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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 이전의 동북아 국가의 기록 : 배달국

한민족 DNA를 찾아서(22회)

  • 기사입력 2021.10.16 02:32
  • 기자명 김석동
▲ 필자 김석동 

한민족은 배달민족이라 불린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이 편찬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보면 배달은 우리 민족을 지칭하는 용어로 그 연원은 확실하지 않으나 조선 숙종 때 북애가 지은 《규원사화》에서 단군檀君은 ‘박달나라의 임금檀國之君’을 말하며 우리말에 ‘단檀’을 ‘박달’, 혹은 ‘백달’이라 한 데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한다. 또 일각에서는 배달은 밝다는 뜻인 ‘배(밝)’와 땅을 의미하는 ‘달’을 합친 말로 동쪽으로 향해 간 것을 의미한다고 하기도 한다.

그동안 우리 역사에서 BC 24세기에 건국했다는 고조선을 신화로 취급하고 있으나 고조선 이전에 존재했던 한민족 국가에 대한 기록들이 엄연히 우리 사서에 남아있다. 배달국의 존재를 나타내는 ‘배달-신시(도읍지)-환웅(임금)-청구(국명 또는 지명)’ 등에 대한 기록은 일연(1206~1289년)의 《삼국유사》, 권람(1416~1465년)의 《응제시주》, 유희령(1480~1552년)의 《표제음주동국사략》, 홍언필(1530년)의 《신증동국여지승람》, 권문해(1534~1591년)의 《대동운부근옥》, 허목(1595~1682년)의 《기언》,남구만(1629~1711년)의 《약천집》, 홍만종(1643~1725년)의 《해동이적》, 유광익(1713~1780년)의 《풍암집화》, 이종휘(1731~1797년)의 《동사》, 홍경모(1774~1851년)의 《관암전서》, 안정복(1778년)의 《동사강목》, 이복휴의 《해동악부》 등이 있다.

앞서 소개한 위서 논쟁이 있는 《환단고기》의 《삼성기 상·하》, 《태백일사》와 《규원사화》에는 좀 더 상세한 기록들이 있다. 《삼성기 상》은 “환웅 씨가 그 뒤를 이어 일어나서 하느님의 명을 받들어 백산과 흑수 사이에 내려와 천평에 자정과 여정을 파고 청구에 정지를 만들었다. 천부인을 가지고 다섯 가지 일을 주관하였으며 세상이 하늘의 이치에 맞도록 교화되어 사람을 널리 유익하게 하였다. 도읍을 신시에 세우고 나라 이름을 배달이라 하였다”고 기록하고 《삼성기 하》는 “이때 환웅이 무리 3천을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 신단수 아래에 내려왔다. 이곳을 신시라 하며 이분을 환웅천왕이라 한다. 풍백·우사·운사를 시켜 곡식과 임금의 명과 형벌과 질병과 선악 등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맡아 다스리게 하여 세상을 이치에 맞도록 교화하여 인간을 널리 유익하게 하였다”, “배달은 환웅이 하늘을 열면서 있은 호칭이다. 도읍한 곳은 신시이며 뒤에 청구로 옮겨 18세를 이어 전하였다. 역년은 1565년이다”라고 한다.

《삼성기 하》는 18세에 걸친 임금(환웅)의 이름과 역년도 소개하고 있다. 《태백일사》는 《진역유기》, 《삼성밀기》, 《삼한비기》, 《조대기》 등 고대 사서와 중국 사서를 인용했음을 밝히면서 배달국의 역사를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첫 임금인 환웅천황의 건국기, 태고문자의 시작, 치우천황의 탁록대전 등을 기록하고 배달국의 시작인 신시의 개천으로부터 18세를 이어 1565년이 지나 고조선을 건국한 단군왕검이 일어났다고 한다. 《삼성기 상·하》와 《태백일사》 등의 기록은 고조선 건국 이전에 배달국이 존재했고 다수의 임금이 대를 이었으며 도읍지가 처음에 신시에서 청구로 옮겼다고 하는 고대 국가의 존재를 설명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중국 랴오닝성과 내몽골 자치구 일대에서 발견된 고조선 이전 문화인 홍산문명은 이 일대에 존재했던 고대 문명과 고대 국가에 대해 엄청난 역사적 사실을 증거하고 있어 주목을 끌고 있다. 홍산문화에 대해서는 후에 다시 기술하겠다.

한편, 배달국 기록과 관련해서 ‘치우천황’을 빼놓을 수 없다. 치우천황은 고조선 건국 이전에 동북아에 존재했던 나라의 통치자로 알려져 있다. 치우천황에 대해서는 중국 사서에도 기록들이 있다. 한나라 무제 시대의 사관 사마천(BC 145~BC 86)은 중국 역사 25사의 첫 시작인 《사기》의 <오제본기>에서 “치우가 반란을 일으키고 황제의 명을 따르지 않자 황제가 제후들의 군사를 징발하여 탁록의 들판에서 치우를 사로잡아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유명한 ‘탁록대전’에 대한 내용인데 치우천황과 전쟁했다는 황제 헌원은 중국 신화에서 삼황三皇에 이어 중국을 다스렸다는 오제五帝의 첫 번째 왕이다. 이 외에도 중국 사서에 치우에 대한 많은 기록이 있다. 《사기》를 비롯한 《관자》, 《태평어람》, 《산해경》, 《후한서》 등에서는 ‘치우의 형제가 81명이며 몸은 짐승이나 사람 말을 하였다’, ‘구리머리와 쇠로 된 이마를 가졌다’, ‘모래와 돌을 먹었다’, ‘칼·창·큰 활 등 병장기를 만들었다’, ‘쇠를 제련하여 창등 무기를 만들었다’는 전해오는 이야기와 치우 무덤의 존재 위치, 제사 관례를 기록함으로써 치우가 실존 인물이며 철제무기로 무장한 군대를 이끌고 중국과 전쟁을 한 이민족 국가의 통치자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삼성기 하》는 18대 환웅 중 14번째 환웅인 치우천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또 몇 대를 지나 자오지환웅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신령스러운 용맹이 있어 크게 뛰어났다. 구리 머리에 쇠 이마를 하고 큰 안개를 일으켰으며 구야를 만들어 광석을 캐고 쇠를 녹여 병기를 마들었다. 이에 천하가 크게 두려워하였다. 세상에서는 이를 치우천황이라고 한다. 치우는 천둥치고 큰 비가 내려 산하를 바꾸어 놓는다는 뜻이다. 치우천황이 염제신농이 쇠해 가는 것을 보고 큰 뜻을 품고 자주 서쪽으로 군사를 일으켰다.

▲ 배달국의 추정 위치  

또 색도로부터 군사를 진격시켜 회대 사이의 땅을 점령하였다. 헌후가 일어나자 즉시 탁록들로 나아가 헌원을 사로잡아 신하로 삼았다. 뒤에 오장군을 서쪽에 보내어 고신을 쳐서 공을 세우게 하였다. 이때 천하는 셋으로 대치하고 있었다. 탁록의 북쪽에는 대요가 있고 동쪽에는 창힐이 있고 서쪽에는 헌원이 있었다. 서로는 자기의 병력을 가지고 오로지 이기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처음에 헌원이 치우보다 늦게 참전했기 때문에 싸울 때마다 불리하여 대요에 의지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또 창힐에 의지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다음은 《태백일사》에서 밝히는 황제 헌원과의 탁록대전의 내용으로, 중국 사서 내용과 전쟁 결과가 다르다. “천황은 먼저 항복한 장수 소호를 시켜 탁록을 포위하게 하여 멸망시켰으나 헌원은 그래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고자 하였다. 천황은 구군에 동원령을 내려 네 길로 나누어 진격하게 하고 스스로 보병과 기병 3천을 거느리고 곧장 헌원과 탁록 유웅들에서 계속 싸웠다. 이때 군사를 풀어 사방으로 조여 들어가게 하여 베어 죽이기를 수없이 하였다. 또 큰 안개를 일으켜 지척을 분간할 수 없게 하고 싸움을 독려하였다. 적군은 두려움에 손을 떨며 목숨을 걸고 도망쳤다. 100리 사이에는 적의 병마를 볼 수 없었다.”, “치우천황이 군대의 진용을 정비하여 사면으로 진격한지 10년 동안 헌원과 싸운 것이 73회나 되었다. 그런데도 장수들은 피로한 기색이 없었고 군사들은 뒤로 물러설 줄 몰랐다. 뒤에 헌원은 여러 차례 싸워 천황에게 패하고도 더욱 군사를 크게 일으켰다. 심지어 우리 신시를 본받아 새로운 무기와 갑옷을 만들고 또 지남거를 만들어 백번이나 싸움을 걸어왔다. 이에 천황은 불같이 노하여 형제와 종친에게 싸움 준비에 힘쓰도록 하고 위세를 떨쳐 헌원의 군사가 감히 싸울 뜻을 갖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한 판 크게 싸워 한 개의 진을 여지없이 무찌른 뒤에야 싸움을 그쳤다. 이 싸움에서 우리 장수 치우비가 공을 급히 세우려 

하다가 불행히 진중에서 죽었다.

《사기》에서 치우를 사로잡아 죽였다는 것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규원사화》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있다. “이때 헌원이란 사람이 유망이 패하여 달아나고 치우씨가 제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대신 임금이 되고자 했다. 헌원은 군사를 일으켜 치우씨에게 도전했다. 치우씨는 탁록들에서 헌원을 맞아 크게 싸웠다. 이때 군사를 풀어 사방을 치니 죽은 자가 헤아릴 수 없었다. 또 큰 안개를 일으켜 적군의 마음이 흐려지고 손이 떨려 급히 달아나 겨우 목숨을 건졌다.”

▲ 치우상이 들어있는 귀면와鬼面瓦(신라 시대)

치우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사기》 등에서 ‘구려九黎의 임금’, ‘구려임금의 호칭은 치우’라고 하고 있다. 즉 중국과 전쟁한 이민족 국가의 통치자로 인식하고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성수 명예교수는 고조선의 역대 단군이 치우를 만고의 무신武神으로 우러러 제사를 지냈고 중국조차 산둥성 궐향성에 있는 치우의 능에서 매년 제사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한다. 

그는 또 귀면와의 도깨비상 주인공은 치우상이며 한국인이 국난이 있을 때마다 우러러 숭상하던 한국인의 장군상이자 병신兵神이라 한다. 치우천황은 탁록대전이 기원전 2600년경의 사건이기 때문에 실존했

다면 고조선 이전 인물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탁록대전에 관한 역사 기록은 고조선 이전에 동북아에 국가가 존재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고조선조차 신화로 치부해 버리는 우리의 기존 역사 인식의 틀에서는 배달국을 실존 역사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 것이다.

▲ 중화삼조당: 치우, 황제, 염제상(좌로부터)  

그러나 중국은 달라진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동안 역사 시대를 기록이 남아있는 주나라 시대인 기원전 9세기경으로 보다가 동북공정을 시작하면서 ‘하상주단대공정夏商周斷代工程’을 통해 이제는 하나라의 시작을 기원전 2070년으로 설정했고 치우와 황제가 전쟁을 벌인 탁록대전을 기원전 2600년 전에 있었던 역사적 사실로 인정했다. 1995년 베이징 인근 탁록현에 귀근원歸根苑이라는 절을 세우고 중화삼조당中華三祖堂이라는 사당을 지었다. 이 사당에는 치우, 황제, 염제의 상이 나란히 앉아 있다.

원래 중국인들은 염제, 황제를 자기들의 조상으로 하여 ‘염·황 후예’라고 해왔다. 중국 하남성 정주시에는 2007년 20년이라는 대역사 끝에 염황 이제二帝의 조각상이 세워진 바도 있다. 그러나 역사 공정의 진행 과정에서 동이족의 왕이자 한민족의 조상인 치우천황을 염제, 황제와 함께 중화 문화의 공동 시조로 영입해 버렸다. 우리가 기원전 24세기에 존재했던 고조선을 신화로 인식하고 있는 사이에 고조선 이전 배달국 시대에 활약했던 동이족 지도자를 중국인의 조상으로 둔갑시켜 버린 것이다. 물론 이러한 역사 공정의 배경은 황하 문명 등 중국이 주장해온 그들의 고대 문명보다 훨씬 앞선 시기에 꽃피웠던 홍산문화의 유적이 내몽골, 랴오닝성 일대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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