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매 맞은 밥(?)

  • 기사입력 2021.11.07 19:05
  • 최종수정 2024.02.03 15:27
  • 기자명 김희재 작가
▲ 김희재(수필가,한국어 교육 전문가)   
▲ 김희재(수필가,한국어 교육 전문가)   

“이것도 매 맞은 밥이에요?” 나는 그게 무슨 소린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매 맞은 밥이라니? 

 교회에서 주관해 외국인들과 여행을 다녀왔다. 강원도 인제에 있는 ‘한국 DMZ 평화 생명 동산’에서 하룻밤 묵으면서 양구의 제4땅굴과 을지전망대, 냇강 체험 마을을 돌아오는 한국문화체험행사였다. 영어예배에 나오는 외국인들은 물론 대전에 있는 카이스트, 충남대, 한남대와 서울 감리교신학대학에 다니는 유학생도 초대하니 45인승 버스가 꽉 찼다. 아프리카 르완다를 비롯하여 인도, 파키스탄, 필리핀, 베트남, 캄보디아, 중국, 베네수엘라, 루마니아, 캐나다, 미국, 몽골 등 다양한 언어를 쓰는 피부색 다른 사람들이 한국인 봉사자와 함께 떠났다. 

  한국 DMZ 평화 생명 동산 인근의 풍경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아름답고 평화로워서 놀랐다. 사람의 발길이 멈춘 곳에서 다툼없이 공존하는 생태계의 질서가 경이로웠다. 

  협궤열차를 타고 제4땅굴 속으로 들어가기 전에 통역장교가 정중하게 영어로 브리핑을 해주었다. 외국 학생들이 진지하게 경청하며 깊은 관심을 보였다. 지구상에 하나 남은 분단국가의 접경에 와서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자못 궁금했다. 

  을지전망대는 텔레비전에서 보아 익숙한 곳이지만 나도 이번에야 처음 와 보았다. 사방이 유리로 되어 있는 전망대 안으로 들어가니 큰 강의실처럼 계단식 의자가 놓여있었다. 우리가 다 앉은 후에 훤칠하게 잘생긴 장교가 영어와 한국어로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맨눈으로 빤히 보이는 땅이 바로 북한이라는 말에 전후 베이비붐 세대인 나는 마음이 착잡해졌다. 

  한국 전쟁이 끝나갈 무렵, 북한에서는 지주(地主)들을 반동분자로 몰았다. 황해도가 고향인 아버지도 보위부에 끌려가서 모질게 매를 맞아 거의 죽음 직전까지 가셨다. 온 가족이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노력한 끝에 간신히 풀려났지만, 누구도 앞날을 장담할 수가 없었다. 당분간만 피해있을 요량으로 배를 타고 인천으로 오셨는데, 갑자기 휴전선이 막혔다. 오도 가도 못 하게 되었다. 졸지에 아버지 혼자 이산가족 신세가 되고 말았다. 

  다시 가정을 이루어 자식을 낳고 살면서도 아버지는 고향에 두고 온 홀어머니와 처자식을 한시도 잊지 못하셨다. 마음속 깊이 간직해 둔 ‘집에 돌아갈 봇짐’을 평생 풀지 않으셨다. 언제든 길만 열리면 달려갈 채비를 단단히 하고 사셨다. 하지만 끝내 돌아가지 못하셨다. 

  아버지가 인천에 있는 ‘황해도 도민묘지’로 가신 지도 35년이 훌쩍 넘었다. 아직껏 망향(望鄕)의 한을 풀지 못하고 계신 아버지를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하고 속울음이 울컥 넘어왔다. 

  냇강 체험 마을에서는 ‘떡메로 쳐서 인절미 만들기’와 ‘수수부꾸미 만들기’에 도전했다. 인절미를 만드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나무로 된 떡판에다 잘 쪄낸 뜨거운 찰밥을 쏟아놓고, 힘 좋은 외국 젊은이들과 입으로만 잘하는 한국 어른들이 돌아가며 떡메를 쳤다. 찰진 밥에 짝 달라붙은 떡메를 떼어내기가 생각보다 힘들었다. 장정들도 몇 번 치고는 힘들다고 고개를 저었다. 교대로 돌아가며 밥알이 전혀 보이지 않도록 짓이기느라 얼굴이 벌게졌다. 

  찰떡을 판에 넓적하게 펴서 뚝뚝 떼어주자 다들 즐거워했다. 각자 개성대로 모양을 만들어 콩고물에 굴려서 인절미를 완성했다. 아무 요령도 없이 죽을힘을 다해 만든 것이라 모두에게 더없이 귀한 의미가 되었다. 

  인절미를 마무리하는 사이, 나는 여학생 몇 명을 데리고 조리실로 갔다. 체험 마을 주인이 미리 준비해 놓은 수수익반죽을 떼어 동글납작하게 펴서 기름칠한 프라이팬에 올렸다. 양면이 다 익도록 뒤집어 준 후에, 그 위에다 팥소를 놓고 반으로 접어서 반달 모양을 만들었다. 다 된 시범용 수수부꾸미를 막 꺼내고 있을 때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직접 만든 인절미를 입안 가득 넣고 우물거리며 다들 어디서도 체험하지 못한 흥겨운 맛에 취해 있었다. 

  내가 하는 것을 본 여학생들이 각 테이블의 조장이 되었다. 피부색과 언어가 다른 청년들이 수수부꾸미로 대동단결하여 웃고 떠드는 모습이 흐뭇했다. 이번 여행으로 한국을 더 많이 이해하고 좋아하게 되었으면 좋겠다.

  수수부꾸미 만들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 얼굴이 예쁘장한 루마니아 남학생이 슬그머니 다가와 자기가 만든 것을 먹어 보라고 건넸다. 내가 한입 베어 물자 어깨를 으쓱하며 서툰 한국어로 이것도 매 맺은 밥이냐고 물었다.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평소엔 대충 단어만 나열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던 한국어 선생이 자꾸 되묻자 그는 머쓱한 표정으로 떡메질하는 시늉을 했다. 그제야 나는 그의 말뜻을 알아챘다. 방금 마당에서 인절미를 만들어 본 터라 ‘이것도 떡이에요?’(Is this a beaten rice, too?)라는 말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었다. 

  머리 좋은 외국 청년의 기발한 표현에 박수가 절로 나왔다. 내가 그의 말을 되뇌며 웃으니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따라 웃었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는 사람도 덩달아 큰소리로 같이 웃었다. 덕분에 한국문화체험행사는 큰 웃음으로 마무리되었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고향이 그리워서 울적했던 내 마음도 싹 다 풀렸다. 

  앞으로는 가끔 우스갯소리로 떡을 ‘매 맞은 밥’이라고 하는 것도 재밌겠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공정사회
경제정의
정치개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