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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마의 흔적을 지운 관동팔경 낙산사

문화재 : 낙산사칠층석탑(보물 제499호), 해수공중사리탑(보물 제1723호)
소재지 :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낙산사로 100

  • 기사입력 2021.09.20 13:42
  • 기자명 정진해
▲ 낙산사 홍예문 

2004년 9월 4일 낙산사를 둘러보기 위해 홍예문을 시작으로 원통보전 앞의 칠층석탑, 동종, 해수관세음보살상, 해수관음공중사리탑, 의상대, 홍련암까지 사진도 촬영하며 천천히 답사하였다. 그 후 2005년 4월 5일 양양 일대에 산불이 발생했다. 화재는 점점 거세져 1300년의 불교 역사를 간직해온 낙산사를 덮쳤고, 원통보전을 비롯해 전각들은 삽시간에 잿더미로 변했다. 600년 동안 청아한 소리로 번뇌를 씻어주던 동종까지 삼켰다. 

 낙산사는 강화 보문사, 남해 보리암과 더불어 국내 3대 관음성지이다. 낙산사의 창건은 <낙산이대성 관음 정취 조신(洛山二大聖 觀音 正趣 調信)>조에 의하면, 671년(문무왕 11) 의상(義湘)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낙산사 창건 이후 이 절과 관련된 〈삼국유사〉의 기록으로는 원효(元曉), 조신(調信), 사굴산파의 개산조 범일(梵日)의 이야기 등이 전하고 있다.

 낙산사는 서쪽의 일주문을 지나면 홍예문이 남북으로 뿌리를 박고 포물선을 그렸다. 홍예문(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3호) 위에는 1963년에 지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의 누각이 세워져 있다. 자연석을 지대석으로 놓고 그 위에 기단석을 올리고 다듬은 홍예기석을 놓고 안과 밖의 26개의 홍예석을 잘 조합하여 무지개 형태의 문을 완성하였다. 홍예석을 잡아주는 무사석은 밖과 안이 다른 돌을 사용하여 축조하였는데, 안쪽에는 자연석을 사용하였고, 밖에는 다듬은 돌을 면과 면을 잘 맞추어 틈이 없도록 쌓았다. 이 홍예문은 1467년 세조가 금강산을 둘러보고 돌아오는 길에 옛 낙산사 터에 둘러보니 폐허 된 상태로 그대로 있는 것을 보고 중창을 하라고 하였다. 이때 사찰을 중창하면서 강원도의 26개 고을에 명하여 각 고을에서 돌을 하나씩 내라고 하여 모은 돌로 만든 것이 지금의 홍예문이다. 위의 누각은 1963년에 세웠는데2005년 화마로 소실되고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 낙산사 사천왕문  

  홍예문을 들어서면 많은 전각이 새롭게 모습을 갖추었으나 주변의 울창했던 소나무는 옛 모습을 복원할 수 없이 새롭게 조경되어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사천왕문 옆에는 당시 보물 제479호로 지정된 낙산사 동종이 화재로 인해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가 된 동종을 복원하여 종루에 걸려 있다. 2004년의 동종은 세조를 위하여 그의 아들인 예종의 명으로 주조한 종이다. 당시의 종의 형태는 웅건한 몸체의 용두와 사실적인 용린이 어우러져 생동적인 형태를 보였다. 지금은 의상기념관에 원래의 형태를 알 수 없게 변형된 상태로 보존하고 있다.

▲ 낙산사 원장  

 낙산사에는 다른 사찰에 볼 수 없는 원장(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4호)이 원통보전 외곽을 싸고 있다. 조선 전기에 쌓은 이 원장은 담장 안쪽과 원통전 앞의 바깥 변의 담벼락은 기와를 이용하여 쌓고, 바깥 동북서쪽은 자연석을 이용하여 쌓았다.

 담장 안쪽에는 장대석으로 4단의 기단을 올리고 그 위에 다시 1단의 장대석 기단을 놓고 강화진흙과 평기와를 이용하여 쌓고 단조로움을 탈피하기 위해 원형 화강석을 박아 마치 밤하늘의 별자리를 수놓은 것 같기도 하고, 내에 물고기가 유영하는 것처럼 보인다. 담장 바깥쪽의 벽면은 막돌로 벽면을 고르게 쌓고 돌과 돌 사이는 강회진흙으로 메웠다. 담장 위에는 기와로 지붕을 이어 담장을 보호하도록 하였다. 

▲ 낙산사 원장 

원통보전 앞에는 7층 석탑(보물 제499호)이 자리하고 있다. 이 석탑은 세조 때 중창과 함께 건립된 석탑이다. 화마에 석탑 표면에 균열이 발생하는 등 많은 훼손이 있었다. 평면이 방형으로 단층의 기단 위에 탑신부가 올려지고 그 위에 상륜부로 마감하였다.

  기단부는 1석으로 된 방형의 지대석이 깔리고 그 위에 2단의 받침석을 마련하여 기단을 받게 하였다. 하나의 돌로 된 방형의 하대석 윗면에는 24엽의 복련문이 조각되었으며, 중앙에는 1단의 낮은 받침을 내어 기단면석을 받고 있다. 면석은 방형 1석으로서 각 면에는 조각이 없고 그 위에 평평한 1매의 갑석이 놓였다. 밑에는 얕은 부연이 있고 윗면에는 각형 2단의 받침을 마련하여 탑신부를 받게 하였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이 층마다 1석씩인데, 각 층의 탑신 밑에는 방형의 두꺼운 굄돌 1매씩을 끼웠다. 상층으로 올라가는 체감비율은 그다지 높은 편이 아니다. 지붕돌은 아랫면에 3단씩의 받침이 마련되어 있으며, 추녀는 얇고 네 모퉁이의 전각은 반전이 심하다. 낙수면은 평박하고 각 모퉁이의 합각머리가 뚜렷하며, 전각부에 이르면서 반전을 보이고 있어서 추녀의 반전, 평박한 낙수면 등이 잘 어울려 경쾌한 느낌을 준다. 지붕돌은 체감비율이 낮아서 탑신부의 전체 형태가 높게 보이며, 각 지붕돌 윗면의 몸돌굄은 각형으로 1단씩을 내었다. 상륜부는 7층 지붕돌 위에 1석 굄대가 있고, 그 위에는 아랫면에 3단의 받침이 있는 노반을 얹은 위에 청동제 찰주를 중심으로 하여 청동제 상륜부재가 겹쳐 쌓여 있다. 노반 위에는 원형의 복발, 원형의 앙화, 원추형의 6륜 보륜, 보주가 차례로 장식되어 있다.

▲ 낙산사 해수관음상

  낙산사에는 1977년 당시 동양 최대 규모의 해수관음상이 동해가 내려다보이는 오봉산 정상에 만들어졌다. 해수관음상 앞에는 해수관음전이 있고 그 앞에 경사진 곳에 해수관음공중사리탑(보물 제1723호)이 자리하고 있다. 해수관음상도 바다를 보고 있지만, 공중사리탑도 바다를 향해 자리하고 있다.

 공중사리탑은 2005년 5월 수리하는 과정에서, 탑신부의 상단에 있는 원형의 사리공에서 불사리 1과를 담은 유리제 사리호, 금제함, 은제함, 청동함과 각각의 함을 싼 비단 보자기, 발원문이 담긴 연기문 등 사리장엄구 일괄이 발견되면서 수수께끼가 풀렸다. 불사리가 숙종 18년(1692)에 봉안되었다는 기록이 탑비와 일치 하였다. 발원문에는 낙산사가 위치한 관동지방의 아름다운 경치에 대한 찬탄, 낙산사의 위상과 관음 신앙에 얽힌 영험, 공중에서 사리가 나타난 이적, 사리 영험에 대한 견해, 공중사리탑 건립에 관한 기록과 국왕과 왕비, 세자의 만수무강과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 낙산사 원통보전  

  팔각원당형의 외형을 갖춘 전체의 구조는 지대석, 하대석, 중대석, 상대석으로 이루어진 기단부와 몸돌과 지붕돌을 갖춘 탑신부, 상륜부를 갖추었다. 두 장의 석판을 맞추어 지대석을 놓고 그 위에 하대석의 옆면에는 안상 안에 삼태극 무늬를 넣었으며 윗면에는 16판의 복련을 둘렀다. 8각의 모서리는 상다리 모양을 하고 복련 아래에는 영기문양을 둘렀다. 중대석은 복잡한 선 무늬로 장식하였다. 상대석은 앙련으로 받치고 그 윗면에는 범자를 새긴 안상을 얕게 새겼다. 중대석과 상대석의 각 면 모서리는 구슬 문양을 새겼다. 탑신의 몸통의 아래에는 연꽃을 조각한 구형이고 지붕돌은 처마가 느린 U자형을 이룬다. 지붕은 팔각인데 상륜부는 앙련과 복발, 보륜, 보주를 한 돌에 조각했다.

  의상대사가 당나라에서 돌아와 낙산사를 지을 때 산세를 살피던 의상대(강원도 유형문화재 제48호)가 자리하고 있다. 지금의 의상대 자리는 의상대사의 좌선 수행처라 전한다. 1925년 낙산지 지주 김만옹 스님이 정자를 지을 당시 들보를 쓸 나무를 구하던 중 거센 비바람이 몰아쳐 대 위에 있던 소나무가 넘어져 스님이 이 나무로 들보를 만들어 6모정을 완성하고 의상대라고 불렀다. 1936년에 태풍으로 넘어져 중건하였고, 지금의 의상대는 1995년 8월에 해체 후 다시 중건하였다. 정자의 장초석은 육각형으로 기둥은 배흘림기둥에 겹처마의 모임지붕으로 지붕 가운데는 절병통으로 마감하였다. 

  기암 절개 끝에 자리를 잡은 흥련암(강원도 문화재자료 제36호)은 아침 일출을 가장 빨리 맞을 수 있는 암자이다. 삼국유사,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기록된 설화에 따르면 홍련암은 의상대사가 관음보살의 계시를 받고 지었다. 해변 절경에 자리한 홍련암은 의상대사가 세웠고 광해군 12년(1619)에 고쳐 세운 기록이 있으나 지금의 건물은 고종 6년(1869)에 고쳐 지어 오늘에 이른다. 의상대사가 붉은 연꽃 위에 나타난 관음을 직접 보고, 대나무가 솟은 자리에 홍련암을 지었다는 설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정년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건물이 절벽 위에 자리하고 있어 출입문을 측면에 달아 사용하고 있다. 법당 안에는 관음보살좌상을 모시고 있고 ‘보타굴’이라는 현판이 걸렸다. 홍련암은 석굴 위에 자리하고 있어 법당 밑으로 바닷물이 출렁이며 석굴 안으로 들락거린다. 마루에는 가로세로 10cm 정도 되는 사각형의 구멍이 나 있으며, 이를 통해 석굴로 들락거리는 파도를 내려다 볼 수 있다.

  지금의 낙산사는 화재의 흔적에서 벗어나 있는 모습이다. 천년고찰의 원형을 다시 찾기 위해 아픈 역사를 지워나가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것이 역사의 흐름이고 절망의 시간에 함께 기도하고 격려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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