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늙은 노새 같구나

  • 기사입력 2022.01.08 10:38
  • 최종수정 2024.02.03 15:24
  • 기자명 김희재 작가
▲ 김 희 재 (수필가, 한국어 교육 전문가)  

 그녀가 단단히 토라진 모양이다. 벌써 몇 달째 전화 한 통이 없다. 우린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서로 척 알아채던 사이였는데 점점 간격이 벌어지는 게 느껴진다. 애써 모른 척하며 지내다 보면 저절로 오해가 풀릴까? 이러다 옛날이야기의 주인공처럼 될까 봐 걱정이다. 

 옛날 어느 마을에 늙고 병든 노새가 한 마리 있었다. 밖에서 돌아다니다 목이 말라 물을 찾아 헤매던 중에 우물을 만났다. 물을 마시려고 몸을 수그린다는 것이 너무 깊이 숙이는 바람에 그만 우물에 빠지고 말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우물은 바싹 말라 물이 없었다. 꼼짝없이 그 속에 갇혀 당황한 노새는 끊임없이 울부짖었다. 어떻게든 빠져나오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소용없었다. 녀석에겐 너무 깊고 좁은 우물이었다. 

  노새의 주인이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늙고 병든 녀석을 그렇게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노새를 구하려고 백방으로 도움을 청했다.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 

 “우물 안으로 흙을 조금씩 넣어 줘 봅시다. 노새가 그 흙을 발로 다져서 딛고 올라오게 하면 어때요?” 들어 보니 그럴싸한 방법이었다. 문제는 말 못 하는 짐승이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넣어 주는 흙을 노새가 발로 다진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마냥 손 놓고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다른 뾰족한 수도 없었다. 

 주인은 동네 사람들을 급히 다 불러 놓고, 어디서든 흙을 좀 퍼다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사람들이 가져온 흙을 삽으로 떠서 조심스레 우물 속으로 던져 넣었다. 행여 흙이 잘못 떨어져 노새가 다칠세라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주인의 온몸이 땀으로 뒤범벅이 되었다. 그래도 오래도록 함께 살아온 식구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힘든 줄도 몰랐다.

 우물에 갇혀 있던 노새는 공중에서 흙이 날아드는 것을 보고 기겁을 했다. 아니, 깊은 절망을 했다. ‘아하, 저 사람은 내가 늙고 병들었다고 이참에 여기다 묻어버리려고 하는구나.’ 이렇게 생각하자 힘들게 살아온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휙휙 지나갔다. 회한과 원망의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쏟아졌다. 

 한 삽, 또 한 삽. 공중에서 흙이 자꾸만 떨어지자 주저앉아 울던 녀석이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무슨 생각에서인지 떨어져 내리는 흙을 발로 힘차게 다지기 시작을 했다. 그러자 노새가 딛고 있던 땅이 조금씩 돋우어졌다. 위에서 흙을 넣어 주던 주인은 이 광경을 보고 참으로 기뻐했다. ‘이제는 되었구나, 사랑하는 나의 짐승이 내 뜻을 이해했구나.’ 주인은 힘이 드는 줄도 모르고 더욱 열심히 흙을 넣어 주었다. 

 저를 살리려고 넣어 주는 흙을 자기를 죽이려는 것으로 여긴 노새는 죽을힘을 다해 그 흙을 발로 짓이기며 주인을 원망했다. 분노를 동력으로 삼았다. 그러는 사이에 조금씩 땅이 돋우어져 마침내 우물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주인은 펄쩍 뛰게 좋아하며 노새에게로 달려갔다. 하마터면 잃어버릴 뻔했던 녀석을 끌어안으려고 하자 노새는 원망의 눈빛으로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몸에 남아 있던 마지막 흙 한 톨까지 다 털어내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멀리 달아나 버렸다. 

 반가운 해후를 기대했던 주인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늙은 노새가 왜 그렇게 가버렸는지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알 수가 없었다. 서운한 마음에 한참을 일어나지 못하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야속한 녀석. 내가 저를 구하려고 온종일 노심초사했는데 어찌 그렇게 도망을 친단 말이냐’ 주인은 멀어져 가는 노새의 뒷모습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도 늙은 노새처럼 자기 생각에 갇히곤 했다. 때로는 노새 주인처럼 황당한 상황을 겪기도 했다. 내 호의(好意)가 악의(惡意)로 받아들여지지 않게 하려면 정확하게 의사를 전달하는 기술이 필요한데, 그게 쉽지가 않다. 특히 가까운 사이일수록 명확한 의사소통이 필요하다. ‘우리 사이에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내 마음을 잘 알고 있겠지’라고 생각하는 건 큰 오산이다. 

 그래, 차일피일 더 미루지 말고 당장 그녀에게 전화해서 가까운 곳으로 소풍이나 가자고 해야겠다. 따뜻한 커피 한 잔 손에 들고 나란히 걸으며 솔직한 속마음을 조곤조곤 나눠야겠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공정사회
경제정의
정치개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