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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사망 당시 한미연합 공조를 이끌어낸 이야기

  • 기사입력 2021.10.02 15:45
  • 기자명 이석복
▲ 歡喜 이 석 복(수필가, 차세대미래전략연구원 이사장)     

본 일화는 1994년 7월 9일 토요일에 일어났던 일이다. 하루 전 8일 북한의 김일성이 사망했다는 충격적인 뉴스가 북한에서 발표되자 한국군은 즉각 전군에 비상경계태세를 발령했다.

그 당시 한미연합사(CFC ROK & US)의 주한미군은 토요일이 공식 휴일이었고, 한국군은 다른 한국군 부대와 같이 정상 출근하여 자체계획에 따른 업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북한에 공산주의 정권을 세워 6.25전쟁을 일으켰던 장본인 김일성의 갑작스런 사망은 우리에게도 큰 충격과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리 사회는 남북 간 무슨 변고(變故)가 벌어질 것 같은 위기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당시 고 김영삼 대통령은 건국 후 최초로 김일성과 남북 정상회담을 16일 후인 7월 25일에 갖기로 했었던터라 건강하다고 믿었던 김일성의 급서(急逝)는 청천벽력(靑天霹靂) 일 수 밖에 없었다.

한미연합사 한국군측 지휘부는 곧 미군측 반응을 점검한 결과 게리 럭 연합사령관은 군사적으로 대수롭지 않은 일로 받아드리고 있었고, 어떤 특별한 조치의 필요성도 못 느끼고 있다는 것으로 확인됐다. 한국군측은 이러한 미군측의 반응에 당황 할 수밖에 없었다. 한미 간에 김일성 사망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물론 북한에 군사적인 특이동향이 식별되지 않고 있었지만 워낙 김일성은 북한 자체였기 때문에 혹시 한국군측이나 미군측 정보망이 놓치고 있는 군사적 상황이나 앞으로 벌어질 어떤 우발사태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국방부 장관이 연합사 부사령관(한국군 대장)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왔다. 오늘 중으로 게리 럭 한미연합사령관을 만나 김일성 사망과 관련해 한미 대응책을 논의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국방부 장관이 한미연합사령관과 연락을 취하려고 하였으나 접촉이 안 된다는 것도 언급했다. 한반도의 안정적인 위기관리를 위하여 반드시 만나야한다는 것이었다. 확인해보니 연합사령관은 골프 약속이 있어 성남골프장(현 송파구에 위치했던 남성대 골프장 곁에 있었던 주한미군 전용골프장)으로 이미 출발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부사령관이 부참모장인 나를 급히 찾아서 갔더니 “당신이 성남골프장으로 가서 연합사령관을 직접 만나 국방부 장관의 긴급 면담요청을 전하고 반드시 성사를 시켜주시요”라고 지시를 하는 것이었다.

부사령관의 입장에서 본인이 직접 골프장에 찾아가기도 그렇고, 게리 럭 장군을 설득할 적임자로 나를 생각한 것 이었다. 연합사령관은 평소 연합업무과정에서 한국군 부참모장의 의견을 상당히 존중해 주고 있었다. 미군측 고위 장성들이 한미연합사를 방문 시 만찬에 부사령관 뿐 만 아니라 부참모장을 꼭 참여시키는 등 깊은 신뢰감과 파트너십을 보였기 때문에 나도 각별히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연합사령관의 성정(性情)을 잘 알고 있는 나로서는 연합사령관이 김일성의 사망사건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자신의 생각을 쉽게 바꾸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에 곤혹스럽기 짝이 없었다. 하여튼 부사령관의 지시사항을 따르지 않을 수도 없어서 급히 성남골프장으로 과속을 무릅쓰고 달려갔다. 통상 50여분 소요되었는데 30여분 만에 도착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달려가는 도중에 “어떻게 연합사령관을 설득 할 것인가?” 곰곰이 생각하면서 가고 있었다. 연합사령관은 김일성의 사망과 한미연합사의 전투준비태세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판단한 것으로 알고 있는 나로서는 관계가 있다고 이해시켜야 문제가 풀릴 것이라는 핵심 키워드를 생각해 냈다. 설사 김일성 사망사건이 한미연합사의 전투준비태세의 수준을 변경시킬 만한 사건이 아니더라도 최소한 한국국민들은 매우 위중한 사건으로 믿고 있다는 정황을 알려줘야 할 것으로 정리했을 때 차는 골프장에 도착했다.

다행히 연합사령관은 환복을 하고 라커룸에서 막 나오는 참이었다. 나는 짧은 순간이었지만 숨을 깊이 들여 마시고 차분하게 논리적으로 생각을 정리하면서 연합사령관에게 다가갔다. 연합사령관은 내가 온 것을 알아차리고 평소와 달리 귀찮고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미 국방부장관과 연합사 부사령관이 찾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것 같았다. 그런데 골프장까지 연합사 부참모장이 직접 나타났으니 불편한 얘기를 직감하였을 것이다. 우선 나는 사령관님의 귀중한 시간을 방해해서 죄송하다는 인사를 하고 김일성 사망문제 때문에 찾아 왔다고 말했다. 이어서 이양호 국방부장관(예비역 공군 대장)께서 사령관님을 만나서 김일성 사망과 관련하여 한미 대응책을 상의하고자 한다고 말씀드렸다. 생각했던 대로 연합사령관은 김일성 사망과 한미연합사는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에 국방부 장관을 만나 논의할 일도 없다고 단언하면서 골프 카트 쪽으로 걸어가는 것 이었다.

한 마디로 정치적 문제인데 왜 군사책임자인 나를 이용하려 하느냐는 태도였다. 나는 당황했지만 순간적으로 생각한 마지막 카드를 내밀었다. “사령관님 말씀이 맞습니다. 그러나 사령관님은 대한민국 방위를 책임지시면서 동시에 대한민국 국민의 전쟁 위협에 관한 우려를 풀어 주셔야 할 책무도 있다는 것을 상기해 주십시요”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갑자기 가던 걸음을 멈추고 나를 빤히 쳐다보는 것 이었다. 한참 나를 보더니 수행하던 전속부관에게 차를 대라고 지시하는 것이었다. “이 장군! 당신이 이겼소. 국방부장관을 만나겠소”라고 국방부장관과의 긴급면담을 약속했다. 이 순간은 천우신조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다. 나는 “감사합니다. 옳은 결심을 하셨습니다. 복장은 전투복이 좋을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면서 계획된 골프를 포기하고 출발하는 연합사령관에게 경례를 했다. 

약 1시간 후에 연합사령관은 전투복 차림으로 국방부 장관실 앞에서 대기 중이던 수많은 기자들을 지나 마중 나온 장관께 경례하고 한미 대응책 논의에 들어갔다. 방송과 신문은 이를 톱뉴스로 방송하고 대서특필하면서 대한민국을 들썩이던 김일성 사망사건과 관련한 위기상황은 한미 군수뇌부의 만남으로 차분하게 안정되기 시작했다. 사상 초유의 한반도 불안상황을 한미동맹의 빈틈없는 공조의 모습으로 국내외적으로 안정을 갖도록 조치했었던 당시 일은 잊을 수가 없다.

훗날 2011년 11월 17일 북한 김정일이 사망했을 때도 큰 충격은 없었다. 북한의 김씨 왕조와 이를 옹위하는 기득권 세력은 상생하는 구조이기 때문에 항상 독재자의 유고에 대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지금도 가끔 국민들에게 주목 받기 위해 북한 김정은이 중태라느니, 가짜라느니 등의 미확인된 뉴스를 생산하는 엉터리 작자들이 있지만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체의 대비태세가 중요한 것이다. 평소의 지론대로 “나라가 있어야 국민도 있는 것이다”처럼 “안보가 있어야 평화도 있다”고 확신한다. 우리국민은 한미동맹과 국군 및 정보기관 등 안보관련 조직이 정치적 이해와 관계없이 건전한 판단과 군사대비태세를 갖추기를 늘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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