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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주민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한 시설물 홍성 홍주읍성[1]

문화재 : 홍주 홍주읍성(사적 제231호)
소재지 :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 오관리 200-2

  • 기사입력 2021.10.21 22:44
  • 기자명 정진해 기자
▲ 홍주 읍성 

홍주읍성은 현재 완전한 성이 아니다. 반쪽만 남아 있는 성으로 성내에는 군청을 비롯하여 샘터, 감옥, 성문, 홍화문, 안회당, 여하정, 수구지, 조양문 등과 성밖에 목빙고가 남아 있다. 홍성의 홍주읍성은 전체의 성체 길이가 1,772m로 이르지만, 현재는 약 810m 석성 일부가 남아 있다. 이 성이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세종실록지리지>의 기록에 의하면. 홍주성의 둘레가 533보 2척이고, 여름과 겨울에도 마르지 않는 샘이 하나가 있다는 것이 전부이다.

▲ 홍주읍성 홍화문   

읍성이라고 하면 적군으로부터 지역주민들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한 시설물이다. 삼국시대에는 어떠한 형태와 지형 조건에 의하여 축조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통일신라 때 9주와 5소경이 지방의 큰 도회지였고, 여기에 신문왕 때 읍성이 축조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고려 시대에 와서는 주요 지방 도시에 토축의 읍성이 축조되었고, 조선 시대 세종 때부터 바다가 가까운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의 해안지방에 읍성들이 축성되거나 개축되었다. 이때 성의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성문 밖으로 옹성을 만들고, 치성을 쌓고 해자 시설을 했다.

조선 초기에는 지방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읍성은 새로운 규식에 맞추어 고쳐 쌓았다. 홍주읍성도 문종 1년(1451)에 새로 고쳐 쌓았는데 원래의 크기에 비해 줄여서 둘레가 4,856척이고 높이는 11척이며, 높이 2척의 여장이 608개이다. 적대 24곳 중, 문 4곳 중 1곳에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성문 앞에 옹성을 두지 않았다. 성안에는 우물 2곳이 있었고, 성 밖에는 해자를 파지 않았다.

▲ 홍주읍성 홍화문  

조선 현종 때 한계수가 다시 수리하고, 순조 24년(1824)에는 진장 김계묵과 홍주목사 이현규가 수리하였다. 1870년(고종 7)에는 홍주목사 한응필이 동문을 조양문 서문을 경의문(景義門) 북문을 망화문(望華門) 등 3곳의 성문과 함께 관영을 지었고 성문의 휘호한 문액을 흥선대원군으로부터 받았다. 읍성의 존속은 조선 시대 마지막까지 존속되었으나, 1910년 일본에 의해 읍성철거령이 내려져 대부분의 읍성이 흘렸는데 홍주읍성도 빼놓지 않았다.

▲ 홍주읍성 우물 

성 내의 두 곳 우물 중 동쪽에 위치한 우물터는 조선 성종 12년(1481)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우물 중의 한 곳으로 추정하며, 1872년에 제작된 <홍주 지도>에 확인되는 우물이다. 이 우물은 옛 홍성지원과 홍성지청이 월산리로 이전한 후에 폐공 되었다가, 2012년 홍주읍성 내 역사공원으로 조성하면 지금의 모습으로 갖추게 되었다. 장대석으로 '井'으로 3단을 쌓고 석두꺼비 입을 통해 나오는 물을 모은다. 이 물은 현재 음수로도 적합하다는 판정으로 공원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음용수로 이용된다.

▲ 베드로 동사 장면과 교수형 등판 

우물 앞에는 '원시장 베드로 동사 장면과 교수형'이라는 동판이 전시되고 있다. 홍주읍성 전체가 순교 현장이다. 군청, 객사, 동헌 등 구석구석이 처형지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모두 사라지고 지금은 그 현장을 지켜왔던 아름드리 느티나무와 상수리나무가 현장을 지키고 있다. 읍성은 최영 장군, 만해 한용운 선사, 백야 김좌진 장군, 사육신 성삼문 등이 발자취를 남겼고, 1905년 을사 보호 조약에 의분을 참지 못한 의병들의 순국한 충절의 고장이기도 하다.

동판 뒤에는 토석담으로 둘린 감옥 한 채가 있다. 판문을 열면 정면 3칸, 측면 2칸의 우진각지붕의 옥사가 자리하고 있다. 마당에는 고문하는 형틀이 두 개가 놓여 있다. 이 옥사는 고종 9년(1872)에 제작된 지도에 의하면, 홍주읍성 내 원형 담장 안에 1개 동의 옥사가 있었음이 확인된다. 감옥을 주관하던 홍주 재판소는 1895년에 설치되었는데, 1913년 홍주 재판소와 검사국이 옮겨가면서 감옥도 철거되었다가, 2012년 당시의 자리에 복원되었다.

이 감옥은 순교 터이기도 하다. "저를 위해 온몸에 매를 맞고, 제 구원을 위해 가시관을 쓰신 예수, 이제는 제가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얼고 있는 이 몸을 바칩니다." 이곳에서 순교한 충청도 최초의 순교자 원시장 베드로의 마지막 신앙고백 장소이다. 3개월에 걸친 모진 고문에도 죽지 않자 얼려 죽였다. 이곳 감옥은 천주교 박해 기간 동안 순교자 212명 중 113명으로 최고 많은 순교자가 있었던 곳이다. 지금은 있을 수 없는 감옥으로 교육장으로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홍주 감옥에서 성 밖으로 나서면 네모난 돌로 쌓은 성벽은 아래쪽 반은 큰 돌을 쌓았고 위쪽 반은 작은 돌로 쌓았다. 여러 차례 보수를 통해 확장하였는데, 조선 고종 7년(1870)에 개축하면서 홍주목사 한응필이 자신의 연금 3천 냥과 원납금, 지세 부과금으로 토성에서 석성으로 개축하여 1,830척에 560척을 증보하여 축성하면서 650개의 성첩과 3개의 치성, 2개의 곡성, 4곳의 우물과 연못을 신설한 다음 동서에 수문을 두어 서문천의 물을 끓어 동편 수문을 거쳐 남문천과 금마천으로 흐르게 하였다. 동·서·북에 문을 세우고 남문은 문루가 없는 홍예문으로 했다.

치성에는 누각을 두지 않았으며, 성벽 곳곳에 사찰에서 사용되었던 석재를 이용하여 쌓은 곳이 있다. 남쪽의 성은 조양문에서부터 점점 높아져 홍화문에서 절정에 달한다. 홍화문은 현문식 문루를 두었으며, 아래 바닥부터 나무 기둥이 올라가 누각으로 이어진다. 성문 안쪽에는 사각의 마름모 형태를 한 장초석을 두고 그 위에 원기둥을 올려 홍화문루를 지탱하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의 누각은 2007~2009년까지 발굴조사를 통해 지금의 규모의 문루가 있는 성문이 확인되어 2013년에 복원하여 '홍화문'이라 부르게 되었다.

▲ 홍주성 수성 기적비

홍화문 내로 들어서면 좌측에는 5기의 비가 세워져있다. 이 비석 중에 홍주성 수성비(충남 문화재자료 제166호)는 순조 24년(1824) 황폐해진 홍주읍성을 보수하여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이다. 원래 이 비는 조양문 앞에 있었는데,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비문에는 성의 축조과정과 성벽이 허물어진 것을 순조 23년(1823) 봄에 부임한 진장 김계묵과 목사 이헌규가 수리하기로 하고, 8월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11월에 마쳤다. 완성된 성의 규모는 7리이고 일을 한 날은 100일이었다. 라는 내용이 기록되었다. 비의 뒷면에는 성 쌓기 작업을 주도하고 감독한 사람들의 직책과 이름이 있어 당시 사회상을 파악할 수 있다.  이 외의 비석은 목사, 현감, 관찰사 등의 치적을 기념하기 위한 선정비, 영세불망비, 청덕선정비 등이다.

비석 뒤쪽에는 십여 그루의 노송이 자리한다. 이곳은 의병공원이라 불리고 있는 송림이라 부르는 곳이다. 풍수상 홍주성의 남쪽으로부터 나쁜 기운이 들어오기 때문에 이것을 막고자 소나무 숲을 조성하였다. 소나무가 자라면서 이곳이 홍수성의 아름다운 풍경이 만들어지자 송림의 가장 높은 곳에 정자를 세워 '송정'이라 하였다. 일제는 1922년에 송정을 철거하고 이곳에 신명신사를 세워 홍성군민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했었다. 1945년 해방이 되면서 홍성군민들은 이 신명신사를 철거하고 ‘백야 김좌진 장군 추념비’를 세웠다. 이후 추념비는 갈산면 행산리 김좌진 장군 생가지 뒤편 백야 공원으로 이전되었다.

소나무 숲에는 1906년 병오항일의병이 일어났을 당시 홍주성을 탈환하여 지키고 있던 의병을 공격하다 관군과 일본군 일부가 죽었다. 이때 죽은 일본군을 위하여 1907년 김윤식이 시를 짓고 이완용이 글씨를 써서 이를 애도한다는 의미로 이곳에 ‘애도지비’를 세웠다. 해방되자 애도비를 철거하여 땅에 묻고 그 자리에 다시 ‘병오항일의병기념비’를 세웠다. 1978년 홍성에 진도 5.0의 지진이 일어났는데 그 진앙지가 이곳 홍주의병공원이라고 한다.

홍주성 내에는 지금의 석성이 있기 전의 토성의 흔적이 발굴과정에서 밝혀진 곳이 있다. 홍주성 역사관 바로 뒤쪽이다. 토성의 둘레가 약 500m로 추정하고 있다. 토성 동쪽에는 고목이 되어 줄기에 구멍이 뚫혀 있는 상수리나무가 자리하고, 바로 옆에는 옛 절터에서 가져온 석물이 전시되고 있다. 홍주성 주변에 있는 사찰이 조선 시대 억불숭유정책을 시행하면서 사찰건물 및 석탑 등을 허물어 홍주성 관아와 성벽을 쌓는 데 사용되고 남은 부재를 이곳에 모아 전시하고 있다.

사찰 부재 옆에는 비석이 줄지어 세워져 있다. 이 비는 홍화문 앞의 비와 연결되어 세워져 있다. 특히 1824년 성벽과 건물을 수리한 것이 기록된 '홍주성수성기적비'와 '목사유공의청백선정비'가 있다. '유의'는 정약용이 금정찰방으로 좌천되었을 때 홍주목사로 재직한 인물이다. 그의 검소함과 청렴결백함에 감탄해 정약용이 청백리의 표상으로 목민심서에 기록하였다.

▲홍주읍성 축성에 사용후 남은 사찰 부재

홍성군청 정문으로 사용하는 ‘홍주아문’은 홍주의 지방관(목사)이 근무하는 안희당의 바깥문이다. 고종 7년(1870)에 홍주읍성을 크게 수리할 때 같이 세운 건물이다. 홍주아문이라는 현판은 흥선대원군이 직접 쓴 것이었으나, 현재는 진본이 남아있지 않고 있다. 정면 5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의 건물이다. 중앙 솟을 문은 앞쪽에 장초석을 놓고 그 위에 원형 기둥을 올렸고 좌우의 2칸은 사다리꼴 초석을 놓고 그 위에 원형 기둥을 세워 지붕을 올렸다. 우리나라 아문 중에서 가장 크고 특이한 형태를 지니며 조선 시대 관아의 구조와 형태를 살필 수 있는 자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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