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의 터전 만주 대륙

[연재 27회] 잊혀진 땅, 러시아 연해주에서 이어져 온 한민족 역사

김석동 | 기사입력 2022/01/15 [01:01]
> 한민족 DNA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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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의 터전 만주 대륙
[연재 27회] 잊혀진 땅, 러시아 연해주에서 이어져 온 한민족 역사
 
김석동   기사입력  2022/01/15 [01:01]

▲ 필자 김석동 

 

1. 러시아 연해주, 그 땅과 역사를 찾는 여정

한민족의 고대사는 물론 근세 역사와도 뗄 수 없는 곳, 러시아 연해주를 다시 찾았다. 필자는 세 번에 걸쳐 연해주 여행을 했다. 인천공항에서 출발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해 발해 역사와 항일운동 역사의 현장인 핫산, 크라스키노, 우수리스크 등을 탐방하는 여정이었다. 크라스키노의 염주 성터는 여름철에는 늪지가 되어 접근이 어렵기 때문에 다소 추운 계절이지만 지표면이 얼어붙어 차량 운행이 가능한

11월을 택했다.

 

▲ 연해주 지도  

 

연해주沿海州는 헤이룽강·우수리강 그리고 동해로 둘러싸인 땅으로 러시아 83개 연방 지역의 하나인 ‘프리모르스키Primorskiy 지방’을 말한다. ‘프리모르스키’라는 말은 러시아어로 ‘바다에 접해 있다’를 뜻하고,

한자로 표기하면 연해沿海가 된다. 면적은 약 16만 4700km2로 러시아의 0.92%에 불과하나 우리나라의 1.6배 크기이다. 80%가 ‘시호테 - 알린산맥’ 등 산림 지대이며 평균 기온은 1월 -20℃, 7월 +20℃이다. 인구는 약 200만 명으로 러시아 전체의 1.4%가 살고 있다.

 

연해주는 북방 기마민족이 세운 금金·원元·청淸이 차례로 지배했으나 16세기 들어서면서 러시아가 시베리아와 극동 지역에 강한 집념을 보이며 진출했다. 17세기 초 태평양 연안까지 진출한 러시아는 연해주접경인 헤이룽강 일대에서 청나라와 분쟁을 벌였다. 청나라는 1653년 헤이룽강에서 러시아 공격에 실패하자 조선에 원병을 청했고 이에 따라 1654년·1658년 2차례 ‘나선정벌’이 이루어졌다. 러시아가 18세기 유럽 지역 전쟁에 참가하면서 연해주가 소강 상태였으나, 19세기 들어 러시아의 동방 진출은 가속화되었다. 그 결과 1858년 청과 ‘아이훈 조약’을 체결해 헤이룽강 이북을 차지하고 우수리강 동쪽 지역은 청나라와 공동관할 지역으로 가지게 되었다. 이어 1860년에는 청과 ‘베이징 조약’을 체결해 연해주는 러시아로 완전히 넘어가게 된다. 블라디보스토크는 ‘동방정복’의 뜻을 가진 이름이라고 한다.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다음날 아침 일찍 남쪽으로 출발하여 연해주 최남단 지역인 핫산으로 향했다. 두만강과 북한·중국·러시아 3국이 만나는 국경 지역을 보기 위해서이다. 네 시간 남짓 SUV로 달려 도착한 핫산군 남쪽 끝에 있는 핫산읍의 모습은 군 시설, 그리고 무장한 군인들만 간혹 보이는 그야말로 음침하고 삭막한 국경 마을 그 자체였다. 핫산읍은 중국의 팡촨, 북한의 두만강과 접경하고 있어 출입 자체가 엄격히 금지되어 있고 방문하기 위해서는 러시아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그 허가가 중앙에까지 가서 내려온다고 한다. 당연히 미리 신청을 하지만 현지에 가서도 당일 아침에야 허가 여부를 알 수 있다고 한다. 우리 일행은 다행히 당일 아침 허가 통보를 받고 방문하게 되었다. 그러나 필자가 2년 후 다른 일정으로 이곳을 다시 방문했을 때는 허가가 나지 않아 쉽지 않은 일임을 실감했다.

 

차에서 내려 오솔길을 걸어서 두만강 쪽으로 가니 수풀 사이로 두만강 철교가 예스러운 모습을 드러냈다. 이어 나타나는 회색 줄기의 두만강. 아! 두만강이다. 감회가 새로워지며 ‘두만강수음마무豆滿江水飮馬無(두만강 물은 말을 먹여 없애리라)’라는 남이 장군의 시귀가 떠올랐다. 저 너머가 바로 북한 땅인데 좁은 강폭의 강물은 무심코 국경을 가르고 있다. 핫산에 접경한 중국은 훈춘의 팡촨에서 국경이 끊어져 태평양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육로로 단 16km에 지나지 않는 거리이다. 중국은 이곳에 태평양이 보이도록 팡촨탑을 세웠다. 태평양을 향한 중국의 염원이 엿보이는 상징물이다.

 

두만강을 뒤로하고 다시 북쪽으로 차를 돌렸다. 1시간가량 달려 핫산군의 북쪽에 자리 잡은 크라스키노에 도착했다. 이곳은 동해 바다에 접하고 있는, 약 3,500명의 인구가 사는 작은 해변 마을인데 발해의 염주성이 자리 잡았던 곳이다. 뒤에 소개하겠지만 어렵사리 옛 발해의 항구에 자리 잡았던 염주성을 찾아 성터를 두루 둘러보았다. 성터는 남북 380m, 동서 300m의 넓이로 많은 유물들이 발굴된 바 있고 지금도 발굴이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

 

 

크라스키노 인근에는 독립운동의 근거지였던 연추 마을(연추상리, 중리, 하리)이 있다. 크라스키노의 높은 지대에 세워진 핫산 영웅탑에서 보면 이 마을이 내려다보인다. 연추 마을은 ‘지신허’와 함께 연해주의 대표적 초기 한인 마을로, 지리적으로 두만강과 가까워 한인들이 가장 많이 살았던 곳이다. 이곳에서는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국경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했고 연해주 의병활동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안중근 의사 등이 창설했던 ‘동의회’의 본부가 연추에 있었으며 안 의사를 비롯한 12명의 동지가 무명지를 끊었던 곳이다. 안중근 의사는 이곳에서 때를 기다리다 1909년 10월 26일 헤이룽장성의 하얼빈으로 가서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총살하는 거사를 단행했다. 이를 기념해 크라스키노에는 2011년 한국기업 유니베라가 후원하여 동사가 운영하는 농장 인근에 단지동맹비가 세워졌다.

 

다시 블라디보스토크으로 돌아왔다. 블라디보스토크는 연해주의 주도州都로 62만 명이 살고 있는 러시아 극동의 부동항이자 군사 요충지로 태평양함대 사령부가 있는 도시이다. 시내에서 신한촌 기념비를 방문했다. 당초 시내 중심지에 ‘개척리’라는 집단 거주지가 있었는데 러시아 당국은 콜레라를 명분으로 강제 철거하여 그 땅을 군용으로 전환하고 한인들은 1911년부터 피땀 흘려 다시 시외곽에 ‘신한촌’을 건설했다. 신한촌은 망명 항일애국지사들이 한인 결사체 ‘권업회’를 조직하는 등 독립운동의 중심축이 되었다. 이곳은 1937년 한인 강제이주 때 폐쇄되었고 지금은 1999년에 세운 기념비만 남아있다.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북쪽으로 112km 떨어진 우수리스크로 향했다. 가는 도중에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작은 역 ‘라즈돌로예’에 잠시 들렀다. 1937년 연해주에 거주한 한인들의 이주의 역사의 현장이자 ‘회한의 역’이다. 오가는 이도 보이지 않는 한적한 역 건물은 을씨년스런 분위기 속에 말없이 서있었다. 역사 내부까지 살펴봤으나 쓰라린 과거에 대해서는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다시 우수리스크로 향했다. 우수리스크는 연해주 한인들의 본거지이며 항일운동의 거점이었던 곳이다. 시내에서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선생이 일본 헌병대에 의해 학살당하기 전까지 살았던 자택을 방문했다. 한·러 수교 20주년을 기념해 이 집 담벼락에는 최재형 선생을 기념하는 현판이 달렸다. 고려인 문화센터에도 들러 고려인들의 애환의 역사를 실감케하는 자료들을 둘러보았다. 시립공원에 가니 금나라 시대라는 팻말이 있으나 발해풍 유적임을 알아볼 수 있는 거북 모습의 비석 하단부를 볼 수 있었다. 이어 시외곽 스위픈 강변에 있는 이상설 선생의 유허비를 보며 다시 한 번 독립운동을 했던 주인공의 노고를 생각하며 머리를 숙였다. 1시간 정도 차를 타고 이동하여 발해 성터를 찾았다.

 

 

우수리스크는 옛 발해의 솔빈부 자리로 추정되고 있으며 성벽 터로 보이는 언덕에서 넓은 들판으로 연결되는 성터는 남북1 .2km, 동서 350m에 달한다. 성벽이 3~5m에 달하는 토성으로 외성은 전체 길이가 8km가 넘는다고 한다. 이상설 선생 유허비에서 스위픈강을 보면 이 산성이 보인다.

 

2. 연해주와 고려인, 그리고 한민족 근대사 

1863년 함경도 지역 농민 13가구가 연해주로 이주한 이래 ‘조러 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는 러시아와의 우호적 분위기에서 한인 이주가 계속 늘었다. 이어 1910년 일제의 조선 강점을 전후해서는 독립운동을 하는 애국지사의 망명과 이주가 이어졌다. 일제강점기에도 토지를 빼앗긴 농민들이 대거 연해주로 이주했다. 이들은 지신허·연추 등에 한인 마을을 형성해 살았다. 우리나라의 독립운동과 관련해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지역이다. 또한 블라디보스토크에는 한인 집단 거주지인 ‘신한촌(‘개척지’에서 이주한 지역)’이 세워졌다. 한민족의 본격적인 이주가 이뤄진 것이다.

 

연해주는 두만강으로 한반도와 접하고 있는데 겨울에는 강이 얼어 이동이 쉽다. 연해주 남부는 지형·토질뿐 아니라 나무와 야생화 등 식생이 우리나라 중남부 지역과 대단히 흡사하다. 이 또한 한인들의 이주가 늘어난 배경이 아닐까 한다.

 

1910년을 전후해서는 애국지사의 망명과 이주가 줄을 이어 연해주는 만주의 북간도와 함께 조직적인 항일운동의 거점이 되었다. 1908년 최재형, 이범윤, 안중근, 이위종 등은 연추에서 ‘동의회’를 결성했고, 이듬해 안중근 의사를 비롯한 12명의 동지는 왼손 무명지를 끊어 조국 광복에 목숨을 바칠 것을 맹세했다. 이 맹세는 안 의사에 의해 1910년 봄 여순 감옥에서 지켜졌다. 이범진, 이준, 이상설, 이위종은 잊을 수 없는 ‘헤이그 특사’ 사건의 주인공들이다. 이범진 초대 러시아 공사는 헤이그 밀사를 발 벗고 후원했다. 1906년 이준, 이상설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합류해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도록 했고 그의 아들 이위종도 합류시켰다. 그러나 나라를 잃은 직후 이범진은 1911년 1월 13일 전 재산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내놓은 후 조국의 절망적 상황에 저항하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다. “나는 우리의 적들에게 복수할 수도, 그들을 벌할 수도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 부딪혀 있다. 이것이 내가 오늘 자살로 생을 마감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죽어서라도 조국에 가고팠던 이상설의 유해는 동해로 흐르는 스위픈강에 뿌려졌다.

 

2001년에 러시아 정부의 협조를 얻어 스위픈 강변에 세워진 ‘이상설 선생 유허지’ 비석에는 “그 유언에 따라 화장하고 그 재를 이곳 스위픈 강물에 뿌리다”라고 쓰여 있다.

 

이어 의병부대 ‘13도 의군’과 독립군 양성을 위한 ‘권업회’가 창설되고, 블라디보스토크에 ‘대한광복군정부’가 수립됐다. 1919년 연해주에 최초의 임시정부인 ‘대한국민회의’가 세워졌고, 그해 상해임시정부와 통합됐다. 3·1운동을 계기로 연해주 한인들의 독립운동이 요원의 불길같이 확산되자 이를 크게 겁낸 일제는 1920년 봄, 연해주 한인 학살에 나서 살인과 방화를 자행했다. 신한촌에서만 300명 이상이 죽었고, 항일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도 이때 순국했다. 하지만 연해주의 한인들은 일제에 대항하여 무장투쟁을 계속했다.

 

연해주는 또 다른 슬픈 역사의 현장이다. 1937년 중일 전쟁이 일어나자 러시아의 스탈린은 연해주에 살던 전체 한인들을 강제이주시켰다. 이유는 어이없게도 일본과 내통할 수 있다는 것이었고, 총 17만 1,781명이 ‘라즈돌로예 역’ 등에서 무작정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실려 중앙아시아로 향했다. 굶주림과 공포 속에 열차가 도착한 곳은 연해주에서 6,000km 떨어진 반사막 지대인 카자흐스탄의 알마티,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 인근 지역이었다. 이들의 삶이 얼마나 처참했던지, 처음 2년간 1만 2,000명이 사망했다. 그러나 한인들의 생명력은 강인했다. 척박한 땅에 버려진 이들은 결국 소비에트 최고의 모범 집단을 일궈내면서 살아남았다. 소련 해체 후인 1993년 러시아는 고려인 명예회복 법안을 채택했고, 고려인이 연해주로 가는 길은 다시 열렸다. 현재 연해주에 거주하는 고려인 5만여 명 중 3만여 명은 재이주해 정착한 사람들이다.

 

3. 연해주의 한민족 고대·중세 역사

연해주는 한반도와 가장 인접한 지역으로 고대로부터 한민족 역사의 무대였다. 이 지역의 고대사는 오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극동연방대학 박물관에는 BC 1만 5000년 전 구석기 유물이 있다. 이후 청동기 시대를 거치면서 이곳은 고조선의 역사 무대였고 그 뒤를 부여·고구려가 이어받았다. 고구려는 668년 당나라에 의해 멸망했으나 698년 발해라는 이름으로 부활했다. 중국 사가들은 만주와 이 지역에서 활동하던 고대 민족에 대해 시대별로 숙신肅愼, 물길勿吉, 말갈靺鞨이라고 부르다가 발해 멸망 후에는 그 땅은 여진女眞으로, 그 사람은 여진족으로 불렀다. 이 연해주 땅이 우리 역사와 깊은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연해주에서는 발해 유적지가 계속 발굴되고 있다. 발해 5경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으나 대체로 동경 용원부는 3대 문왕 후기부터 5대 성 왕초까지 10년간 발해 수도였고 그 위치는 두만강 인근 간도의 중국 헤이룽장성으로 추정된다. 이 동경 용원부에 소속된 연해주의 크라스키노에서 발해의 성터와 독창적인 유물이 발굴되었다. 특히 크라스키노(염주)는 일본으로 가는 해로日本道의 출발점이 된 곳으로 당시 활발한 대외 활동을 말해준다.

▲ 발해 강역도 (민족문화대백과 사전)  

 

발해 유적 중 크라스키노 성터는 발해 역사 규명에 있어 기념비적인 발굴로 평가되고 있으며 지금도 발굴이 계속되고 있다. 크라스키노 마을에서 서쪽으로 약 2.5km를 가면 좌측으로 드넓은 습지가 나타난다. 이 습지에서 고상버스를 타고 약 0.9km 정도 남쪽으로 가면 철길을 만나, 이 철길을 지나 수풀을 헤치고 걸어 1.8km 정도 더 가면 발해의 크라스키노 성터에 이른다. 1960년 러시아 학자가 이 성의 성격을 밝힌 이후 지금도 한·러 학자들이 발굴을 계속하고 있다. 성벽의 외곽과 세 군데 성문, 옹성의 흔적이 뚜렷하게 존재한다. 크라스키노에서 농업 생산을 하는 한국 ‘유니베라’의 현지 법인 법인장이 위성 좌표로 어렵사리 현지까지 안내해 주었는데, 학술탐사팀 외에는 첫 방문이라 귀띔해주었다.

 

우수리스크 시 인근 지역의 발해 성터도 답사하였는데, 연해주에서만 발해 유적지가 280여 곳에 이른다고 한다. 그러나 제대로 발굴이 이뤄진 곳은 수 곳에 불과하다고 한다. 니콜라예프카 성터, 콕샤롭카 유적지 등 이름난 발굴지 외에도 수많은 발해 시대 흔적이 남아있어 한·러 학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이를 계기로 우리의 고대사 연구가 진일보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

 

2 선양에서 훈춘까지 만주 대륙 동서 1,800km 역사 여행

만주는 대제국 고조선의 땅이다. 고조선의 후예들이 부여, 고구려, 발해를 비롯한 여러 한민족 국가를 건설했던 곳이며, 근세에 들어서는 한반도의 수많은 사람들이 이주해 삶을 개척했고,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의 진원지이자 거점이 되었던 곳이다. 이래저래 한민족과는 떼려야 뗄수 없는 땅이다. 필자는 2013년에 창춘-지린-지안-압록강-단둥-선양으로 이어졌던 만주 역사 여행을 한 바 있고 이후 몇 차례 연해주와 만주 대륙을 찾았다. 2016년에 다시 만주 대륙 탐사 여행에 나섰다. 랴오닝성 선양瀋陽(심양)에서 지린성 훈춘琿春(혼춘)까지 만주 대륙 동서를 가로지르는 1,800km에 이르는 장정으로, 고구려와 발해 유적지를 탐사하고 백두산을 등정하는 코스이다.

 

1. 고구려 역사 탐방과 백두산 등정

인천공항에서 출발한 비행기는 두 시간이 채 못 되어 선양에 도착했다. 선양은 청나라 초기 수도로 청靑은 금金을 세웠던 여진족이 1616년 만주에 세운 나라이다. 그런데 《금사金史》를 포함한 사서와 연구 논문 등에서는 금·청의 건국자들이 고려(고구려)의 후예라고 밝히고 있다. 이 점은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700년 이상 만주를 지배했던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고구려 후예들은 단 30년 만에 고구려를 재건해 발해를 건국했다.

▲ 선양 - 훈춘 만주 역사 탐방 경로

 

발해가 거란에 멸망한 후 그 땅은 우리 역사에서 멀어졌다. 중국인들은 그곳을 여진이라 불렀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여진족이라 칭했다. 이들은 고구려와 발해의 후예들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여진의 사람과 이들이 세운 나라들에 대한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 이와 관련해서 금의 건국자 아골타 및 후금(청)의 건국자 누르하치의 가계는 발해 왕가에서 비롯된다는 북방사학자 전원철 박사의 연구는 1부에서 소개한 바 있다.

 

선양은 인구 800만 명이 넘는 만주 최대의 도시로 랴오허 유역에 위치한 랴오닝성 성도이며, 일제 때는 봉천奉天이라 불렸다. 청나라 황궁이었던 선양 고궁 등을 둘러보고 인근에 있는 청 태조 누르하치의 묘소인 동릉을 찾았다. 봉림대군과 소현세자가 볼모로 잡혀있던 곳이기도 하다.

 

 

선양에서 동쪽으로 170km 달리면 푸순撫順 시의 신빈新賓에 닿는다.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청나라 황제 조상묘인 청 영릉을 둘러본 후 지린성 쪽으로 이동하다 청의 건국자 누르하치가 태어난 신빈에 들렀다. 누르하치가 건주여진을 통합하고 세운 첫 번째 수도인 ‘허투알라赫圖阿拉(혁도아랍)성’이 이곳에 있다. 이후 랴오양-선양-베이징으로 천도를 하게 된다.

 

신빈에서 다시 동쪽으로 200km 정도 가면 ‘퉁화通化(통화)’ 시가 나온다. 교통의 요지인 이곳에서 북쪽으로 한 시간 거리에 유하현이 있다. 이곳은 서간도 지방의 중심지로 이상룡·이시영·이회영·이동녕 선생 등이 항일단체를 조직했던 곳이며 간도 3·1 운동의 진원지이다. 당대의 명문가였던 이회영·이시영 등 6형제는 1910년 말 전 재산을 처분하고 유하현 삼원보로 일가를 이끌고 망명했다. 이들 형제의 집터가 명동성당 맞은편 은행연합회 쪽에 있었고 지금 그곳에 작은 기념비가 남아있다. 이곳에서 이회영 형제가 내어 놓은 재산으로 독립군 양성을 위한 ‘신흥강습소’를 설립했고 후에 퉁화현으로 이전, 신흥무관학교를 출범시켰다.

 

퉁화시에서 200km를 더 달려 지안集安(집안)에 도착했다. 지안은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이다. 지안은 대제국 고구려의 오랜 도읍지였기 때문에 수많은 고구려 유적이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국내성은 압록강변 통구 평원에 자리 잡고 있으며, 서기 3년에서 427년 평양 천도 시까지 425년간 도성이 있던 곳이다. 성벽과 성문 터, 치 등이 뚜렷하게 남아있는 역사의 현장이지만, 성터 위에는 안타깝게도 아파트와 상가가 자리 잡고 있다.

▲ 지안 국내성(서벽) 

 

국내성 북쪽 2.5km에는 전시에 대비해 짝을 이루어 쌓은 산성자 산성(일명 환도 산성)이 있다. 이 성은 험준한 산봉우리들로 둘러싸여 있어 말 그대로 천연의 요새이다. 1,5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잘 쌓여진 성벽이 그대로 남아 고도의 축성 기술과 전쟁에 대해 얼마나 철저히 대비했던가를 웅변하고 있다. 인근에 산재한 고구려의 위용을 웅변하는 태왕릉, 광개토 대왕릉비, 장군총 등을 둘러봤다. 국내성에서 북동 방향으로 2.5km 정도 가면 태왕릉이 나타난다. 태왕릉은 돌로 축조한 계단식 돌무지 무덤으로 광개토 대왕의 무덤으로 비정되고 있다. 계단을 올라가면 돌로 된 묘실이 나타나고 내부를 볼 수 있다. 무덤에서 금·청동, 철기와 토기 등 수많은 유물이 출토되었고 그 규모의 방대함은 고구려 최전성기 때의 무덤으로 손색이 없다.

 

이 능에서 북동부 방향으로 약 300m 거리에 광개토 대왕릉비가 있다. 광개토 대왕릉비는 장수왕이 부왕 광개토 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414년에 세운 것으로 높이 6.39m의 거대한 돌에 고구려 건국신화부터 광개토 대왕의 업적 등이1 ,775자로 새겨져 있다. 청나라 시대인1 880년 한 농부가 이끼와 덩굴에 덮여 있는 거대한 돌비석을 발견했는데 이 비석으로 말미암아 찬란했던 고구려 그리고 한민족의 역사가 분명히 밝혀지게 되었다. 태왕릉에서 북동쪽으로 약 1km 지점에는 웅장한 위용을 자랑하는 장군총이 있다. 장군총도 잘 다듬은 화강석으로 7층 구조 고구려 시대 돌무지 무덤이다. 장수왕의 무덤으로 비정되고 있으나 다른 의견도 있다. 장군총, 광개토 대왕릉비, 태왕릉, 국내성은 네 지점이 모두 일직선상에 있어 더욱 관심을 끌었다.

▲ 오회분 5호묘 사신도 자료 사진 (좌측 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주작, 백호, 청룡, 현무) 


태왕릉 인근에는 귀족 묘지가 모여 있는 오회분이 있는데 그중 5호묘에서 그토록 오랜 세월을 이기고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는 사신도 벽화와 마주쳤다. 감동의 순간이지만 촬영 제한으로 사진을 찍을 수 없는 것이 몹시 아쉬웠다.

▲ 오녀산성 

 

고구려의 첫 번째 수도였던 오녀산성五女山城은 그곳에서 200km 떨어진 ‘환인’에 있다. 환인은 지안에서 약 3시간 반 거리에 있으며 지안에서 선양으로 가는 통로로 교통 요지이다. 지난번 만주를 여행했을 때 다녀온 오녀산성은 높이 800m의 높은 산마루에 위치해 있어 철옹성같이 그 위용을 자랑한다. 지금도 연못, 성곽 일부 등 옛 성터의 흔적을 확인 할 수 있다.

 

다음 여정은 백두산 천지 등정으로 네 개 길 중 ‘북파’를 택했다. 지안에서 약 400km 떨어진 백두산 관광 전진기지인 ‘얼다오바이허二道白河(이도백하)’에 도착해 여정을 풀었다. 백두산 천지는 기후가 급변해 그 자태를 쉽게 보여주지 않는다. 다음날 아침 일찍 약 60km 산길을 달려 백두산 천지에 도착했다. 날이 너무 청명해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데, 천지에는 아직 눈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한눈에 봐도 한민족의 영산으로 손색이 없다. 날이 맑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는 천지는 물론 건너편 북한의 산까지 뚜렷이 보인다. 이런 날은 정말 드물다고 안내인은 몇 번을 감탄했다.

 

2. 발해 역사 탐방

백두산과 천지를 뒤로하고 쉬지 않고 4시간 동안 180km 정도를 달려 ‘허룽和龍(화룡)’에 도착했다. 거기서부터는 연변대학 발해사연구소의 정영진 소장이 직접 안내를 해주었다. 허룽은 한민족 역사의 중심지 중 한 곳이다. 동부여의 발현지이자 발해 중경현덕부가 위치했던 곳이다. 발해 2대 무왕 때 이곳의 서고성西古城으로 천도(742년)하여 14년간 수도로 삼았다.

 

▲ 발해 서고성 (허룽)  

 

서고성은 토성으로 외성과 내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외성은 둘레가 약 2.7km, 내성은 약 1km로 그 흔적이 아직도 뚜렷하다. 서고성 인근 용두산 고분군 중 3대 무왕의 딸 정효공주 묘에서는 벽화도 발견됐다. 1980년 연변대 연구팀이 발굴에 성공했는데, 우리를 안내한 정영진 소장이 바로 발굴 당사자였다. 발굴 당시 상황을 설명하는 그의 표정에서 젊은 시절로 돌아간 학자의 모습이 엿보였다. 

 

▲ 룽징 명동촌  

 

허룽을 떠나 약 70km 떨어진 옌지延吉(연길)로 향했다. 연변 조선족 자치주 주도인 옌지는 조선족 문화의 중심지로 2000년 무렵만 해도 주민의 40%가 조선족이었으나 이제는 한인 비중이 점차 늘고 있다. 옌지에서 하룻밤을 잔 후 약 30km 정도 떨어진 룽징龍井(용정)을 방문했다. 룽징은 해란강과 일송정, 윤동주 시인 생가와 명동교회, 명동학교가 있는 명동촌이 자리 잡은 곳이다. 영화 <동주>의 무대이기도 하다.

 

그곳에서 동남쪽으로 50km 지점에 개산둔이 있다. 1800년대 중반 한민족이 진출한 간도 지역 중 가장 먼저 대규모로 정착했던 곳이다. 그 땅을 직접 밟아보고 싶었으나, 시기적으로 민감한 때라 가는 것은 다음으로 미뤘다. 룽징에서 약 70km 동쪽으로 가면 두만강 국경 도시 투먼圖們(도문)이 나온다. 투먼은 중국 동북 지역의 무역·교통 중심지로 두만강 연안에서 북한과 철도로 연결되는 유일한 통로이다. 투먼에서부터는 두만강을 따라 접경지대를 달리게 되며, 10km 정도 가다 보면 드디어 한반도 최북단 지역인 북한의 ‘풍서’란 곳을 마주보며 지나게 된다. 감개가 무량하다. 마침 인근에서 사공이 노 젓는 배를 보자 나도 모르게 카메라를 들이댔다.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이라는 노래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 발해 팔련성 (훈춘)  

 

투먼 시에서 70km를 더 달리면 국경 도시 훈춘에 닿는다. 이곳은 발해 5경 중 하나인 동경 용원부가 자리 잡았던 곳이다. 발해 3대 문왕이 신라 및 일본과의 교류를 염두에 두고 천도해 9년간 수도로 삼았다. 동경 용원부의 중심 성터가 바로 팔련성으로, 외성과 내성 터를 비롯해 다수의 유물들이 발굴되었다. 살아 숨 쉬는 발해사의 현장을 돌아보니, 대륙에서 웅비하던 발해인의 숨결이 피부에 와 닿는 듯했다.

 

훈춘에서 다시 북중 국경선에 인접한 좁은 길로 약 60km를 달려 중국·북한·러시아 3국이 국경을 맞대고 있는 두만강 하구 팡촨防川에 도착했다. 나란히 보이는 세 나라 국기가 이 지역 역사를 함축해 보여주었

다. 중국은 여기서부터 단 16km가 육지로 가로막혀 동해와 태평양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중국은 동해바다를 향한 염원을 담아 망해각望海閣이라는 탑을 세웠다. 팡촨탑이라고도 부른다. 지난번 연해주 발해 유적 탐사 때 하산 쪽에서 바라봤던 바로 그 팡촨탑이다. 14m 높이의 3층 누각에 오르면 중국, 러시아, 북한 3국을 모두 내려다볼 수 있다.

 

팡촨을 떠나 다시 옌지에 도착한 후 비행기에 몸을 싣고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선양에서부터 팡촨까지의 1,800km, 우리 역사의 숨결이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있는 땅은 한민족 역사를 탐구하는 순례자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데 한 치의 부족함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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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2/01/15 [01:01]   ⓒ 한국NGO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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