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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으로 첫 군사유학의 추억담

  • 기사입력 2021.05.05 23:14
  • 기자명 수필가 이석복
▲차세대 미래전략연구원 이사장,전 육군 제5사단장    

 1966년 갓 소위시절 난생 처음으로 미국을 가게 되었다. 1965년 소위 임관 이듬해 타의반(他意半)자의반(自意半)으로 미국 텍사스주의 엘파소(El Paso)시에 위치한 미 육군방공포병학교〔Fort Bliss〕로 단기군사유학을 가게 된 것이 한미연합부대의 근무 6회, 약 8년간의 인연의 시작이었다. 그 당시 우리 군에 도입된 방공(防空)유도탄 부대에 근무시킬 장교의 양성을 위해 미군 방포학교로 유학을 보낼 장교 선발시험에 응시하라는 명령을 받았던 것이다.

선발시험은 영어시험이었는데 합격선이 70점이라서 합격을 기대할 수가 없었다. 나의 영어실력은 생도시절 과목 낙제(落第)를 면했던 수준이었기에 때문이다. 그런데 결과는 50여명 응시자 중에서 70점을 받아서 4명 뽑는 선발에 당당히 합격을 하였다. 해외유학을 간다는 것이 당시에는 희소한 일이라서 미국 유학을 간다고 하니 가문의 영광으로 칭찬을 받았고, 출국 날에는 김포공항에 가족과 친척분들이 무려 30여명이 환송하러 몰려나온 진풍경이 연출되었다. 그렇게 생애 처음으로 태평양을 건너서 미국유학길에 올랐던 것이다.

미 방공포병학교는 미군들의 장교, 준사관, 부사관, 병들의 양성 및 보수교육을 담당하는 병과전문군사학교였다. 특히 미군의 방공포병무기를 도입한 국가들의 장교, 준사관 및 부사관에  대한 장비운용 및 정비교육을 통하여 미군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차원의 전략적 군사교육의 측면도 있었다. 당시 서독(West Germany)은 자체 방공포병학교를 미군방공포병학교의 부설로 설치하여 인근 화이트 샌드(White Sand) 사막지역에서 실사격훈련까지 실시하면서 나토(NATO)에서의 군사적 역할을 강화하고 있었다.

교육개시일에 교실에 들어가보니 학급인원은 미군장교 25명, 한국군 장교 4명을 포함한 외국군 장교 15명으로 총40명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놀라운 것은 책상마다 재떨이가 있었고 수업 중에도 흡연이 허용되었다. 그 당시에 나는 시차 적응이 안되어 졸음을 쫓느라 연신 담배를 피었던 추억이 떠오른다.

우리 일행은 교육개시 전 토요일에 학교에 도착하여 숙소(BOQ)를 배정받고, 학교시설을 소개 받았는데 식사는 장교식당에서 자율적으로 하게 되어있었다. 미군으로부터 매월 120불을 받았으니 장교식당에서 식사하는 것이 우리 수준으로서도 큰 부담은 아니었는데 저녁 메뉴로 소고기 스테이크도 자주 나오고 가격도 70센트라니 파격적인 가격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다음날 일요일이라 미국 사람들 사는 모습을 알고 싶어서 엘파소(El Paso) 시내구경을 다녀왔다. 미국 시골도시지만 풍요로운 모습에 한없이 부러워했다. 마침 갈증을 느껴 시내 소공원 내 설치된 식수대에 가서 머리를 숙여 마시려는데 물이 올라오지 않아 이것저것 만져 보았지만 어떻게 작동하는지 몰라서 그냥 포기하고 코카콜라를 사서 마셨다.

그런데 난생 처음 본 그 식수대는 미국사람 절만 받고 한국사람 절은 받지 않는다고 투덜거리며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 복도에도 비슷한 식수대가 있었는데 타국 장교가 식수를 마시는 모습을 보고 물어 봤더니 발로 스위치를 밟으라고 가르쳐줬다. 다시 자세히 살펴보니 식수대 아래에 발판이 있었다. 그걸 모르고 절하는 것처럼 고개를 숙이기만 했으니 식수가 나올 리가 만무했다.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문화적 차이가 많았었던 것이다.

하루는 과업을 마치고 시내버스를 탔을 때 버스내부가 칸이 나뉘어져 있었고 뒤칸에는 흑인들이 앉자있어 우리는 어느 칸에 앉아야 할지를 모르고 있는데 버스기사가 앞칸에 앉으라고 해서 앉기는 했지만 마음이 불편하였다. 공중화장실도 흑인용은 ‘For Colours’라고 별도로 구분해 놓고 있었다. 인종차별의 구습(舊習)이 곳곳에 있었다. 영내 PX에서 치약, 휴지, 볼펜 등 생필품을 구매하는데 다양하고 넘쳐나는 상품들이 우리들을 놀라게 하고도 남았다. 숙소도 1인실에 침대와 냉장고, 책상 및 의자, 전기스탠드, 다리미, 샤워실 등 모든 것이 갖추어져있어 부족한 것이 없었다. 풍요의 나라 미국의 첫 유학은 모든 것이 놀라웠었다.

물론 학과수업은 영어로 진행했는데 아직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듣지 못해 걱정이 컸었다. 같이 간 선배님이 예습을 철저히 하면 어느 정도는 듣기가 가능해 질 거라고 친절히 조언해 주었다. 그날부터 밤잠까지 줄여 가며 모르는 단어를 일일이 다 사전에서 찾아서 내용을 암기할 정도로 준비해 수업에 임했더니 교관이 하는 말이 귀에 들어오기 시작함을 느꼈다. 비로소 수업이 재미있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런데 교육 첫 주에 미군은 주간교육이 금요일에 끝나고 토, 일요일은 휴무라는 것을 알았다. 한국군에서 평생 토요일 오전 근무에 익숙했던 우리에게는 일주일이 짧게 느껴졌고 주말이 왜 그리 길던지 어떻게 보내야 할지 고민해보기도 처음이었다. 금요일 오후가 되면 미군장교들이 “TGIF!”라고 외치면서 긴 주말 스케줄을 자랑하며 신나는 분위기가 나기 시작한다. 도대체 “TGIF!”가 무슨 말인지 몰라서 물었더니 “Thanks God Its Friday!"의 약자(abbreviation)라고 가르쳐 주었다. 타국장교들은 미군들의 약어쓰는 언어습관을 몰라서 당황을 하기도 했다.

어느 날은 단체로 야외에 집합해 있던 미군 소위들이 나에게 일제히 경례를 하는게 아닌가? 얼떨결에 경례를 받고 황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교실로 와서 미군장교들에게 그 얘기를 했더니 그 소위들이 막 임관을 해서 기초교육과정(OBC)중인데 나를 중위로 착각하고 경례한 거라고 말했다. 그럴 수 있는 것은 한국군 소위 계급장이 은색 다이아몬드 모양이라서 멀리서 보면 미군 중위계급장인 은색 계급장으로 보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군 장교입장에서는 타국군의 장교를 우습게 볼만도 한데 계급질서에 성숙한 장교의 자세를 보고 미군에 대한 존경심이 생기는 계기가 되었다.

어느덧 시간이 흐르면서 미군부대 생활이 익숙해지고 미군과 타국 장교들과도 친구처럼 대할 수 있는 분위기를 즐길 수 있었다. 그리고 돈을 모아서 미국 중고차를 구매했고, 면허증도 따서 인근지역으로 관광도 다녔다. 그 중고차가 생애 첫 자가용이었던 셈이니 육군소위가 자가용을 굴렸다.

당시 미국에는 한미군사교류의 일환으로 많은 한국군 장교들이 미군군사교육과정에 연수를 와있었다. 다른 교육과정으로 오신 선배들이 어느 금요일 우리에게 지역관광을 부탁하였다. 그래서 그 차에 모시고 엘파소와 리오그란데(Rio Grande)강을 끼고 건너편에 있는 멕시코 후아레스(Juarez)로 관광을 갔었다. 선배들은 멕시코의 이국적 문화를 즐기면서 술과 음식을 즐겼지만 운전을 담당한 나는 콜라만 마시고 있었고, 무료함에 잠깐 눈을 부치었지만 피곤했었다. 선배들이 깨어서 운전을 하고 출발하다가 그만 멕시코 택시와 가벼운 접촉사고가 발생했다.

멕시코 경찰은 제대로 조사도 없이 외국인을 확인하자마자 무조건 내 실수로 구치소에 영치하였다. 생전처음 당하는 일도 일이지만 미국도 아닌 멕시코에서 벌어진 사고다 보니 난처하기 이를 데 없었다. 멕시코 언어도 잘 안통하고 영어도 부족하니 당황스러웠다. 내가 들어간 방에는 멕시코 정치범을 비롯한 잡범들까지 30여명이 수감되어있는 비교적 큰 방이었다. 순간적으로 대한민국 장교로서 국가적 불명예라는 생각이 들어서 다른 수용자들에게 일본군 장교라고 둘러댔던 기억이 난다. 짧은 일본어 실력으로 신분이 탄로 날 위기를 넘기기도 했다. 갑자기 난처한 환경에서 지내는 것도 불편한데 나에게 청소를 시키는 등 장교에 대한 예우가 벗어나서 격투도 벌어졌지만 유도 유단자 실력을 발휘하여 제압을 하자 함부로 하지 않았다. 

미국으로 돌아간 선배들이 모금을 하고 내 호스트 훼밀리(Host Family : 학교당국에서 후견인으로 소개한 미국가족)의 친척 변호사가 주선해 벌금을 내고 일요일 오후에 석방되었던 악몽의 추억도 있었다. 하마터면 멕시코에서 국제적 망신을 당할 뻔했다. 그날의 교훈은 역시 장교는 어디를 가서도 신중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교훈을 평생 간직하게 되었다.

미육군방공포병학교 교육과정을 수료하면서 영어시험도 보았는데 당당하게 자력으로 70점을 넘겼다. 이 군사교육과정에서 미군의 유도탄 무기체계 운용시스템을 습득하고 곁들여 미국문화도 체험했던 첫 미국 군사유학의 시간이었다.

어느덧 과정 수료 후 우리들은 귀국행 항공기가 출발하는 미국 워싱턴주(州) 시애틀(Seattle)근처 타코마(Tacoma) 군공항까지 가는 동안 그레이하운드 버스로 일주일 정도 여행을 하도록 일정을 잡았다. 그 당시 육본지시는 외국에서 장교는 정복에 태극기 마크를 달고 여행하도록 되어 있었다. 일정 중 그랜드 캐니언(Grand Canyon)을 구경하고 샌프란시스코 버스터미널에서 내려 두리번거리는데 어느 교민이 차를 멈추고 “한국 장교이시냐?”고 물어서 반갑게 대답하니 시내 명소를 구경시켜 주고 저녁에는 집으로 데려가서 식사하고 하루를 묵게 해 주었다. 그 당시에는 한국 교민도 적어서 태극기를 단 한국장교를 그냥 못 본채 않는 분위기였다. 이러한 경험은 여행 중에 여러 번 경험하면서 가슴 뭉클한 민족의 정을 느꼈었다.

귀국하는 날은 김포공항으로 마중 나오신 어머니, 아버지와 동생들에게 여유가 없어 선물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죄송했지만 큰 꿈과 좋은 교훈을 한 아름 갖고 와서 성숙된 대한의 아들 모습을 보여드린 것이 자랑스러웠다. 팔순(八旬)을 앞둔 나이에 청년장교시절 미국 군사유학의 추억을 생각하면 웃음도 나오지만 번영한 대한민국의 오늘날과 비교하면서 감회가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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