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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게는 쉽게 구할 수 있는 의약품, 어떤 이에게는 의료 사고의 씨앗

  • 기사입력 2021.07.05 12:39
  • 기자명 UAEM Korea

환절기는 곧 감기몸살의 계절이다. 요즘같이 잔병치레가 많은 환절기에 우리는 몸이 조금 안좋다 싶으면 바로 약국을 찾는다. 약국에서는 웬만한 증상들을 완화시켜줄 약들을 쉽게 구할 수 있고, 설명서를 통해 필요에 맞춰 복용량을 조절할 수 있다. 만약 우리 주변에 약국이 없거나 손 쉽게 의약품을 구하고 복용할 수 없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는 가벼운 증상에도 매번 병원에 가야할 것이고, 자칫하면 증상을 방치하다 큰 병으로 번질 수 있다.  우리가 쉽게 약국에 가서 받아올 수 있는 약들, 그리고 편의점에서 구입할 수 있는 안전상비의약품들은 곧 우리의 건강을 위한 1차 방어선과 같은 제품들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에게는 이런 기본적이고 흔한 약들을 구하고 복용하는 것마저 고생스럽다. 시각장애인들은 점자나 수어 표시가 없는 의약품에 대한 정보를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다. 이런 정보 전달 수단의 부재는 곧 약물사고 사례로 이어진다.

눈을 감고 의약품을 구별해보자. 과연 당신은 필요한 의약품을 정확히 구별할 수 있는가? 위장약 갤포스를 머리 샴푸로, 피부질환 연고를 안약으로, 알레르기 약을 감기약으로 이용한  사례들은 각기 다른 효능을 가진 약품들이 비슷한 용기를 사용하면서 발생한 사고들이다. 시각장애를 가진 부모가 소아용 해열제와 감기약 시럽이 구분되지 않아 어린 자녀에게 약을 바꾸어 먹인 경우도 있다. 심지어 필요한 의약품을 찾더라도 복용하지 못할 수 있다. 안전 사고 방지를 위한 의약품 포장 때문이다. 한 지체장애인의 경우 설사와 통증이 심했지만 스스로 약을 개봉할 수 없어 가족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했다. 만일 그가 제때 도움을 받지 못했다면, 복부 내 염증이나 장기 파열 등 더 큰 문제로 이어질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이처럼 장애인들의 의약품 접근성 문제는 빈번하게 일상 속에서 일어나고 있다.

변화를 위한 끊임없는 움직임, 그러나 더딘 발걸음

2020년 8월, 의약품정책연구소의 정승연 선임 연구원은 미국, 영국 등의 사례를 들며 우리나라도 건강 취약 계층인 장애인의 의약품 접근성을 향상시킬 수 있는 법적,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2020년 9월에는 안전상비약과 보건마스크 등에 대한 장애인 접근성을 향상시키는 내용을 담은 ‘약사법 일부개정법률안’이 더불어 민주당 최혜영 의원에 의해 발의되었다.

현행 약사법에는 의약품 표시정보의 점자, 수어 제공 의무화 조항이 없고, ‘의약품 등의 안전에 관한 규칙’, ‘의약품 표시 등에 관한 규정’에 따라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표기를 권장하고만 있다. 그러나 식품의약품 안전처 자료에 따르면, 현재 의약품에 점자표기를 하는 의약품은 94개에 불과하다. 의약품에 점자 표기를 의무화하는 약사법 개정안은 꾸준히 발의됐으나, 포장자재 교체등 의약품 가격상승 요인으로 작용해 제약업체가 부담을 가지게 된다는 이유로 결국 통과되지 못했다.

장애인의 의약품 안전사용을 위한 제도적 조치의 해외사례

해외의 모습은 많이 다를까. 미국에서는  2012년 시각장애인이나 고령 환자들을 위해 전문약 용기에 부착할 수 있는 라벨 개발이 법적으로 의무화되었다. 시각장애인과 고령 환자들을 위한 “오디오 디지털 라벨”은 약사에 의해 처방약 용기에 부착된다. 오디오 라벨은 적당한 속도의 음성으로 환자에게 해당 의약품에 대해 설명해준다. 설명에는 환자의 이름, 약품명, 약물 복용 방법, 처방번호, 리필 날짜, 리필 개수, 약품의 물리적 외형, 유효기한, 제조자명, 약국명(전화번호) 등이 포함된다. 약물 이름을 이야기할 때는 비슷한 약물 명칭에 의해 타 의약품과의 혼동을 방지하기 위해 알파벳 별로 발음해주기도 한다. 오디오라벨 외에도 시각장애인들이 쉽게 약물을 구별할 수 있도록 점자라벨 및  에폭시 스티커를 뚜껑에 부착해 복용 횟수를 표시해주기도 하며, 일부 경증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프린트 글자 크기를 키우거나, 복용 시간에 따라 다른 색깔의 용기를 사용하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 (미국 시각장애인용 오디오 디지털 라벨) (http://www.dailypharm.com/Users/News/NewsView.html?ID=267616&REFERER=DM) 

미국은 한국과 동일하게 의약품에 대한 점자표시 의무는 없지만, 의약품 포장 관련 산업 협회와 점자 단체들이 협력해 미국과 캐나다에서 통용되는 의약품 점자표시 가이드라인(Can-Am Braille)을 제정하고 2009년 5월부터 의약품 포장 관련 업계 등에 보급해왔다. 또한 포장을 제거하기 힘든 지체장애인들을 위해서는 정제-캡슐제 포장제거기(Punch-out 또는 Pill Bob Dispenser) 및 절단기(Cutter), 점안 보조도구(Eye Drop Guide) 등의 보조 장치들을 판매하거나 제공하여 지체장애인들의 복용 순응도를 높여주고 있다.

▲ (Pill Bob Dispenser(왼쪽), Pill-cutter(오른쪽)) (http://www.dailypharm.com/Users/News/NewsView.html?ID=267616&REFERER=DM) 

유럽 연합의 경우에는 2004년 3월 의약품 관련 지침을 개정하면서 의약품 외부 포장에 제품명 점자표시를 의무화하였다. 성분의 함량이 두 가지 이상으로 판매되는 의약품은 함량도 점자표시 하도록 규정되었으며, 환자 단체의 요청이 있는 경우 시판 허가권자는 의약품 첨부문서를 시각장애인에게 적합한 형태(음성 점자설명서 등)로 제공해야 하는 것이 원칙이다. 이외에도 영국은 약물 오용의 여지가 있는 지적장애인들을 위해서 가정방문을 통해 복용하는 의약품을 검토해주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으며, 지적장애인 대상 약물 사용 교육을 위한 온라인 약사연수 교육이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기본적인 건강권의 보장을 위한 우리의 관심

2014년 장애인 실태조사와 2015년 국민건강통계 등에 의하면 건강상태가 ‘나쁘다’고 응답한 비율은 비장애인16.6%, 장애인 53.4%로 나타났다 (임종한, 2017). 2016년 국립 재활원 장애인건강통계에 의하면, 주관적 건강 인식 뿐 아니라 실제 장애인들은 장애와 함께 관련 질환이 동반된 경우가 많았다. 또한, 2017년 국민건강보험공단 자료에 따르면 국가건강검진 수검률이 전체국민 77.9%에 비해 전체장애인 67.6%로 낮았고, 중증장애인은 55.6%, 뇌병변장애인은 47.9%로 더욱 낮았다. 즉 비장애인보다 장애인이 건강상태도 더 나쁘지만 건강관리를 위한 의료접근성도 낮은 상태임을 알 수 있다.

장애인건강권법 제5조에는 “국민은 장애인의 건강권 보장과 건강격차 해소 및 보건의료 접근성 제고를 위하여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실시하는 장애인 건강보건관리사업에 적극 협력하여야 한다.”라고 국민의 의무가 명시되어 있다. 장애인들의 의약품 접근성 향상은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의 노력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다. 우리 또한 이웃으로 살아가는 장애인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것이 모두를 위한 건강한 사회를 이루는 기초가 될 것이다.

글쓴이 : 고려대학교 보건정책관리학부 최예슬/ 중앙대학교 간호학과 전지수/ Georgia Institute of Technology 컴퓨터과학과 김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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