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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맨해튼에서 보다

  • 기사입력 2021.12.06 08:12
  • 최종수정 2024.02.03 15:25
  • 기자명 김희재 작가
▲ 김희재(수필가,한국어 교육 전문가)   

맨해튼 한복판, 뉴욕 공립도서관 옆 아담한 정원에 노천카페 같은 공간이 있다. 잔디밭 위에 철제로 된 테이블과 의자가 제법 많이 놓여있다. 큰길 모퉁이라 어디서든 잘 보인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손에 무언가를 들고 앉아 있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거나,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거나, 샌드위치를 먹거나, 이어폰을 끼고 태블릿PC에 무언가를 쓰고 있다. 다들 혼자인데 바쁘다. 나도 그들 속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는다. 노트와 볼펜을 꺼내 들고 떠오르는 생각을 메모하면서 거리를 구경한다.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서 도서관 벽을 등지고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남자는 나랑 마주 보고 있다. 뿔테 안경을 쓰고 검은색 비니를 푹 뒤집어썼다. 유대교 랍비처럼 수염을 길게 길렀고, 청바지를 입었다. 커다란 캐리어 위에 가방까지 얹어서 옆에 세워 놓았다. 내 눈엔 그가 큰맘 먹고 먼 나라에서 온 여행객으로 보였다. 그도 나처럼 맨해튼 한복판에서 혼자만의 자유시간을 누리는 중이라고 내 맘대로 생각했다. 뜬금없이, 낯선 곳에서 우연히 만난 남녀의 운명적인 사랑을 그린 영화의 첫 장면이 떠오른다. 너무 빠른 의식의 흐름에 당황스러우면서도, 살짝 재미있다. 

  11월 중순, 아직은 가을이 분명한데 그늘진 곳은 꽤 춥다. 점심시간이 되자 음식점에서 먹을 것을 사 들고 나와서 앉을 자리를 찾아 헤매는 사람이 많아졌다. 근처 브라이언 파크(Bryan Park)에도 자리가 없는 모양이다. 뉴요커(New Yorker)들이 팁을 아끼고 햇볕도 쐬려고 바깥에서 먹는다는 말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번듯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헐렁한 비닐봉지를 들고 다니는 모습은 왠지 조금 짠하다.  시티투어 버스가 연신 코앞으로 지나간다. 천천히 달리는 버스마다 사람들로 가득 찼다. 버스 꼭대기에 앉은 사람들이 나랑 눈이 마주치자 얼굴 가득 웃음을 담고 손을 흔들어 준다. 관광객인 내가 그들의 관광지가 된 셈이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상황인데, 은근히 즐겁다.

  실은 나도 며칠 전에 저 버스를 타보았다. 센트럴 파크에서 출발하여 자유의 여신상까지 갔다 오는 코스였다. 주요 명소는 물론 뒷골목까지 샅샅이 훑고 출발점으로 돌아왔다. 바깥 구경하기 좋은 이 층엔 의자만 덜렁 있었다. 지붕은 물론 유리창도 없으니 빌딩 숲 골바람이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추워서 눈만 빼꼼 내놓고는 미친 듯이 사진을 찍었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같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물과 잡지에서 보던 거리 풍경, 오가는 사람들 차림새 등 보이는 건 다 찍었다. 경치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아름답고, 매력적이었다.

  멀찍이 앉은 그 남자가 이젠 아예 대놓고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 수염 때문에 정확한 나이를 가늠하긴 힘들지만, 체형이나 앉음새로 봐서는 40대 같다. 그의 눈에 나는 몇 살이나 먹어 보일까? 이왕이면 내 나이보다 많이 어리게 보였으면 좋겠다. 그는 팔짱을 끼고 거리 구경하는 척하며 나를 살피고, 나는 고개를 숙이고 글을 쓰는 척하며 간간이 그를 훔쳐본다. 아무런 진전 없이 그저 썸만 타는 사람들처럼 우린 멀리 떨어져서 서로를 의식하고 있다. 

  해님이 지나가다 높은 빌딩에 걸려버렸다. 그 바람에 내 자리는 온기를 통째로 다 잃어버렸다. 으슬으슬 한기가 든다. 스쳐 가는 단상(斷想)을 메모하는 것도 싫증난다. 펜을 노트 사이에 끼워 놓고 어깨를 잔뜩 웅크린 채 지나가는 사람들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저만치에서 깡마른 청소부가 건성으로 빗자루질을 하고 있다. 가만 보니 길옆에 모아놓은 낙엽 더미를 따라가며 설렁설렁 쓰는 시늉만 한다. 누구 눈치를 보는지 연신 힐끔거린다. 마음은 딴 데 두고 몸만 와서 억지로 시간만 채우는 것 같아 조금 밉살스럽다.

  도서관 정문 앞에서는 관광객들이 빙 둘러서서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건물 안으로 사라지는 광경이 반복된다. 거의 똑같은 포즈로 사진을 찍고, 허그(hug)도 한다. 어떤 사람은 높은 건물을 올려다보느라 고개가 뒤로 확 꺾인다. 그러다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잰걸음으로 걸어간다. 여럿이 같이 있는 것 같은데, 실제로는 다들 혼자다.

  잠시 한눈파는 사이, 멀리 앉아 서로 관찰하던 그 남자가 사라져 버렸다. 약간 당황스럽고, 괜히 무안해졌다. 벌떡 일어나 약속에 늦은 사람처럼 부산하게 가방을 꾸렸다. 나는 오늘 내게 붙은 수식어를 다 떼어버리고, 한나절이나마 오롯이 내 마음이 이끄는 대로 따라 다녔다.아주 잠깐이지만, 상상력 풍부했던 시절로 돌아가기도 했다. ‘몸은 늙어도 마음은 늙지 않는다(身老 心不老)’는 말이 헛말은 아닌가 보다.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여전히 붐비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도서관 안으로 들어갔다. 급한 용무라도 있는 양 서둘렀지만, 안에 들어가도 할 일이 없다. 그저 아래 위층만 한 바퀴 휙 돌아보고 후딱 나왔다. 나를 따라 들어왔던 햇살이 어느 틈에 먼저 나가, 따스한 품을 열고 길모퉁이에서 기다리고 있다. 모르는 사람들 덕분에 온종일 혼자서도 심심하지 않았다. 눈이 시리게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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