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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우(태양)의 후예(9회) 태풍 하이엔이 남긴 '죽음의 잔해'와 '트라우마'

  • 기사입력 2021.10.02 16:05
  • 기자명 이철원
▲ 태풍 하이엔으로 사망한 동생의 모대 무덤에서 피리를 불어주는 형 

 엄청난 재난 뒤에 살아남은 자들이 무엇보다 극복하기 힘든 것은 가족, 친구 등 주변 사람들의 죽음이었다. 이런 고통을 겪고 있는 주민들이 1년 내내 길가나 마을 공터에 가매장한 가족의 무덤 앞을 맴돌고 있다. 그들 중에는 술과 수면제로 버티다가 하이옌 태풍 1주기가되면서 자살하는 사람이 생기는 것도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슬픔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 태풍 하인엔이 지나가면서 폐허가 된 마을

죽음의 잔해 

 태풍이 지나고 한 달 뒤인 12월 초에 이곳에 정찰 왔을 때 폐허의 잔해 더미와 함께 눈에 들어 온 것은 병원 주변에 쌓여 있는 시체를 싼 검은색 비닐과 도로변, 공터 곳곳에 크고 작은 십자가가 꽂혀있는 돌무덤들이었다.

 12월 말 부대원들과 함께 현지에 도착했을 때도 그 모습 그대로였는데, 지방정부도 너무나 많은 시신들을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 같았다. 특히 필리핀은 지주들이 많은 땅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가난한 사람들은 시체를 매장할 곳이 없어서 가족의 시신을 집주변, 마을 공터, 도로주변, 성당에 매장하였다. 밤낮으로 무덤가에 앉아 있는 주민들의 모습을 대할 때마다 내 가슴이 먹먹해졌다. 시청의 게시판에는 확인된 사망자와 실종자 명단이 붙어 있었고, 여기저기 늪지대와 건물 잔해, 해안가 등에서 막대기를 가지고 시체를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여러 구의 시신을 직접 봤는데 익사한 시신들로 손과 발이 구부러진 상태였으며 어린이 시신이 많았다. 아라우부대 캠프 건설 중에도 세 개의 임시 무덤과 한 구의 시체를 처리하였는데 현지인들은 우리 중장비가 움직일 때마다 '혹시 가족의 시신을 찾을 수 있을까?'라는 기대감에 지켜보았다. 또한 레이테 주립병원, 성 호아킨 병원 등에서 포크레인으로 잔해물을 치우다가 여러 구의 시신을 발견해 처리했다.

 시신 발견시 시청에 신고하면 시신처리반이 출동해 검은 비닐 주머니에 시신을 수거해 갔으며, 수거해간 시신은 한 곳에 모아 놨다가 일괄적으로 매장을 했다. 이런 과정에서 신원 확인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이는 너무나 시신이 많아 육안으로 확인이 어려웠고 무엇보다 우리나라처럼 DNA 확인 체계가 없기 때문이었다. 주 정부도 시신 확인이안 되고 공동묘지도 제한되어 시신처리와 매장이 큰 이슈가 되고 있었다. 그나마 신원이 확인된 시신은 십자가에다 이름을 써서 매장이라도 했지만,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대다수의 시신들은 2개월 동안 노상에 방치되어 있었다.

▲ 집단 매장 전에 장례 미사를 드리고 있는 모습 

 1월 초, 타클로반 시장의 요청에 따라 포크레인을 지원하여 시립공동묘지에 1,000여구의 시신을 집단 매장했다. 넓은 공터에 폭 3미터, 길이 50내지 100미터 도랑을 파서 바닥에 시신을 눕힌 후에 흙으로 덮었으며 묘비도 없이 평평하게 다진 후에 잔디를 심었다. 태풍 후 10개월이 지난 2014년 9월, 민방위 사무국은 태풍 하이옌으로 인한 사망 및 실종자는 12,000명이고 그 중 레이테주 일대에서 5,380명 타클로반에서 2,589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당시에도 마을 곳곳에서 시신이 발견되고 있었고 실종된 시신의 대부분은 바닷물과 함께 쓸려 나갔다고 보고 있으며, 종종 어부들이 훼손된 시신을 발견하고 있어서 해안마을 주민들은 한동안 생선을 먹지 않고 있었다.

 살아오면서 많은 주검을 대해 왔고 죽음에 대해 초연하다고 자부하고 있지만 어떤 이유로, 무엇을 잘못해서, 이렇게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죽어야만 하는지, 종교적으로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하는지 많은 의문이 떠올랐다. 그저 내게 이러한 재난이 닥치지 않은 것이, 이런 재해의 땅에서 태어나지 않은 것이 감사했고 다행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트라우마

태평양 일대에서 1년에 평균 30여 개의 태풍이 발생하지만 대부분은 베트남과 중국, 일본과 우리나라로 향하고, 그 중에 아라우 부대가 파병된 필리핀 레이테주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태풍은 3~4개에 불과하다. 2013년 11월 8일 '하이옌' 태풍 당시 필리핀 기상청은 방송매체와 관공서를 통해 7m 정도의 태풍해일을 동반한 슈퍼태풍이 접근하고 있다고 전파했으나, 대부분의 주민들은 일반태풍과 같은 수준으로 생각했다. 지자체 역시 위험성을 간과하여 충분한 대비를 하지 못하였으므로, 많은 인명사고 등 심각한 피해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엄청난 태풍 피해를 겪은 현지인들은 하이옌 태풍의 트라우마로 뉴스에서 태풍이 온다고 하면 태풍의 진로와 세기와 무관하게 무조건 마닐라, 세부 등으로 대피하는 현상이 생겼다. 모든 학교들이 수업을 일찍 마쳤고 아라우 부대에서 일하는 통역사와 작업인부들도 가족들이 불안해한다면서 일찍 집으로 귀가했다. 심지어 한 학교장은 야간 12시경에 나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바람이 많이 부는데 마을 사람들이 대피하게 한국군이 차량을 지원해 주세요"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우리가 파병 중이었던 2014년 7월 15일에 9호 태풍 '라마' (태국, 천등의 신)가 필리핀 지역을 통과한다는 예보가 있은 후에, 슈퍼태풍 하이옌은 최대풍속이 105m/s 인데 반해 라마는 35m/s에 불과하였지만, 타클로반 일대의 많은 주민들이 마닐라 지역으로 대피를 하느라 태풍 2일 전부터 마닐라행 비행기표가 전부 매진이 됐다. 지역을 떠나지 못하는 주민들은 내륙으로 이동하였고 해안가에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작전지역의 주지사와 시장들은 대피하지 않고 그대로 있었지만 교육청장, 기술교육원장 등 일부 행정기관 장들은 회의에 참석한다는 핑계로 마닐라로 피신했다. 그러나 태풍은 진로를 바꿔 오히려 레이테주 250km 북쪽인 사마르주와 마닐라를 관통하여 대만 방향으로 이동했다. 따라서 대피 지역인 마닐라가 오히려 물에 잠겨 많은 피해를 당하게 되어 이곳에서 마닐라로 피신한 사람들이 마닐라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었다.

▲ 악취로 코를 막고 대피하는 주민   

 하이옌 태풍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또 가족이 죽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기 때문에 주민들은 태풍에 대한 공포감이 컸다. 해안가에 살고 있는 주정부 농업담당관은 자녀들과 같이 해일에 딸려 가지않기 위해 나무에 매달려 있다가 힘이 빠져 바닷물에 휩쓸려 가는 자녀들을 지켜봐야 했으므로 항상 죄책감에 빠져 있었으며, 이를 잊기위하여 고아들 10명을 자기 집에 모아 함께 살고 있었다. 그녀는“태풍과 해일에 대한 공포와 불안감 때문에 바람만 세게 불어도 가슴이떨리고 바닷물을 보면 겁이 나며 바닷물이 나를 덮치는 망상에 시달립니다.”라고 고통을 호소했다. 어떤 주민은“기회만 되면 가족을 죽인 이 땅을 떠나고 싶다” 라는 말을 하였다. 우리 앞에서 애써 밝은 표정을 지으려고 노력하였지만 엄청난 슬픔이 가슴속에 내재되어 있어 가족 얘기만 나오면 눈물을 흘렸고, 태풍 얘기만 나오면 겁을 먹고 긴장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이렇게 태풍이후 많은 주민들이 자살하고 트라우마를 겪고 있으며, 집단 무기력증에 빠져 있다고 UN 등 여러 기관들의 보고서에 언급되었고 이들을 심리적으로 치료할 필요성이 제기되었지만, 당장 피해복구가 급하기 때문에 정부차원에서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이에 한국의 국제기아대책본부에서 주민들의 트라우마 극복을 위한 심리치료학교를 운용하려고 우리에게 교육장소와 교통편 제공을 요청해서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 페허속에 뭔가 찾고 있는 아이  

 필리핀의 전문 심리치료사들로 구성된 팀이 보건소 직원들과 교사들을 대상으로 심리치료 방법을 교육했으며, 이렇게 1주일간의 전문교육을 받은 인원들은 돌아가서 주민들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치료를 하여 좋은 성과가 있었다. "사람이 아무리 좋은 일이 있어도 기쁨이 3개월이 가지 못하고 아무리 슬프고 괴로운 일이 있어도 3개월이 지나면 살만 하다”라고 한다.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는 주민들이 빨리 슬픔을 극복하고 트라우마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의 희망을 가졌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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