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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간의 왕비에서 182년만의 복위된 단경왕후

문화재 : <사적> 양주 '온릉' (楊州 溫陵)
소재지 : 경기 양주시 장흥면 호국로 255-41

  • 기사입력 2022.01.25 22:54
  • 기자명 정진해 문화재 전문 대기자
▲ 양주에 있는 중종의 왕비 단경왕후의 온릉 

 

조선왕릉 중 가장 늦게 개방된 '온릉'의 가을은 단풍나무와 갈참나무, 소나무, 서어나무 등이 울창한 숲을 꾸렸고 오색 빛깔의 나뭇잎이 계절에 충실히 하고 있다. 갈참나무 두 그루가 서로 애정을 표현하듯 엉켜 낙엽의 길을 가기 위해 물들이고 숲의 깊숙이 단풍나무도 가을을 빛내기 위해 잎에 물드는 중이다. 이미 갈참나무는 도토리를 모두 내려놓은 상태로 늦가을의 색을 입히는 중이다.

 

온릉 입구를 들어서면 먼저 긴 숲 터널을 걷는다. 다양한 나무들은 큰 나무와 작은 나무로 구분 지어 숲을 이루며 눈의 끝을 가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움을 갖추었다. 오래된 나무에 버섯이 집을 지었고, 가을의 꽃은 화들짝 피어 있는 릉역의 풍경이다.

  

온릉은 재실을 갖추었고 홍살문, 정자각, 수복방, 비각, 능침을 갖춘 능 구역이다. 이곳에 잠든 주인공은 조선 제11대 중종의 정비인 단경왕후 신 씨의 능이다. 시호는 공소순열단경왕후이다.

  

▲ 온릉 근경 

 

조선의 역대 왕비 중 가장 짧은 7일의 재위 기간을 보유하고 있다. 본관이 거창인익창부원군 신수근과 청원부부인 한 씨의 딸로 1487년(성종 18)에 태어났다. 1499년(연산 5)에 성종의 아들인 진성대군과 가례를 올려 부부인이 되었으며, 1506년에 중종반정으로 진성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이 성공하면서 남편(중종)이 왕위에 오르자 그녀도 자연스럽게 왕비가 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아버지 신수근이 연산군의 처남인 데다가 반정에 가담하지 않은 관계로, 1506년(중종 원년) 9월 25일(음력 9월 9일)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진성대군을 왕위에 앉힌 반정 세력에 의해 7일 만에 폐위되었다. 중종은 높은 산에 올라 그녀가 거처하고 있던 사가를 바라보는 일이 많았고, 그 사실을 안 그녀의 사가에서도 중종이 잘 볼 수 있는 곳에 그녀가 자주 입던 붉은 치마를 펼쳐놓았다는 야사가 전해져 온다.

 

1515년(중종 10)에 중종의 두 번째 왕비 장경왕후 윤 씨가 세상을 떠나자 왕은 노회하고 냉철한 정치인으로 변했다. 이 과정에서 폐비 윤 씨를 복위하자는 상소가 나오자 상소에 연계된 10명을 처벌했다. 즉 정치적 사안은 철저히 관리해 나갔다. 그러나 중종도 임종을 눈앞에 두고 신 씨를 찾았다고 한다. 그래서 신 씨가 궐내로 들어올 수 있도록 통화문을 열어 두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1557년(명종 12)에 사저에서 71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에 양사언은 추모 시를 지어 바쳤다.

 

‘장신궁에 꿈을 깨니 눈물이 슬픔을 보태네/일편단심은 요대의 달이 되어/밤마다 서릉으로 향해 온다.“

 

친정집안인 거창 신씨의 묘역에 묘를 조성하였다. 세상을 떠난 지 182년이 지난 1739년(영조 15)에 김태남 등의 건의로 복위되어 단경이라는 시호와 함께 공소순열이라는 존호를 받았고, 능호를 온릉(溫陵)이라 하고 신주를 종묘에 부묘했다.

 

▲ 온릉의 재실     

  

재실은 진입공간의 길목 서쪽 편 약간 언덕진 곳에 있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자연석을 기단을 쌓아 경사진 지대를 수평으로 만들어 마당을 두고, 뒤로 물러나 장대석으로 초벌대를 놓고 기단을 두고 그 위에 사다리꼴 초석을 놓고 각기둥을 세웠다. 정면 우측 2칸은 툇마루를 두고 방을 드렸고, 가운데 2칸은 대청을, 좌측 1칸은 툇마루를 두고 방을 드렸다. 재실은 능의 수호 관리를 담당하던 참봉이 상주하던 곳으로 제사에 쓸 향을 보관하고 제기를 간수하여 제사와 관련된 전반적인 준비를 하는 곳이다.

 

재실에서 제향 공간은 직선상이 아니고 서쪽 편으로 꺾어진다. 홍살문과 능침은 동서로 일직선상에 있다. 제향 공간 시작점은 금천교부터 시작되나 온릉에는 금천교가 보이지 않는다. 홍살문은 홍전문, 홍문 등으로 부르는데, 설치한 지역이 신성한 곳이거나 규격이 맞는 장소임을 나타내기 위해 표지로 세운 문이다. 나무로 만든 두 개의 기둥을 세우고 살에 붉은색을 칠하고 문의 상단에 붉은 화살(홍살)을 세우고 가운데에 태극무늬를 새겨 붙인다. 태극 무늬를 지나는 홍살들은 서로 꼬여 있어 삼지창 모양을 하고 있다. 붉은색으로 칠하는 이유는 붉은색이 양기를 띄어 귀신과 액운을 물리친다는 뜻을 담고 있기 때문이며 윗부분을 화살로 장식한 것은 잡귀를 화살로 쏘아 없애버린다는 뜻을 담고 있다. 홍살의 수가 9개인 것이 가장 많은데, 그 이유는 9가 완성된 수라고 하여 9개의 살을 세웠다.

 

홍살문 우측 안쪽에는 사방 2m 정도의 돌로 된 판이 있는데 이것을 배위 또는 판위라 한다. 왕이 제례 시에 홍살문 앞에 내려서 절을 하고 들어가는 곳이다. 홍살문과 정자각 사이에 장대석으로 일정한 넓이로 좌우에 배열하고 안쪽에 박석을 깐 향로가 있고 우측에는 향로보다 약간 낮은 박석만 깐 길이 있는데 이것은 왕도이다. 향로와 어도는 정자각 계단까지 연결되어 있다. 향로와 어도에 박석을 깐 것은 햇볕이 반사되지 않기 위해 깔았다. 향로가 오르는 계단은 난간에 구름무늬를 새겼고 북돌에는 삼태극 무늬를 새겼는데, 오랜 세월 풍화작용으로 마모가 심하며 우측 계단은 난간과 북돌이 없는 계단을 두어 왕이 오를 수 있도록 하였다. 반대쪽에는 왕이 내려갈 수 있는 계단만 두었다.

 

▲ 정자각  

 

정자각은 정면으로 보이는 ‘丁’자 형태의 건축물이라 하여 정자각이라 부른다. ‘일(一)’ 자형의 정전 앞에 붙은 ‘궐(闕)’ 자 모양의 제사를 올리는 공간인 제전(祭殿)의 맞배지붕 옆면이 정면처럼 보이도록 지어졌다. 온릉의 정자각에는 잡상이 장식되어 있지 않다. 정자각 오른쪽에는 팔작지붕의 비각이 있는데 내부에는 가첨석의 비에 ‘朝鮮國 端敬王后溫陵’라 새겼다. 또한 비에는 많은 총탄 자국이 많이 있는데, 이곳은 6.25 한국전쟁 때 치열한 전투가 있었던 곳이기 때문이다. 향·어로 중간 즈음 양옆으로는 왕릉 관리자가 임시로 머무는 수복방(守僕房) 터 만 남아 있고 수라간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정자각 왼쪽에는 제례를 지낸 후 축문을 소각하는 예감이 있으며, 정자각 뒤 동북쪽에는 산을 주관하는 산신에게 예를 올리는 장방형의 산신석(山神石) 자리한다.

 

▲ 능침  

온릉의 능침공간은 봉분이 있는 능의 핵심 공간으로 왕비의 영면 공간이다. 능침공간 주변에는 소나무가 둘러싸여 있으며, 능침의 봉분은 원형의 형태로 왕릉 중 가장 작은 크기로 잔디가 덮여있다. 능침공간은 2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단인 상계에는 봉분이 있는 단이다.

 

▲ 곡장   

 

조선의 능은 봉분에 12면이 병풍석과 난간이 둘려 있으나 온릉은 병풍석과 난간석이 없는 원형 무덤으로 석양과 석호가 능을 등지고 있고 그 외곽에 풍수지리의 바람막이와 담장 역할을 하는 곡장이 둘려 있다. 봉분 앞에는 혼이 앉아서 노니는 공간이 혼유석이 있고 그 좌우에 망주석이 있다.

 

▲ 석마

 

2단에는 가운데에 어두운 사후세계를 밝히는 장명등이 놓여 있고, 그 좌우에 왕비를 모시는 문인석이 있으며 그 옆에 석마가 있다. 3계에 무인석과 석마가 있어야 하나 온릉은 비릉으로 봉해진 무덤의 예를 따라 무인석과 석마는 두지 않았다. 문인석의 얼굴과 석마의 입이 6.25 한국 전쟁으로 총탄으로 훼손되어 있다.

 

단경왕후는 남편을 왕위에 올리는 데는 매우 뛰어난 기지를 발휘하였으나 아버지의 처신으로 자신의 일생을 망친 7일간의 비운의 왕비가 되었다. 궁궐에서 쫓겨난 지 무려 232년 만(영조 15년, 1739년)에 단경왕후라는 왕비의 칭호를 얻었다.

 

▲ 지난 1월 6일 치뤄진 제 465주기 온릉 기신제 

 

2022년 1월 6일에 제 465주기 기신제가 있었다. 양주시 부시장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됐다. 이날 기신제에는 양주 부시장 외에 거창신씨 대종회 회장, 전주이씨 덕양군파 종중 이사, 해안군 14세 손 등이 참석하였다. 기신제는 매년 1월 6일에 개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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