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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고향 안양(安養)이 주는 삶의 기쁨

  • 기사입력 2021.11.17 12:10
  • 기자명 이석복

  

▲ 歡喜 이 석 복(수필가, 차세대미래전략연구원 이사장)  

나의 부모님의 본적(本籍)은 서울이다. 나는 경기도 일산(一山)에서 출생해 3살 때 해방과 함께 서울로 이사 온 후 8살 때 6.25 전쟁 바람에 충남 아산까지 피난 가서 1년 반을 지내고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그 후 서울에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하였으니 서울 사람이라고 분류된다.

그러나 서울에서도 원효로, 쌍림동, 충무로, 한남동, 남산동, 장충동으로 옮겨 다녔으니 학교 친구는 있지만 동네 친구가 별로 없어 내 마음을 잡아주는 동네가 없다.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태릉의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니 전국각지에서 올라온 동기생들과 지내면서 처음으로 출신지역, 고향이란 말들을 접하게 되었다.

나는 분명히 서울 출신이어서 고향 얘기들이 나오면 마땅히 고향이 서울이라고 해야 하겠지만 어쩐지 고향이 없는 것 같이 쓸쓸한 마음이 드는 것을 숨길 수 없었다. 고향의 아련히 떠오르는 맛이 어떤지도 모른다. 전역 후 마음을 붙일 만한 곳을 찾다가 내가 태어난 일산에 가봐도 내가 살던 집은 흔적도 없고, 서울에서 그래도 가장 오래 살았던 장충동의 아담한 단층집도 전혀 다른 모습의 다세대 주택으로 변모했으니 옛 모습은 눈을 씻고 봐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장교로 임관 후 위관시절 8년간 전남 광주, 강원 문혜리, 부산 수영, 부산 해운대, 경북 영천, 미국 텍사스주, 충남 성환, 서울 옥인동, 경기 전곡, 경기 연천, 전남 광주, 강원 지경리, 월남, 서울 필동 등 14번이나 근무지를 옮겨 다녔다. 이렇게 이사가 잣다보니 어느 동네에 정 붙일만한 여유가 있을 수 없었다. 결혼 후 전역 때까지 23년간 경남 진해로부터 시작하여 전국 전, 후방 지역과 미국 2회를 포함하여 경기 안양까지 18회나 근무지와 거주지를 옮겨 다녔다. 결혼 후에도 총각 때나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거주하고 있는 경기도 안양시 평촌의 아파트는 전역 2년 전인 1994년 2월에 입주한 후 28년 째 살고 있으니 내 일생에서 가장 오랜 기간 사는 곳이다.

나의 두 아들도 초등학교를 각각 7회, 6회 전학 했으니 어린 나이에 어려움이 많았을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짠하다. 한 예로 두 아들 공히 국어 성적이 떨어져서 고생하는 것을 보았을 때 국어의 기초를 익힐 초등학교, 중학교 때 미국에 각각 1년 씩 부모 따라 다녀온 것이 영향을 준 것이 틀림이 없는 것 같다. 결국 두 아들들도 고향이 없는 셈이니 부모로서 안쓰러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두 아들에게는 그래도 과천에서 중, 고등학교를 다녔고 인접한 안양 평촌에서 오래 안정적으로 살고있으니 추억 만들고 정붙이기에 나보다는 좀 나은 편이 아니겠나 생각한다.

  

우리 집 사람도 평촌 아파트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를 엎어지면 코 닿는 거리의 행정복지센터 등 하나, 둘씩 세어가더니 지금은 50 가지란다. 애들도 이사온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여러 가지 불편을 얘기하며 투덜대더니 10여년 살고부터는 정이 들었는지 불평이 없어지고 긍정적인 반응이 늘었다. 최근에 아파트의 창틀을 교체했더니 새집이 된 듯 아늑하다.

나는 주로 모든 활동을 서울에서 하기 때문에 평촌이 베드타운(Bed Town) 역할 밖에 하지 않았지만 대체로 별 불만은 없었다. 가끔 골프 운동을 할 때는 아파트 바로 곁에 입출구가 있는 서울 외곽순환도로를 이용하면 대부분 군(軍)에서 운영하는 골프장들에 접근성이 좋은 편이어서 내심 거주지로는 괜찮구나 생각할 정도였다.

그러다가 2013년 초 우연히 아파트 단지 내 가정병원 의사의 조언으로 근처 평촌 한림대 성심병원에서 전립선암을 발견하고부터는 거주지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평생 건강만은 별로 신경쓰지 않아도 문제없다고 했던 자신감은 만용(蠻勇)이었음이 들어났고 수술 후 부터는 건강관리에 많은 투자를 해야 했다. 우리 아파트와 맞닿은 곳에 해발 85미터의 나지막하지만 제법 숲이 우거진 갈산을 끼고 자유공원이 있어 둘레길(1,600미터, 1,000미터 등)과 곳곳의 체육시설들은 일주일에 3회 이상 적절한 운동을 하기에 안성맞춤 이었다.

비로소 거주지에 대한 고마운 마음과 함께 내가 이 지역사회를 위해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수소문한 끝에 나에게 어울리고 지역사회에도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으로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안양시협의회 자문의원으로 위촉을 받았다. 민주평통 의장인 박근혜 대통령으로부터 2013년 7월 1일 제16기 임기2년의 자문위원으로 위촉장을 받았고 안양시 협의회에서는 고문으로 임명장을 받았다. 한 달에 임원회의 1회, 전체회의 한 번으로 나의 주활동(안보관련 시민단체)에도 크게 부담을 주지 않는 수준이었다.

민주평통안양시협의회 구성요원은 110여 명으로서 경기도 의회의원, 안양시 의회의원, 지역 내 관변단체 및 시민단체와 각종업계를 대표하는 분들 이었다. 여성위원들도 30% 수준으로 상당한 숫자였고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활동에 참여하고 있었으며 청년위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안양시 협의회에서는 군 장성출신이 처음 오셨다며 다들 마음으로부터 환영해주는 분위기였다. 안양시 지역에는 30여 명의 예비역 장성들이 거주하고 있어 내가 시장에게 건의해서 시장이 예비역 장성 초청 간담회 및 만찬도 갖은바 있었지만 지역 봉사활동에는 낯설어 하는 눈치들이었다.

안양시 협의회에서는 수시로 안보관련 강연을 요청해서 우리나라의 안보 실태를 지역의 지도자들에게 소상히 알려 줄 수 있어서 나름 보람이 있었다. 한 번은 민주평통 중앙본부에서 지원한 강사(講師)의 강의가 있었는데 시종 농담 위주로 웃기다가 은근히 북한을 두둔하는 듯한 내용을 슬쩍 끼워 넣는 식으로 진행을 했다. 이런 자를 자문위원들이 선호하는 유명 강사라고 하는 것이었다. 내가 이런 엉터리 불량강사에 그냥 넘어갈 사람이 아니지 않는가?

몇 일후 중앙본부를 방문해서 책임자를 만나 그 불량강사를 조목조목 지적해서 퇴출시킨 사건도 있었다. 안양시 자문위원들이 나의 철저함에 놀래는 모습이었다. 이렇게 2년이 지난 후 안양시 협의회의 간곡한 요청으로 17기 자문위원을 2017년까지 2년 더 봉사하게 되었다. 이 기간 중 제주도에 협의회 단체여행을 1박2일 갔었을 때 건설시 말썽 많던 해군기지를 방문하여 영해수호의 실상과 한국형 이지스 구축함 체험기회를 주선하기도 했다. 또한 제주 4.3평화공원을 방문하기 전에 제주 4.3사태의 진실을 교육함으로써 현지의 안내자의 편향된 설명에서 우리나라 역사왜곡의 심각한 실상을 느끼게 해준 것도 기억에 남는다. 

안양시 자문위원들과 4년여간 교류하다보니 좋은 분들이 많았고 안양(安養)에 대한 애정도 더 깊어 진 것 같았다. 이후 월남참전전우회 안양지회에서도 옛 월남 전우들이 나를 몇 번 찾아와 고문으로 추대해서 봉사를 계속하고 있다. 이제는 안양의 유명한 볼거리와 먹거리를 가족과 함께 자주 찾기도 한다. 불교에서는 안양(安養)을 극락의 다른 이름이라 했던가. 대중가요에서 “타향도 정이 들면 정이 들면 고향이라고, 그 누가 말했던가 말을 했던가”라는 가사가 맞는 것 같다. 이제 팔순(八旬)의 나이에 새 고향으로 안양을 찾게 되었고 보람된 봉사를 통해 삶의 기쁨을 맛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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