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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깃든 시베리아 횡단열차 여행

연재 1회, 총 길이 9,288km의 세계 최장 철도
모진 수난을 겪은 연해주 동포들

  • 기사입력 2022.01.07 21:19
  • 기자명 이정식 작가

한국NGO신문은 임인년 새해를 맞아 코로나19 등으로 한동안 여행을 못하고 있는 독자들의 간접 체험과 문학적 소양을 위해 푸시킨,도스토엡스키,톨스토이,체호프 등 러시아 문학의 뿌리를 찾아가는 이정식의 <시베리아 문학기행>을 매주 금요일 저녁마다 한 차례 씩 연재하고자 한다. 

CBS 사장과 뉴스1 사장.부회장, 서울문화사 부회장을 지내는 등 언론인이자 작가인 이정식은 처음에는 시베리아를 여행하는 분들께 도움을 주기 위해 <시베리아 여행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는데 시베리아 여행이 단지 여행에 그치지 않고 문학적 상상력을 불러오지 않을 수 없어 러시아 문학 이야기로 발전했다고 한다. 특히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가는 여행은 잊을 수 없는 추억과 전설이 된다.

<시베리아 문학기행> 연재가 시베리아 여행과 러시아 문학에 관심 있는 한국NGO신문 독자님들에게 다소나마 힐링이 되고 도움이 되길 바란다. 그 첫회로 가벼운 마음으로 작가와 함께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올라 타 본다.(편집자주)  

 

낭 만 깃 든

        시 베 리 아 횡 단 열 차 여 행

◉ 총 길이 9,288km의 세계 최장 철도

시베리아 횡단열차 여행에는 여러 가지 근사한 수식어나 설명이 붙는다. “세계 모든 여행자들의 꿈인 시베리아 횡단열차”라든지, “지구의 크기를 직접 몸으로 느껴보려면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보라”라는 말 등이다. 어떤 이들은 “시베리아 횡단열차 여행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무한한 상상의 나래를 달아준다”고 말하는가 하면, 또 다른 이들은 “오랜 시간을 열차 안에 갇혀 있어야 하니 얼마나 지루할까”라며 미리 겁부터 내기도 한다.

100년도 더 전에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 인근 도시 치타까지 갔던 적이 있는 우리나라 현대 소설의 개척자 춘원 이광수(1892~1950)는 그 열차 여행을 소설 《유정》 속에서 주인공의 편지를 통해 이렇게 표현했다.

기쁨을 가진 사람이 지루해서 못 견딜 (시베리아의) 이 풍경은 나같이 수심 가진 사람에게는 공상의 말(馬)을 달리기에 가장 합당한 곳이오.소설 속의 주인공은 좋은 일로 시베리아에 가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했지만, 여행객이든 누구든 역시 ‘공상의 말을 달리기에 합당한 곳’이라는 말에는 공감이 갈 것으로 생각한다

▲시베리아 횡단열차 

한반도 북단에 인접한 러시아의 동쪽 관문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지 이어지는 시베리아 횡단 철도의 총 길이는 9,288km로 세계 최장이다. 양쪽 종착역을 두 번 왕복하면 지구를 한 바퀴(지구 둘레는 약 40,000km) 도는 셈이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지 횡단하려면 6박 7일이 소요된다. 누군가 “시베리아 횡단철도 여행은 지구 위에 남아 있는 최후의 모험”이라고 말했다지만, 위험한 모험은 결코 아니며 낭만이 깃든, 긴 사색의 시간이 주어지는 호젓한 여정이 그 안에 있다. 

◉ 항일운동의 근거지였던 블라디보스토크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출발하는 블라디보스토크는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동방을 지배하라’라는 뜻의 블라디보스토크는 러시아 동방 진출의 상징적인 도시다. 특히 블라디보스토크는 우리 민족에게 역사적으로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곳이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연해주 항일운동의 거점이었기 때문이다. 1909년, 안중근(1879~1910) 의사가 조선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기 위해 권총을 품에 넣고 열차에 몸을 실은 곳이 바로 이곳 블라디보스토크다. 이에 앞서 고종황제의 밀사 이준(1859~1907), 이상설(1870~1917) 선생이 1907년 6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이해 5월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몸을 실은 곳도 블라디보스토크다.

▲ 블라디보스토크 전경  

이준과 이상설은 헤이그에서 대한제국 초대 러시아 상주 공사였던 이범진(1852~1911)의 아들 이위종(1884~1924?)과 함께 일본의 조선 침략행위를 규탄하고 조선의 독립에 대한 지원을 호소하기 위해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려 노력했으나 일본의 방해와 강대국들의 외면으로 실패했다. 이에 이준은 분을 참지 못하고 연일 애통해하다가 이해 7월 헤이그에서 분사했다. 이상설은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와 동포들을 규합해 독립운동을 펼치다 1917년 망국의 한을 가슴에 안은 채 세상을 떠났다. 블라디보스토크 북쪽 우수리스크 수이푼 강변에는 이상설 선생 유허비가 서 있다. 선생의 재가 뿌려진 곳이 바로 이곳이다.

이범진은 한일강제합병 이듬해인 1911년 1월 고종황제와 러시아 니콜라이 2세 등에게 보내는 유서를 남기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자결했다. 자결에 앞서 이범진은 남은 유산을 연해주와 미주에 독립운동자금으로 보냈다.

러시아 여인과 결혼했던 아들 이위종은 이상설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항일투쟁을 함께 하다가 부친 자결 후 러시아제국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갔다. 그후 장교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후 러시아 내전 시에는 볼셰비키 군에 들어가 싸웠다는 것까지는 알려졌으나 1924년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리고 앞서 말한 것처럼 1914년, 불과 22세였던 청년 이광수가 러시아와 유럽을 거쳐 미국으로 가기 위해 상해(상하이)에서 배를 타고 와 기차로 출발한 곳도 블라디보스토크다.

안중근 의사의 혼이 숨 쉬는 곳 블라디보스토크는 안중근 의사의 혼이 살아 숨 쉬는 곳이다. 안 의사는 1909년 10월 조선 침략의 원흉인 초대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기 위해 우덕순 동지와 함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차에 올라 생애 최후의 여정을 시작했다. 1916년 이후의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노선은 지금과 같지만,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으로 떠날 때의 열차 노선은 지금과 달랐다.출발지는 그때도 블라디보스토크였으나 북쪽으로 112km 떨어진 우수리스크에서 중국 영토로 진입, 쑤이펀허, 하얼빈, 치치하얼, 만저우리 등 만주를 가로질러 시베리아의 치타로 들어가는, 말하자면 지름길 노선이었다. 당시 만주 지역의 철도는 러시아의 관할 하에 있었다.

▲ 블라디보스토크 혁명광장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후 체포되어 사형 집행을 기다리고 있을 때 여순감옥에서 쓴 자서전인《안응칠 역사》에서 당시 거사를 위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얼빈까지 가게 된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1909년 9월, 그때 나는 연추(크라스키노)에 머물고 있었는데, 하루는 마음이 울적하고 초조함을 이길 수 없어 스스로 진정하기 어려워 친구 몇 사람에게, “나는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려 하오” 하였더니 “왜 그러오? 아무런 기약도 없이 졸지에 왜 가려는 것이오?” 하므로 나는 “나도 그 까닭을 모르겠소. 도저히 이곳에 더 머물러 있을 생각이 없어 떠나려는 것이오” 하였다. “이제 가면 언제 오는 것이오?” 하므로, 나는 무심중에, “다시 안 돌아오겠소” 하자, 그들은 모두 이상하게 생각했고, 나도 역시 순간적으로 그런 대답을 했을 뿐이다. 서로 작별하고 보로실로프에 이르러 기선에 올라탔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니 이토 히로부미가 이곳에 올 것이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어 신문을 보았더니 하얼빈에 도착할 것이라는 것이 참말이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나는 남몰래 ‘소원하던 일을 이제야 이루게 되다니! 늙은 도둑이 내 손에서 끝나는구나!’ 하며 기뻐하였다.《안응칠 역사》

안중근 의사가 연추를 떠나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것은 1909년 10월 19일. 도착 직후 이토가 만주 방면을 시찰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안 의사는 이튿날 독립운동가 최재형(1860~1920) 선생이 사장으로 있던 동포 신문사 <대동공보사>에서 이토의 만주 시찰을 확인했다. 그러고는 우덕순 동지와 이토를 처단하기로 결의하고 다음 날인 21일 열차로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한다.

안 의사는 22일 하얼빈에 도착, 26일 오전 9시 15분 마침내 하얼빈 역에서열차에서 내려 사열 중이던 이토 히로부미를 권총으로 저격, 처단했다.

◉ 이광수가 본 100년 전 블라디보스토크 항과 신한촌

1937년 한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하기까지 연해주의 가장 큰 한인 마을이었던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지역에 지금 과거의 흔적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1999년 해외한민족연구소에서 세워놓은 ‘연해주 신한촌 기념탑’만이 이곳의 역사를 말해줄 뿐이다. 이 신한촌의 모습을 짧게나마 글로 남긴 이가 이광수다.

이광수는 1914년 1월 초순 상해에서 러시아 선박 포르타와호를 타고 일본 나가사키를 거쳐 3일 만에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해 신한촌으로 갔다. 당시 블라디보스토크 항구와 신한촌의 풍경을 이광수는 후일에 쓴 《그의 자서전》(1936)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내가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배를 내린 것은 해무가 자욱한 추운 아침이었다. 쇄빙선이 깨뜨려놓은 얼음 바다로 연해 붕붕 고동을 울리면서 까만 해무속으로 배가 들어가는 것은 심히 음침하였다. 어디 세상 끝에나 온 것 같았다.

 

부두에서 썰매를 탔다. 썰매에는 말을 네 필이나 달았다. 큰 말, 작은 말. 이름이 신한촌이라길래 어떠한 덴가 했더니 해삼위 시가를 다 지나 나가서 공동묘지도 다 지나가서 바윗돌에 굴 붙듯이 등성이에 다닥다닥 붙은 집들이 그것이었다. 이를테면 염라국 지나서다. 해삼위 시에서는 이 귀찮은 거린채들을 공동묘지 저쪽으로 한데 몰아서 격리를 시킨 것이었다(거린채라는 것은 꼬레이츠라는 아라사 말로 조선 사람이라는 말의 조선 사람 사투리다). 아이들과 청년들이 길바닥에서 얼음을 지치고 있다가 내 썰매가 오는 것을 보고는 욱 모여들었다. 그들은 거의내 앞길을 막았었다. 그러고는 매우 적개심 있는 눈으로 훑어보았다. 그중에 한 청년이 쓱 나서며, “웬 사람이야?” 하고 거의 반말지거리로 물었다. 여기는 모두 함경도의 육진 사투리다. 나는 공손하게 내가 상해에서 온다는 말을 하고 주인 들 집을 구한다는 말을 하였다.

“그 양복은 어디서 지어 입은 것이야?”

“모자가 일본 모잔데.”

“행리(여행가방)도 일본 것이고.”

“분명 조선 사람인가.”

청년들은 내가 들어라 하는 듯이 이런 소리들을 하였다.

◉ ‘밀정’으로 몰려 죽을 뻔한 이광수

가장 큰 한인 집단거주 지역이었던 신한촌은 당시 블라디보스토크 시내에서 공동묘지보다 더 멀리 떨어져 있는 달동네였다. 낯선 사람이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동포 신문인 <권업신보>를 내고 있던 권업회 회원들이 달려왔다. 김립, 김하구, 윤해 등이었다. 그들은 이광수의 글을 읽은 적이 있어 그를 알고 있었고, 상해 지역 독립운동의 지도자급 인사인 예관 신규식이 이 지역의 거물인 월송 이종호에게 보내는 소개장을 갖고 있어 이광수는 무사할 수 있었다. 이광수는 권업회 회원들의 안내로 이종호를 만나며, 여기에서 약 열흘간 머무는 동안 이동녕과 홍범도, 엄인섭, 오주혁, 정재관 등과도 알게 된다. *

소개장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당시는 밀정 혐의를 받으면 그대로 살해되어 바다에 버려지는 살벌한 시대였다.

2016년 추석을 앞두고 개봉된 영화 <밀정>에서도 의열단원 하나가 밀정으로 밝혀지자마자 다른 단원들에게 곧바로 현장에서 죽임을 당하는 장면이 나오는 것처럼, 일제 치하 수많은 밀정들로 인해 동포끼리의 상호 불신은 대단히 심각했다.

이광수가 이곳에 오기 전 이미 여러 사람이 밀정 혐의를 받고 살해되어 얼어붙은 바다의 얼음 구멍에 수장되었다고 이곳 사람들이 말해주었다. 이광수는 자신도 자칫 그런 신세가 될 뻔했다는 섬뜩한 얘기도 들었다. 당시 신한촌에서는 그런 일을 ‘감자 실은 삯(밀정을 죽여 달구지에 싣는 값)’이라 했다고 전해진다.

이광수는 신한촌에서 열흘가량 머문 뒤 기차를 타고 국경을 넘어 중국 길림성 무링에 간다. 거기에서 안중근 의사의 바로 아랫동생인 안정근의 집에 한 달가량 머물면서 전신 불구가 된 독립운동가 추정 이갑(1877~1917)을 돕는다. 그러다가 1914년 2월 다시 기차를 타고 하얼빈을 거쳐 시베리아의 치타로 가 반년가량 머물게 된다. 이때 인근의 바이칼 호수 주변을 둘러보았으며, 그때의 경험과 기억을 되살려 19년 후 <조선일보>에 연재한 소설이 바로 《유정》이다. 이광수는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여비의 부족으로 인해 결국 미국행을 포기하고 그해 8월 조선으로 발길을 되돌렸다.

▲ 블라디보스토크 역 플랫폼 

◉ 모진 수난을 겪은 연해주 동포들

연해주 지역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서간도, 북간도 다음으로 조선인이 많이 살던 곳이다. 1910년대에는 그 수효가 20만 명 정도였고, 1925년경에는 25만 명가량이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블라디보스토크와 연해주에 살던 우리 동포들은 러시아가 적군(볼셰비키 혁명 세력)과 백군(제정러시아 잔당 세력)으로 나뉘어 내전(1918~1922) 중이던 1920년 4월, 백군과 손을 잡은 일본군의 기습으로 신한촌이 초토화되면서 300명 이상이 학살을 당했다.

인근 우수리스크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재무총장이었고, 연해주 지역 독립운동의 대부였던 최재형과 많은 지도급 인사들이 일본군에 의해 살해되는 참변을 겪었다. 이를 ‘4월 참변’이라 한다. 그런가 하면, 구소련의 스탈린 치하였던 1937년 9월부터 12월 사이에는 무려 17만 2천 명에 달하는 동포들이 어느 날 갑자기 기차에 실려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으로 강제 이주당하는 비통한 일을 겪기도 했다.

당시 스탈린 치하의 소련은 1931년부터 만주를 점령하고 있던 일본과 팽팽한 긴장 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20세기 초 러일전쟁에서 일본에 패한 일이 있었으므로 소련의 일본에 대한 경계심이 어느 때보다 높을 때였다. 스탈린 정권은 마침내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7년 그해, 한인 전체를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추방했다. 한국인이 일본인과 생김새가 비슷해 일본의 첩자를 가려내기 어렵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때 많은 한인 지도자들이 일본 간첩이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처형되었다.

▲ 1937년 연해주 한인 강제 이주 때 열차가 출발했던 라즈돌노예 역의 철로

연해주 지방에는 1860년대부터 가뭄과 기근 등을 피해 주로 함경도 지방에서 한인들이 한 집 두 집 이주해 오기 시작했고, 1910년 한일강제합병을 전후해서는 독립운동을 위해 조국을 떠나온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러시아 땅도 결코 안전하지 않았다. 그들은 맨손으로 황무지를 일구고 각종 노동 일, 장사 등으로 겨우 자리를 잡고 살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무런 기약도 없이 추위와 굶주림의 공포 속에 동물처럼 열차의 화물칸에 실려 낯선 중앙아시아의 벌판에 내팽개쳐졌던 것이다. 나라 없는 설움을 뼈저리게 느낀 모진 시절이었다.

◉ 손기정 선수가 탔던 시베리아 횡단열차

1936년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선수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바이칼 호수를 보며 보름에 걸쳐 베를린까지 갔으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한 것은 아니었다.

손기정기념재단이 2015년 3월 공개한, 책자 형식의 당시의 대륙횡단 열차티켓은 앞면에 일어로 ‘도쿄-베를린’이라고 적혀 있고, 경유지는 ‘부산-하얼빈-바르샤바’로 되어 있다. 일본에서 부산까지는 배로, 이후 열차를 타고 서울과 신의주를 지나 일본이 세운 만주국을 거쳐 시베리아로 들어가 모스크바와 바르샤바를 통해 베를린으로 가는 경로다.                                                                                          

▲작가 이정식

이처럼 손기정은 도쿄를 출발해 하얼빈을 거쳐 소련 치타에서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올라 베를린으로 갔다. 보름이나 걸리는 여정(旅程)이었다. 손기정 선수는 후일 자서전에서 “1936년 6월 적응 훈련을 하기 위해 올림픽 개최 두 달 앞서 출발했다”며 “보름에 걸쳐 베를린에 도착했더니 일본 대사관 직원이 ‘왜 조선인이 두 사람(손기정과 남승룡)이나 끼었느냐’고 해 눈물이 솟구쳤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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