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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소깍

  • 기사입력 2022.01.21 21:38
  • 최종수정 2024.02.03 15:23
  • 기자명 김희재 작가
▲ 김희재 수필가.                한국어 교육 전문가

처음엔 거기가 ‘세솟가’인 줄 알았다. 녹차 밭과 서귀포 바다가 한눈에 다 보이는 카페의 주인이 강력추천하는 제주의 관광명소 이름이 낯설어서 단번에 받아 적을 수가 없었다. 주인장 말로는 아직 사람의 손을 많이 타지 않은, 원시적인 느낌이 짙은 곳이라 했다. 몇 번을 되물어본 끝에 내가 메모한 지명이 ‘세솟가’였다. 

내비게이션에다 검색해 보니 ‘그런 곳 없음’이라고 나왔다. 찻집 주인은 분명 서귀포에서 남원 쪽으로 가는 길에 있다고 했는데, 검색이 안 되는 걸 보면 내가 잘못 받아 쓴 것 같다. ‘세속가’, ‘새솟가’, ‘새속각’, ‘새솟각’ 등 들었던 발음을 기억해서 이리저리 다르게 적어 넣었지만, 여전히 그런 곳 없음이 나왔다. 

  “이런, 쇠소깍이네. 이름도 참 괴상하군.” 내가 내비게이션을 붙들고 씨름하는 사이에 남편이 렌터카 회사에서 준 관광 안내 책자를 뒤져서 정확한 지명을 찾아냈다. 

   우리는 원시림으로 가득 찬 깊고 험한 산골짝을 기대하며 내비게이션을 따라갔다. 목적지 근처라 안내를 마치겠다는 메시지는 나오는데, 도착한 곳은 이렇다 할 특징이 없는 그저 평범한 바닷가 마을이었다. 아무런 표지판도 없었다. 찻집 주인이 원망스러워졌다. 그래도 찾느라 애쓴 품값이 아까워서 차에서 내려 조금 걷기로 했다. 

  그저 밋밋한 풍경을 따라가다 보니 아스팔트길 오른쪽에 아래로 내려가는 나무 계단이 보였다. 아무 기대도 없이 그냥 계단을 내려갔다. 굽어져 꺾이는 계단참을 돌아서자 갑자기 시야가 확 열리고, 전혀 상상치 못한 풍경이 나타났다. 거기에 산과 바위 계곡과 바다가 오롯이 숨어 있었다. 우리가 찾던 '쇠소깍'이었다. 

▲제주도 쇠소깍 

  오목하게 들어앉은 용소(龍沼)는 끝이 확 터져서 바다로 연결되었다. 용소를 둘러싸고 있는 회색의 기암괴석(奇巖怪石)은 먼 산에서부터 따라온 호위병(護衛兵) 같았다. 용소 끝에서는 거대한 몸집의 바다가 다시 들어오려는 양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미친 듯이 몸을 뒤집어 허옇게 포말(泡沫)을 뱉어내며 몸부림쳤다. 끊임없는 바다의 아우성에도 불구하고 짙은 에메랄드색 용소는 흔들림 없이 침묵했다. 냉정해 보일 만큼 고요하고 평온했다. 보통 산이 깊은 곳은 바다가 멀고, 파도가 치는 곳에는 계곡이 없기 마련인데 여기는 둘이 공존하고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오묘한 풍광에 입이 떡 벌어졌다.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마침 저녁해가 먼바다로 설핏 넘어가고 있었다.

  우리가 나무 계단을 다 내려가서 물가에 다다랐을 때, 어디에선가 대나무를 엮어서 만든 배 한 척이 들어와 사람들 서넛을 내려놓았다. 관광객들을 태우고 바위 병풍이 있는 곳까지 한 바퀴 돌아오는 미니 유람선이었다. 1인당 5,000원씩 받는, 모터도 없고 노도 없이 물 위에 얼기설기 매어 놓은 줄을 사공이 손으로 당겨서 움직이는 배였다.

  “이 배는 우리 마을 청년회에서 운영하는 건데 오늘 저녁에 회합이 있어서 제가 지금 가야 하거든요.” 사공은 우리를 보자 지레 변명을 했다. 애초부터 그 배를 탈 생각은 없었는데 사공이 못 태워준다고 하니 괜히 서운했다. 그냥 묶인 배 위에서 기념사진이라도 찍게 해달라고 하자 선뜻 카메라를 받아 들고는 쇠소깍 소개까지 상세하게 해주었다.

  ‘쇠소깍’이란 이름은 위에서 내려다보면 소가 길게 누워 있는 형상의 용소(龍沼)가 시작되는 곳이라는 뜻이다. 이곳의 물은 한라산에서 발원한 물이 내려와 모인 것이다. 산에서 내려온 물이 곧장 바다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용소 깊이는 대략 6m 정도 되는데, 관광지로 개발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아서 아직 원시적인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용소의 입구가 틔어 있어서 만조(滿潮)에는 바닷물이 들어와 수위가 올라가고 간조(干潮)엔 다시 낮아진 다. 그래서 관광객이 대나무 배를 타는 지점도 물때에 따라 달라진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산과 바위와 계곡과 호수와 바다가 어우러진 특이한 경관이다. 

  뱃사공이 떠나고 난 후에도 나는 한참 동안 배 위에 서서 파도를 바라보았다. 바닷물이 다시 안으로 들어오려는 듯 계속 아우성치고 있는데도 호수는 침묵으로만 일관했다. 한라산에서부터 함께 온 물이라 할지라도 바닷물과 합류하고 난 후에는 다시 민물이 될 수 없다며 애써 외면하는 것 같았다. 

 돌이킬 수 없는 게 어디 이 물길뿐이랴. 태어나서 살다가 돌아가는 패턴을 지닌 인생행로(人生行路)도 단 한 번만 허락된 일과성(一過性)이긴 마찬가지다. 거침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거스르지 못하게 만들어 놓으신 섭리는 누구도 거역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유행가 가사처럼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정처 없는 나그넷길’은 아니다. 보이지 않는 바위틈에서 출발하여 깊고 푸른 호수에 머물다가 마침내 거대한 바다로 나아가는 위대한 여정이다.

  어둠이 짙어지니 물소리가 더욱 요란하고 시끄럽다. 눈을 감고 집중해서 잘 들어 보니 바다가 다시 용소 안으로 들어오고 싶어 우는 소리가 아니다. 겉보기엔 냉철하고 고요해 보이던 용소의 깊은 속울음 소리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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