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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김 씨, 나탈리아

  • 기사입력 2021.09.25 20:05
  • 최종수정 2024.02.03 15:31
  • 기자명 김희재 작가

                                         

▲ 김희재(수필가,한국어 교육 전문가)  

아기는 망설임 없이 냉큼 마이크를 잡았다. 남은 손으로는 의사봉을 집어 들고 상을 땅땅 두들겼다. 사진기자처럼 둘러서서 핸드폰을 들이대던 사람들 모두 일제히 환성을 질렀다. 아기도 무엇을 아는 것처럼 싱긋이 웃으며 사방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아기 옆에 앉아서 웃고 있던 나탈리아의 입꼬리가 실룩이더니 울음보가 또 터졌다. 그 모습에 다들 마음이 짠해져 눈물을 질금거리며 덕담 한마디씩 해 주었다.

 "하이고 그 녀석, 판검사가 되려나 보네."

 "아니야, 마이크 잡고 두드리는 걸 보니 국회의장이 되겠는걸."

 "나탈리아 좋겠네. 지금은 좀 힘들지만, 아들 덕 톡톡히 보게 생겼어요."

  하얀 피부에 금발 머리, 키 크고 날씬한 나탈리아를 박 권사네 집에서 처음 만났다. 교우들 몇이 함께 모여서 백김치를 담그던 날, 다문화가정을 돕는 봉사활동 하는 분이 데리고 오셨다. 그녀는 우크라이나 출신 결혼이주여성이었다. 예쁜 외모와는 달리 밤낮 술만 마시다가 쓰러져서 제 아기를 보육원에 보내 놓은 사람이었다. 다행히 지금은 주변의 도움으로 건강이 많이 회복되었고, 며칠 후면 아기도 도로 데려올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초면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눈치껏 싹싹하게 일을 잘했다. 한국어도 꽤 잘하고 붙임성이 좋아서 금세 친해졌다.

  그녀는 러시아에서 태어나 우크라이나에서 자랐지만, 지금은 어엿한 대한민국 사람이다. ‘대전 김 씨, 나탈리아’다. 한국 국적을 취득하러 가서 서류에 김 나탈리아라고 썼더니 담당자가 본관이 어디냐고 묻더란다. 그래서 서슴없이 “내가 지금 대전에 살고 있으니 대전 김 씨”'라고 했단다. 나이도 어린 사람이 당차다. 그것이 한 가문의 시조가 되는 일인 줄이나 알고 그랬을까? 객지에서 혼자 살면서도 주눅 든 구석이 없이 밝아 보여 호감이 갔다. 

   김치를 만들다 말고 느닷없이 그녀가 아기 돌 사진 좀 보여 달라고 했다. 아들딸을 다 출가시킨 박 권사가 창고에서 빛바랜 큰아들의 첫돌 사진을 찾아왔다. 당시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돌잔치는 못 하고 사진관에 가서 사진만 찍어 준 것이라고 했다. 나탈리아는 액자를 어루만지며 자기 아들도 이렇게 한복 입혀서 사진 찍어주고 싶다고 했다. 2주 후면 아기의 첫돌인데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말을 수없이 되풀이했다. 약간 뻔뻔해 보이는 돌출행동이 어이없긴 하지만 그 눈빛이 너무 간절하고 애틋했다. 

  설령 나중에 형편이 좋아진다 해도 첫돌잔치는 소급해서 해 줄 수가 없다. 젊은 여자 혼자서 의지할 친척 하나 없이 타국에서 비틀거리며 사는 것도 딱했다. 그래서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얼굴도 모르는 아기의 돌잔치를 해 주기로 했다. 장소는 정원도 있고 널찍한 박 권사네 집이 제격이었다.

   우리는 대전역 근처 한복거리에 가서 아기 한복 일습에다 모자와 염낭까지 다 사고, 파티용품 전문점에서 벽에 장식할 배너와 풍선, 돌잡이 용품 등을 샀다. 떡집과 과일가게, 제과점에도 미리 주문해 놓고, 돌사진이 잘 나오게 거실 가구 배치를 다시 했다. 

  소파 테이블에 흰색 보를 깔고 케이크와 떡, 과일, 꽃바구니 등을 올려 돌상을 꾸몄다. 돌잡이 할 청진기, 마이크, 의사봉, 마우스, 연필, 실타래, 지폐 등은 예쁜 쟁반에다 따로 준비했다. 각자 나누어서 장만해 온 잔치 음식과 선물은 식탁에다 볼품 있게 차려 놓았다. 거기에다 꽃이 흐드러진 정원의 풍경을 더하니 보기에 좋았다.

  아기를 안고 들어오다 거실에 차려진 돌상을 보고는, 나탈리아가 화들짝 놀라며 돌아서서 비죽비죽 울었다. 자기 인생에 이렇게 좋은 날이 있을 줄 몰랐단다. 명랑하고 당당하던 사람이 내 어깨에 고개를 박고 코가 빨개지도록 울었다.

  그녀는 12년 전에 한국에 와서 두 번 결혼하고 두 번 이혼했다. 아버지가 다른 자녀도 둘을 낳았다. 열한 살 난 딸은 첫 남편 본가에서 시아버지가 기르고, 그녀는 돌쟁이 아들과 둘이 살고 있다.

  한국에 와서 그녀가 처음 잡은 직장은 서울 근교 라이브카페에서 심부름하는 것이었다. 거기서 노래 잘하고 머리가 긴 남자를 만나 딸을 낳았다. 남편은 주사가 심했고, 걸핏하면 때렸다. 도저히 살 수가 없어서 딸을 남편에게 주고 갈라섰다. 그러자 남자는 아이를 대전에 사는 자기 아버지에게 보내고 금방 재혼했다. 그녀는 딸이 있는 곳으로 따라왔다. 

  대전에 와서는 식당에서 일했다. 일하면서 다시 남자를 만나 사랑하게 되었지만 결혼하는 건 수월하지 않았다. 시어머니의 완강한 반대를 임신으로 이겨냈지만, 막상 결혼하고 보니 남편은 버는 것에 비해 씀씀이가 크고 헤픈 데다 빚이 많았다. 생활비도 잘 주지 않았고, 걸핏하면 자기 엄마한테로 도망가는 마마보이였다. 결국, 뱃속에 든 아기를 낳기도 전에 또 이혼했다. 그녀 혼자 산고를 겪었고, 아들을 낳았다. 남편은 양육비는커녕 연락도 끊었다.

   그녀는 지금 정부에서 나오는 육아 수당과 구청 생활보조금을 가지고 월세 27만 원짜리 원룸에서 사는데, 마른 수건 쥐어짜듯 살아야 하는 지독한 가난이 싫었다. 무책임한 남자가 미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기를 재워 놓고 밥 대신 술만 마시다 쓰러졌다. 아기는 보육원에 보내졌고, 점점 더 깊은 절망과 우울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눈물과 웃음이 뒤범벅된 얼굴로 한참 자기 이야기를 하더니, 허기가 지는지 음식을 덜어다가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이렇게 멋진 돌잔치를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단다. 

이제 겨우 서른세 살. 남들은 한 번도 안 갈 나이에 나탈리아는 시집을 두 번이나 갔다 왔다. 왜 하필 그런 남자들만 골랐느냐고 한마디 하고 싶은 걸 꾹 참았다. 듣는 내 속이 이리 아픈데, 겪은 제 마음은 오죽하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상 위에 남은 음식들을 골고루 챙겨 집으로 돌아가는 그녀 손에 들려주었다. 

  나탈리아에게 한국은 어떤 나라였을까. 스물한 살 난 아가씨가 동경하며 꿈꾸던 세상은 아니었을 것이다. 낯선 땅에다 뿌리를 내리기 위해 그녀는 온몸으로 부딪쳤고, 가끔 비틀거리기도 했다. 그래도 지금 이렇게 ‘대전 김 씨’ 시조가 되었으니 대견하고 고맙다. 

  문득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한 것’이라는 다윈의 말이 생각난다. 부디 강인한 생명력으로 어려운 상황을 잘 버티고 이겨내어, 어엿한 가문을 이루어 가면 좋겠다. 늘 곁에서 지켜보며 응원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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