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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전두환, 나만이 기억하는 인연

  • 기사입력 2021.11.30 20:29
  • 기자명 이석복
▲ 歡喜 이 석 복(수필가, 차세대미래전략연구원 이사장)   

대한민국 제11대, 제12대 전두환 대통령님께서 2021년 11월 23일 서거(逝去)하시므로 참으로 한(恨) 많은 세상을 떠나셨다. 전 대통령께서는 혼돈의 조국을 구하시고, 국가번영의 영웅이시지만 퇴임 후 33년간 갖은 부당한 정치적, 사법적 보복과 괴롭힘을 당하셨다. 문재인 정권은 금년 8월까지 90세의 혈액암 및 치매 환자인 노(老)대통령을 명예훼손 혐의로 재판을 한답시고 일부러 욕보이려고 서울 아닌 광주법정에 세우는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심지어 운명 하시자마자 대부분 언론이 마치 훈령을 받은 것처럼 “전두환 사망”이라고 어떤 필부(匹夫)가 별세 했을 때에도 쓰지 않는 하대(下待)일색이었다.

이런 집권세력들과 그들의 하수인 격인 언론의 모습은 과연 이 나라가 동방예의지국의 후예인가? 선진국 문턱에 서있는 국격(國格)을 갖춘 나라인가?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소위 보수세력이라는 야당의 비겁함도 차마 눈뜨고 보기가 힘겹다. 결국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장례는 가족장(家族葬)으로 하고 “북녘 땅이 바라다 보이는 전방의 고지에 백골로라도 남아 있으면서 기어이 통일의 그날을 맞고 싶다”는 유언을 남기고 애달프게 떠나셨다. 전두환 대통령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의 급서(急逝) 후 불어닥친 정치적, 안보적 혼란과 경제적 충격으로부터 조국을 안정과 번영으로 그리고 국가위상을 세계 만방에 크게 높이지 않았던가!

전두환 대통령의 업적을 나열하자면 한이 없지만 그 가운데 특히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가 박정희 대통령의 “한강의 기적”을 완성했다는 업적과 헌정사상 처음으로 정권을 평화적으로 후임에게 이양하는 선례(先例)를 구축했다는 것이다. 그는 오늘의 우리가 누리는 경제적 풍요와 자유 민주주의 체제의 기반을 닦아 놓으신 역사적 영웅이셨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무리하게 제정한 <5.18 특별법>에 의해 억지로 끌어낸 “12.12군사반란”과 “5.18학살의 수괴“라는 결론은 결코 올바른 역사적 평가라고 믿지 않는다.  “5.18학살 수괴”는 진압작전 지휘계통상에 1980년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있지도 않았고 지금까지도 모든 누명을 밝혀내지 못했다. 이런 판단은 정상적인 군사전문가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진실이다. 5.18 광주사태 이후 최규하 대통령이 8월경 전두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상임위원장에게 간곡히 요청하여 자의적으로 대통령직을 인계한 것을 이것이 후에는 강탈(强奪)한 것처럼 왜곡되었다. 이 사항에 대하여 최규하 대통령 자신이 아무런 해명없이 세상을 떠난 것이 한없이 안타깝다. 모든 누명(陋名)은 이로부터 발단이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이런 안타까운 상념에 젖어 고(故) 전두환 대통령을 회고하다보니 나만 기억하는 인연들이 스멀스멀 생각이 난다.

첫 번째 인연은 내가 중위 때인 1968년 1월 21일 북한군 특수부대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습격사건 때였다. 당시 육군방첩부대장인 윤필용 장군을 수행하여 30여명의 북한군 특수부대 침투조의 사체를 수집했던 경복궁 뒤뜰에서 밤새 북한 게릴라들을 일망타진한 수경사 30경비대대장 전두환 중령을 처음 보았다. 늠름한 모습이 부럽고 존경스러웠다.

두 번째 인연은 1970년 육군대위로서 월남파병 백마사단 작전장교일 때이다. 사단사령부와 한 울타리에 있었던 제9사단 제29연대장인 전두환 대령을 몇 번 볼 수 있었다. 사단장도 범접하기 쉽지 않은 칸호아 성장(월남 티우대통령 측근 현역대령)과 의형제를 맺어 마침 대민사고로 난감했던 문제를 거뜬히 해결하던 모습, 미군연락장교로서 미국 웨스트포인트(미육사)를 1년 먼저 졸업한 미 육군중령이 전두환 연대장을 하늘같이 모시던 모습, 연대급 작전에서 미공군 전투기, 미육군 무장헬기와 한국군 포병을 지원받으면서 통합전투력을 능수능란하게 발휘하는 작전지휘관의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세 번째 인연은 1979년 전두환 장군이 보안사령관으로 재직 시 육사총동창회장직을 맡았다. 마침 나의 동기생이 전방경계근무 시 문제로 군사법정에서 집행유예의 형을 받았다. 이 문제는 상급지휘관의 무리한 부대 운영에서 기인했던 문제로 판단하여 보안사령관에게 구명운동 차 내가 찾아갔었다. 결국 꾸지람을 듣고 물러나왔다. 명예와 원칙을 강조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네 번째 인연은 1986년 을지포커스연습(UFG) 때 한미연합사 전시지휘소(Tango Bunker)를 대통령으로서 순시하였을 때 일이다. 내가 한미연합사 작전참모부 연습과장으로 부사령관 지시에 따라 럭(Luck)사령관의 보고사항을 통역해 드렸었다. 특별히 나를 아는 척 하지 않으셨지만 만족해 하셨다.

다섯 번째 인연은 1988년 준장으로 미국 메릴랜드 대학원에서 안보전략을 연수 할 때 일이다. 전두환 대통령께서 퇴임 후 미국 워싱톤을 방문하셨을 때 주미무관의 요청으로 덜레스 공항에 영접단의 일원으로 나갔었다. 퇴임하신지 얼마 안 되셨는데 벌써 정치인들에게 괴롭힘을 당하시는 모습이 역력했다.

여섯 번째 인연은 한참 세월이 흘러 2010년쯤으로 기억한다. 나는 시민단체 활동을 하면서 5.18사태(5.18민주화운동)가 우리나라 지역과 이념 갈등의 주요 원인이라고 판단했었다. 따라서 광주사태의 진실 규명이 선행되어야 국민 간 갈등해소는 물론 국군의 명예와 광주시민의 명예를 회복하는 길이라고 믿고 최선을 다했다. 이러한 노력을 전두환 전 대통령께서 듣고 고마워하신다는 전언을 들었다. 보람있는 일을 한다는 자긍심이 일었다. 이상 몇 번의 전두환 전 대통령과의 인연은 군출신이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평범한 인연일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소중히 간직할 인연이었다.

고 전두환 대통령님! 벌써 모든 섭섭했던 것을 용서하셨겠지만 인간으로서 고뇌마저도 내려놓으셨을 줄 아옵니다. 훗날  역사가 반드시 바로잡을 것입니다. 극락왕생(極樂往生)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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