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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영산 서북쪽 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천년고찰 '능가사'

문화재 :고흥 능가사 목조사천왕상.사적비
보물:고흥 능가사 동종.대웅전

  • 기사입력 2021.10.23 09:35
  • 기자명 문화재 전문기자 정진해
▲ 능가사 전경  

우리나라 남쪽 남해의 푸른 바다와 아름다운 다도해를 조망할 수 있는 팔영산이 있다. 팔영산은 팔령산, 팔형산, 팔봉산으로 불리어 오다가 지금은 팔영산이란 이름을 갖게 되었다. 그 이유는 세숫대야에 비친 여덟 봉우리를 보고 감탄한 중국의 위왕이 이 산을 찾으라는 명령을 내렸고, 신하들이 조선의 고흥 땅에서 이 산을 찾게 되었다고 한다.이때 부르던 산의 이름이 팔전산이라 하였는데 어느 순간 팔영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조선 고종 때 흥양읍지에 의하면 팔영산 정상부에 연이은 암봉에 유영봉, 군선봉, 성주봉, 천주봉, 별봉, 팔응봉, 일출봉 등의 이름이 있다고 전하나 정확한 위치가 전하지 않아 1998년 초 고흥군에서 새로운 이름으로 표지석을 세웠는데, 제1봉을 유영봉, 제2봉을 성주봉, 제3봉을 생황봉, 제4봉을 사자봉, 제5봉을 오로봉, 제6봉을 두류봉, 제7봉을 칠성봉, 제8봉을 적취봉이라 명명하였다.

고흥 능가사는 팔영봉 아래 자리 잡고 있다. 능가사는 송광사의 말사로 삼국시대 고구려 눌지왕 1년(417년)에 아도가 창건하면서 ‘보현사’라 하였다고 하나 확실한 사실은 아닌 듯하다. 보현사는 임진왜란 때 전소된 뒤 인조 22년(1644)에 중창하면서 ‘능가사’로 명칭을 바꿔 달았다. 그 후 몇 차례의 중수를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능가사 사천왕문 

사천왕문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규모 맞배지붕으로 좌우에 풍판을 달았다. 1995년 천왕문 해체 복원 시 발견된 상량문에 의하여 1666년에 건립된 후 1824년(순조 24)과 일제강점기인 1931년에 중건되었다. 이를 뒷받침할 자료는 ‘능가사 사적비’에 천왕문과 사천왕에 대한 시주자 명단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 능가사 목초사천왕문

사천왕문 내에는 목초사천왕상(전라남도 유형문화재)은 천왕문과 함께 같은 때에 제작되었다. 특이한 것은 대부분의 사천왕은 입상이나 능가사의 사천왕상은 의자에 걸터앉은 자세로 높이가 450cm에 이른다. 사천왕상의 머리에는 화려한 연화문이 그려진 원통 모양의 보관을 쓰고, 머리 양옆으로 보관에 달린 끈이 있다. 얼굴은 불법을 수호하기 위하여 험상궂은 표정을 하면서도 눈썹과 수염 등에서 해학적인 분위기가 느낀다. 천왕상은 갑옷을 입은 무사형으로 어깨 위쪽으로 한 가닥의 천의를 걸쳤다. 천상의 지물은 각기 다른 것으로 북방 다문천왕은 당(幢)을, 서방 광목천왕은 용과 보주를, 동방 지국천왕은 비파를, 남방 증장천왕은 칼을 들고 있다. 또한 동방 지국천왕 발 아래에는 동녀(童女)가 천왕의 왼쪽 다리를 받쳐 들고 있으며, 사천왕상의 배치한 방향이 다르다. 

사천왕문을 들어서면 정면 3칸, 측면 2칸의 누각 형태의 팔작지붕을 한 건물이 있다. 이 건물에 조선 시대 때 주조된 동종이 걸려 있다. 사찰의 하루는 범종 소리에서 시작된다고 하였다.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범종 소리가 경내로 울려 퍼지면 스님들은 잠자리에서 일어나 법당에서 아침 예불을 올리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기 때문이다. 사찰에서 소리를 내는 모든 용구의 일체를 범음구라 하고, 범종은 범음구중 하나로 ‘범(梵)’은 깨끗하다는 뜻을 담고 범종에는 ‘청정한 절에서 사용하는 종’이란 뜻이다.

▲ 능가사 동종  

능가사의 동종은 조선 시대의 종이다. 이 동종은 조선 후기 주종장 김애립이 1698년 숙종 때 만든 작품 가운데 마지막 현존 작품이자 최고의 역량을 발휘한 대표작으로 17세기를 대표하는 범종으로 평가된다. 종신에 새긴 제작 연대를 딴 정식 명칭은 ‘고흥 능가사 강희 37년명 동종(高興楞伽寺康熙三十七年銘銅鍾)’이다. 종신의 전체적인 외형은 여성의 통치마를 펼쳐 놓은 모양으로 상부는 좁고 아래로 가면서 점차 넓게 벌어진 형태이다. 김애립이 33년 앞서 만든 여수 흥국사 강희 4년명 동종과 유사하다.

동종의 구성은 용 모양 장식의 용뉴는 웅건한 표현과 단정하면서도 유려한 4구의 보살 부조상, 세부 문양의 정교함까지 범종의 완숙한 기량이 유감없이 발휘되었으며, 종신 한쪽에는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전패(殿牌)가 마련된 동종이다. 종신에 ‘康熙三十七年戊寅三月日 興陽八影山楞伽寺…’라는 명문이 있어 1698년(조선 숙종 24년)에 만들어진 범종임을 알 수 있다. 용뉴에서 하대까지의 높이는 154cm, 종구 입술 지름은 101.5cm이다. 

용뉴 위에는 용이 발을 치켜들고 여의주를 움켜잡고 있는 형상이다. 음관은 두지 않았으며 조그마한 운형 구멍이 이를 대신하고 있다. 쌍용은 양쪽으로 머리를 두고 웅크리고 있는 형상이다. 용의 머리는 머리를 바짝 낮추고 눈을 부릅떠 어딘가를 쳐다보는 형상이고 바람에 날쳐 치켜 올라가는 긴 수염, 꿈틀거리는 몸, 섬세한 비늘까지 역동적으로 묘사되었다. 반대편 용은 발을 뻗어 올려 뒤쪽 용의 다리를 잡고 있는 것까지 대칭된 형상이다. 뒤쪽의 용의 윗입술이 더 두껍고 더 뒤로 젖혀져 있는 있다 쌍용이 똑 같아 보이지 않다.

용의 머리가 닿아있는 천판은 이중의 연꽃무늬를 조각하였는데 상단은 16엽이고 하단은 활짝 피어있는 연꽃무늬이다. 천판 아래 두른 띠는 견대라 하며, 그 아래 상대에는 조선 시대 범종의 통상 형식대로 열두 자 범자를 돌렸으며 도 그 아래에는 두 줄로 테두리를 한 사이에 덩굴문을 새긴 장방형 유곽 네 개를 두었다. 덩굴은 줄기와 뿌리가 끊임없이 뻗어 나가면서 꽃과 열매를 맺기 때문에 연생을 의미한다. 유곽마다 아홉 개씩 유두를 뚜렷하게 조각하였는데 이것은 9단계로 이루어진 서방 아미타세계를 상징한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유두는 유곽과 함께 한국 범종만이 갖는 특징이다. 중국의 종은 유곽이나 유두가 조형되어 있지 않고, 일본의 종은 유곽문양대는 없고 유두는 100~140개에 이른다.

유곽과 유곽 사이마다 돋을 새김한 화려한 보관을 쓴 보살입상이 4곳에 있다. 부풀어 오른 대의 앞자락 주변으로 주름 같은 장식이 첨가된 것으로 봐서 제석과 범천을 묘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중 한 제석 앞에는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전패를 돋을새김하였다. 전패 안에는 ‘主上三殿下壽萬歲(주상전하수만세)’라는 명문을 새겨 임금, 왕비, 세자의 장수를 축원하였다. 

또 종신 중앙부에는 주역에서 나타나는 전양인 건에서 전음인 곤에 이르기까지의 팔괘를 양각으로 둘렀는데, 이는 조선 범종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점이라 할 수 있다. 팔괘 밑으로 종을 지어 만든 내력을 담은 명문대인 주종명이 음각의 명문이 있다. 오른쪽 맨 앞줄에 새긴 명운은 ‘康熙三十七年戊寅三月日 興陽八影山楞伽寺(강희 삼십칠 년 무인 삼월일 흥양 팔영산 능가사)’라고 밝힌 제작 연대가 새겨져 있으며, 왼쪽 시주자 명단의 둘째 줄에는 능가사에 주석하며 숱한 불상, 존상들을 남겼던 조각승 색난(色難)도 있다.

끝부분에는 법화경 구절 ‘願以此功德 普及於一切 我等與衆生 皆共成佛道(원이차공덕 보급어일체 아등여중생 개공성불도)’의 명문이 있는데, '원하옵건데 이 공덕을 가지고 널리 일체에 미치고 저희들과 더불어 온 중생이 다 함께 부처의 도를 이루게 하옵소서'라고 축원한 뒤 지옥을 두드려 깨는 주문, 파지옥진언(破地獄眞言)으로 맺었다 또한 능가사 창건주인 정현대사의 이름이 보인다. 맨 아래 하대(下帶)에는 두 줄 띠를 두르고 안에 꽃잎과 당초문을 아주 섬세하고 빼곡하게 새긴 당초문대를 돌렸다.

17세기 중엽부터 말까지 승장 사인비구(思印比丘)와 쌍벽을 이루며 사장계(私匠系)를 이끌어나갔던 김애립(金愛立)은 전라남도의 순천과 고흥, 그리고 경상남도의 진주, 고성 등과 같이 남해안에 인접한 지역을 중심으로 범종과 쇠북(金鼓), 발우(鉢盂)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활발한 제작 활동을 했던 인물이었다.현재까지 확인된 김애립의 작품 중에서 가장 마지막에 해당하는 것이 1698년의 명문을 지닌 고흥 능가사 종이다. 거의 그의 말년에 제작되었지만, 오히려 그 크기나 기술적 역량 면에서 가장 최고조에 달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 능가사 대웅전  

능가사의 정문격인 사천왕문이 가장 앞에 있고 가장 뒤에는 대웅전이 자리한다. 사찰영역은 비교적 평탄한 지형으로 건물은 남북의 종축 선상에 배치되어 있다. 건물의 공포는 외3출목, 내4출목, 다포계의 일반적 수법이지만 정면 머리 기둥의 안초공 수법과 건물 내외부에 연봉 등으로 화려하게 꾸몄다. 건물의 정면은 5칸, 측면은 3칸의 다포계 겹처마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막돌허튼층쌓기 한 단을 기단으로 하고 그 위에 덤벙 주초를 놓고, 배흘림이 있는 두리기둥을 세웠다. 주두가 창방과 용두를 지지하고 그 위에 다시 용의 형상을 조각하여 장식한 용두가 외삼출목과 내사출목의 공포를 받치고 있다.

살미첨차 앙서의 굽면은 완만한 곡면을 이루고 위로 올라갔으며, 첨차의 곡면도 약간 경사를 두고 비스듬히 다듬어있다. 어간은 4분합문으로 주간포가 3구 있으며, 협간은 2분합문으로 주간포가 2구, 툇간은 외여닫이문으로 주간포 1구가 있다. 내부에는 닫집이 4개의 고주에 결구되어 있으며, 넓은 공간을 4개의 대량과 4개의 고주가 받치고 있다. 내부 공포는 운공형으로 조식 되어 있는 살미첨차가 결구 되어 있으며, 맨 밑에는 용의 몸통 부분으로 받쳐지고 있다. 천장은 층단천장으로 된 우물천장이고 바닥은 우물마루이다. 창호는 빗살무늬를 하고 있다.

대웅전의 편액은 조선 말기~근대기에 활동하던 학자이자 서예가인 자는 평숙, 호는 염재 송대회의 글씨이다. 그는 1909년 잠시 '대한매일신보' 기자로 활동하였으나,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고향에 내려와 보성군 '사립보성학교'와 능주군 '사립육영학교', 순천군 송광사의 '사립보명학교' 등에서 한문을 가르쳤다. 문장과 서예에 두루 뛰어나 이 시기에 교류하였던 지역 고승과 문인들의 비문과 편액 등 수많은 유필이 영암 도갑사 · 순천 송광사 · 장성 백양사 · 구례 천은사 등 전남지역 유명 사찰에 보존되어 있다.

▲ 능가사 사적비  

경내 응진당 뒤쪽에 전라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사적비가 자리한다. 높이 360cm, 비신 높이 290cm, 너비 133cm의 규모로 방형에 가까운 자연석 대좌 위에 귀비와 비신, 이수를 갖춘 비석이다. 비명은 ‘조선국전라도흥양현팔영산능가사사적비명병서(朝鮮國全羅道興陽縣八影山楞伽寺事蹟碑銘幷序)’이며, 비신 전면 상단에는 전서체의 횡서로 ‘흥양팔영산능가사사적비(興陽八影山楞伽寺事蹟碑)’라고 써서 제액을 만들었다. 전면은 모두 19행으로 1행은 63자이고 행서체이며, 홍문관부제학오수채가 짓고, 사헌부대사헌 조명교가 전서와 비문을 썼다. 비의 건립은 1690년(숙종 16)에 건립하였다.

귀부의 형태는 용두화된 머리에 목이 짧고 입안에는 여의주를 물었다. 등 끝에는 8괘를 음각하였다. 이수의 하단에는 앙련과 운룡문, 화문 등이 조식 되어 있고 상단에는 용들이 어우러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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