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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례의 인연과 보람 그리고 실수이야기

  • 기사입력 2021.09.21 17:16
  • 기자명 이석복
▲ 歡喜 이 석 복(수필가, 차세대미래전략연구원 이사장)  

나의 일생에서 결혼식 주례는 보람있고 뗄 수 없는 소중한 인연의 한 부분이 되었다. 내가 결혼할 때 주례로 모신 선생님은 고등학교 은사님이셨다. 그분은 고3때 담임선생님이시기도 했지만 6.25전쟁 시 장교로 임관하여 백마고지 일대의 전투에서 중공군과 치열했던 전투경험을 때때로 말씀하시면서 이 나라를 국군장병들이 어떻게 지켰는가를 제자들에게 각인시켜 주셨던 분이셨다.

그 시절 선생님은 내게는 영웅이셨고 내가 육사에 합격할 수 있도록 여러모로 도와주시기도 했다. 선생님은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 후 얼마가 안되어 5.16혁명 뒤 창당한 공화당에서 재야에 묻혀있는 인재들을 발굴할 때 천거(薦擧)되어서 국회의원도 하셨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에베레스트산 첫 등정에 성공할 때 산악대장을 하시기도 했다.

내가 결혼을 결심하고 집사람과 함께 북한산 우이동 자락에 있던 선생님댁으로 찾아뵙고 주례를 부탁드렸을 때 주례경험이 없다면서도 기다렸다는 듯이 수락해 주셨다. 막상 결혼식날 선생님께서는 신랑자랑을 잔뜩하시다가 다음 말을 잇지 못하시고 갑자기 한참을 끊겼다가 다음 말씀을 이어나가셨던 우발상황이 발생했었다. 그 풍부한 경험과 유능하신 선생님도 주례사를 준비하지 않고 하시려니 긴장도 되셨고 장내가 혼란스러웠던 모양이셨다. 신랑인 나로서는 말씀이 끊긴 그 순간부터 어찌나 길게 느껴졌던지 신부보기에도 너무 민망스러워서 주례사가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던 추억이 있다. 이 추억은 오랜 후 내가 주례선생님을 할 때 꼭 글로 써서 실수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계기가 된 것 같다.

어느덧 20여년의 세월이 흘러 이제는 우리 자식들의 결혼이 시작되었고, 같이 근무하는 부하들의 결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주례를 서는 처지가 되기도 했다. 나는 아직 내 자식도 결혼을 못시켰는데 남의 주례를 선다는 것에 부족함을 느끼기도 했거니와 삶의 선배로서 성숙함도 부족하여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에 주례요청을 받았을 때 극구 사양도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득이 주례를 맡게되는 군대사회의 형편도 있었다. 이렇게 시작된 주례가 43번이나 되었고, 75세를 넘긴 후부터는 집사람이 강력히 만류하여 주례선생님에서 은퇴하게 되었다.

내가 맡은 주례는 부하전우들, 친구와 동기생 자녀들, 부하직원들, 사회단체 동지자녀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내 조카들과 아들친구들의 주례도 예외적으로 섰던 적도 여러번 있었다. 돌이켜보니 다행스러웠던 것은 내가 주례를 맡은 부부들은 이혼이 없었고, 내가 자녀를 많이 두도록 강조했던 덕분인지 모두 둘 이상의 자녀를 갖게 된 것으로 확인하면서 뿌듯함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일단 주례를 약속하면 반드시 신랑신부를 사전에 만나 충분히 대화를 나누면서 주례사를 의미있게 작성하고자 확인 할 것도 챙긴 다음 몇 가지 주문도 했다. 우선 결혼서약서는 결혼식장에서 마련해 주는 것은 무시하고 신랑신부가 직접 작성해서 결혼식 당일에 하객 앞에서 자신들이 직접 낭독하도록 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좋은 액자에 넣어 평생 간직하도록 당부했다. 자녀를 둘 이상 낳지 않겠다면 주례를 맡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기도 했다. 주례사는 길지도 짧지도 않게 7~8분정도 했다. 먼저 신랑신부를 하객들에게 비교적 소상히 소개하고 격려의 박수를 유도했다. 주례선생님으로서 당부로는 첫째, 제일 중요한 사랑에 대해서는 국가에 대한 사랑, 직장에 대한 사랑, 부부로서의 사랑, 부모님께 대한 사랑, 자녀들에 대한 사랑을 짚어줬다. 둘째, 꿈과 목표를 항상 간직하고 살아가도록 강조했고, 마지막으로 자녀들 많이 두도록 권유하고 신랑신부에게 마이크에 대고 하객 앞에서 큰 소리로 약속하도록 요구했다. 이 장면에서 하객들의 웃음보가 많이 터졌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렇게 주례사를 철저히 준비해서 했는데 한 번은 고등학교 친구아들 결혼식 때 조그만 사고가 벌어졌다. 신랑을 소개하고 박수를 유도한 후 신부를 소개하는데 하객들이 막 웅성거리는 것이었다. “아차! 내가 무슨 실수를 했나보다.” 하고 직감을 하고 신부에게 나직하게 물으니 신부의 성(姓)을 잘못 소개했다는 것이 아닌가? 분명히 아버지의 성을 붙여 불러줬는데 지금 아버지는 어머니가 재혼한 분이시라는 것이었다. 정정해서 수습하고 결혼식 후 왜 사전에 만났을 때 정확히 얘기 안했냐고 추궁하니 차마 말을 못했다는 것이었다. 이후 다시는 그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고 반드시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다.

또 한 번은 대전에 있는 대학교에서 겸임교수로 강의를 했을 때의 일이다. 강의 후 4학년 여학생이 다가와 차 한 잔 하시자고해서 마주했더니 결혼 주례를 부탁하는 것이었다. 나는 겸임교수이고 시간도 안맞는 것 같으니 정교수님들께 부탁드리라고 사양함에도 불구하고 막무가내로 졸라대는 것이었다. 그때 당시 인도출장이 계획되어 있어서 날짜를 맞춰보니 결혼식이 출장귀국하는 다음날이었다. 신랑도 나에게 주례를 요청하라고 했다며 필사적으로 부탁을 하니 차마 거절을 못하고 수락을 했다.

인도 출장을 가서 중부 소도시에 위치한 동전(銅錢) 조폐창을 방문하고 뉴델리로 복귀하던 중 비행기 바퀴가 접히지 않아 회항하는 우발사태가 발생하였다. 인재(人災)라고 할 수 있으나 천재(天災)라고도 할 수 있는 항공사고가 발생해 한국에 하루 늦게 도착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니  결혼식 시간을 도저히 맞출 수가 없는 난감한 상황에 처했다. 인도 지방도시의 호텔에서 한국 에 전화가 잘 되지 않아서 간신히 현지주재원의 핸드폰으로 그 여학생에게 인도현지 사고상황을 설명해 줄 수 있었다. 이 일은 고의성이 없다지만 신혼부부에게 너무도 큰 실수를 하게 됐다. 귀국 후 확인해보니 예식장의 전문주례에게 부탁을 했다고 알았지만 미안한 마음이 오래도록 갔었다. 그 후로부터는 일정이 애매할 경우에는 주례를 맡지 않게 되었다.

주례선생님과의 한 인연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여러 사례가 있지만 다음의 두 가지 경우만 소개하고자 한다. 내가 주례를 해준 조카딸 가족이 캐나나 캘거리로 이민을 가게 되었다. 어느 날 두 내외가 와서 출국인사를 했는데 연고도 없는 곳이고, 직장도 현지에 가서 알아본다는 것이다. 무모할 정도로 용감했다. 그런데 몇 일후 뜻밖에 캐나다 캘거리에서 큰 사업을 하고있는 잊혀졌던 지인이 귀국을 해서 오랜만에 안부 전화를 해온 것이다. 반가운 인사를 나눈 후 내가 조심스럽게 마침 유능한 조카부부가 캘거리로 이민을 간다는데 추천해도 되겠냐고 의향을 떠본 즉 내일 바로 보내보라고 했다. 다음날 조카딸부부를 데리고 갔더니 몇 마디 경력과 능력을 체크해보더니 당장 조카딸은 입사계약을 하고, 신랑은 영어적응교육을 6개월 받은 후 채용하겠다고 결정을 해주었다. 그날 고마워했던 조카딸부부의 모습은 결코 잊을 수가 없다.

다음 경우는 내가 사단장을 할 때 스승의 날(매년 5월15일)에 나의 주례를 서주신 담임선생님을 초청하기로 했던 일이다. 6.25전쟁 시 선생님께서 싸웠던 바로 백마고지 일대가 마침 사단 책임지역내 있는 것을 내가 기억해내고 그 격전지를 볼 수 있는 곳을 안내해드렸다. 그러자 선생님께서는 얼마나 감격해 하셨던지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까지 말씀하셨다. 이 장면을 지켜보던 부하장병들도 사단장과 스승의 아름다운 관계를 부러워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제 팔순을 바라보는 인생에서 나는 주례를 섰던 43쌍의 부부가족이 대한민국의 모범적인 가정으로 성장하고 국가와 사회에 크게 기여하기를 지금도 기대하는 주례선생님의 마음이다. 다른 분들은 주로 행복해주기를 바라겠지만 나는 이 시대 선진조국을 위한 젊은이의 사명감을 추가로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최근 결혼식의 진풍경 중에 신랑신부가 주례사를 대신하여 서로에게 주는 편지를 읽고, 양가부모가 우스개소리를 섞어 나름 삶의 교훈을 전하는 등 주례선생님의 자리를 없애는 것이 새로운 트렌드인 것 같다. 이런 결혼식이 밝은 분위기 속에서 즐겁게 진행되는 좋은 점도 있겠지만 한편 일생을 이끌고 갈 장중한 맛과 멋이 희석되는 것 같아 허전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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