까?” 반가운 듯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는 소령이었다. “나는 당신이 무슨 죄를 지었어도 당신을 이해합니다. 당신의 얼굴에서 착하고 선한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해요” 그의 손을 잡으며 말을 이었다. “당신은 절대 나쁜 일을 할 사람이 아니에요” 

 그의 눈동자는 붉게 물들었고 눈물이 고였다. 눈 감으면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것 같은 그의 눈을 피하며, 나도 흐를 것 같은 눈물방울을 참으려 고개 들어 단상 위를 올려다보았다. 아무 말 없이 벽에 걸려 있는 십자가를 한참 동안 올려다보았다. 

 그가 교도소에 들어온 연유는 여자 문제였다. 군인의 특성상 아내와 아이들이 사는 가정을 떠나 혼자서 근무지에서 생활하다 대위 시절 만난 여자와의 관계가 길어지면서 돌이킬 수 없는 상황까지 이르게 되었다. 모든 것이 알려지게 되고 모든 것이 끝장이라고 생각한 그는 여자와 동반자살을 기도했다. 그러나 무슨 운명인지 그 여자는 죽고 자기는 다시 살아 그는 결국, 군사재판을 받게 되었다. 죽기를 결심했었던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재판 과정에서 어떠한 변명이나 선처의 노력도 아니 하고 판결만을 기다렸었다. 재판의 결과는 16년의 중형이었다. 

 가족도 떠나고 자식도 떠나고 아무도 찾아주지 않는 그는 모든 것을 체념하고 교도소 수감 생활을 한 지 1년 정도 지난 상태였다. 그동안 마음을 추스르며 교회를 다니면서 조금씩 안정을 되찾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대화를 통해 당신에게 주어진 이런 고난과 시련은 분명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이고, 그가 당신을 통해서 무엇을 나타내려 하시는지 당신은 그 길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그리고 절대 희망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될 것이며, 하루하루 석방되는 그날을 생각하면서 의미 있는 나날을 보내기를 주문하고 여러 얘기들을 주고받았다. 살며시 부여잡은 그의 손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다음 달에 또 오겠노라 약속하고 끝을 맺었다. 헌병들은 인원을 점검하고 줄지어 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코끝이 시큰해졌다. 

 다음 달, 나는 다시 육군교도소를 찾았다. 지난달과 마찬가지로 그 수감자를 만났다. 나를 보자 전보다 더 환하게 웃으며 반겼다. 그는 또 눈물을 글썽이며, 여자와 정이 깊어질 무렵 ‘아! 이러면 안 된다. 더 이상 지속하지 말고 결별해야지!’ 하고 마음먹었지만 그것을 단호하게 행동하지 못한 것이 가장 후회된다고 했다. 그 후, 몇 번 더 그를 만나며 정도 들었다. 차츰 환한 얼굴로 변해가는 그에게 마지막 한 말은 왜 내게 이런 고난을 주셨을까? 그 의미를 찾기 바란다고. 

 내가 은퇴를 하고 코칭이라는 새로운 공부를 하며 나 자신도 변하고, 남을 위해 보람 있는 일을 한 것은 내 인생의 후반부에 가장 잘한 일이었다. 오늘도 교도소 감방에 있을까? 그 사람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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