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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에 놓인 한양도성의 석교

(서울시 유형문화재) 서울 수표교
서울 중구 장충동2가 197-1, 산4-50, 산6-5

  • 기사입력 2022.02.16 08:20
  • 기자명 정진해 문화재 전문 대기자
▲ 세종때 청계천에 놓였으나 지금은 장충단 공원으로 옮겨져 있는 수표교   

인류가 지구상에 나타나면서 식량 채집단계로 먹을 것을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식량 생산 단계로 넘어오면서 정착 생활로 농경과 어로에 편리한 물고기가 있는 곳으로 모여들면서 자주 다니는 계곡에는 나무를 걸쳐두고, 소하천에는 돌을 띄엄띄엄 놓아 불편함을 해소하기 시작한 것이 오늘날의 다리가 됐다.

지금도 신석기 시대에 했었던 그 행위는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다. 이것이 발전되어 목교가 만들어지고 석교가 만들어지고 문명의 발전은 철교, 콘크리트 등 다양한 다리가 등장함으로써 가고자 하는 곳에는 갈 수 있게 됐다

최초의 다리는 기원전 4000년경 메소포타미아 지방에 아치형 다리를 있었다고 한다. 중국 <사기주본기>의 기록에 의하면 주나라 무왕(기원전 1134~1116년)이 은나라를 정벌할 때 ‘거교’라는 다리 이름이 기록됐으며, 현존하는 중국 최고의 석교는 수나라 시대에 건설(605~617년)된 홍계교형의 ‘안제교(하북성 조현)’가 있다.

한국의 다리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기록에 "十二年 秋八月 新城 平壤州大橋"라 했으니 신라 413년 8월에 평양주대교가 만들어졌다는 것과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동성왕조’에 “十二年 設熊津橋"이라 기록했다. 고구려의 경우 평양의 구제궁에는 통한, 연우, 청운, 백운이 있다고 했으나 지금은 그 자리를 찾을 수 없다고 한다. 신라 문무왕 660년에 만들어졌다는 옥천청석교가 있다. 불국사의 연화교, 칠보교, 청운교, 백운교가 남아 있는데 동경잡기. 9권. 불우조의 기록에 신라 경덕왕 10년(751)에 김대성이 가설하였다. 또한 고려 시대에는 개성의 선죽교가 있고, 조선 시대 석교로는 창덕궁 내의 금천교가 현존하는 제일 오래된 것으로 원형을 잘 유지되어 있고, 서울 중심부에 흐르는 청계천에는 수표교, 광통교, 장통교 등이 있었다.

현존하고 있는 다리를 도성의 다리, 궁궐의 다리, 성곽의 다리, 사찰의 다리, 마을의 다리로 나누어 차례로 찾아 나가보도록 한다. 도성이란 한 국가의 권력 상징인 왕이 거쳐 하는 궁성을 비롯하여 행정의 중심지에 내각인 궁성과 외곽인 나곽을 갖춘 형태의 성곽을 일컫는다. 고구려의 장안성, 백제 웅진 시대의 공산성, 사비 시대의 부소산성, 신라는 나곽을 갖추지 않는 금성, 고려 시대의 개성, 조선 시대의 한성이 있었다.

한성의 다리는 조선 태조 3년 한양으로 천도해 태조 5년에 도성을 축조를 마쳤다. 남쪽에는 목멱산(남산), 북쪽에는 백악산, 동쪽에는 낙산, 서쪽에는 인왕산이 둘린 분지형의 구릉과 계곡을 이은 지형에 성을 축조했다. 도성 내에는 백악산에서 발원한 청계천이 서에서 동쪽으로 흘러 중랑천을 만나 한강에 합류되면서 그 이름이 하나의 큰 강물이 되어 흘러 서해로 흘러 들어간다. 청계천은 도성 내의 작은 물줄기를 모두 연결했다. 물줄기마다 사람이나 우마차가 다닐 수 있는 크고 작은 다리를 놓았는데, 그 수가 76개소, 성 밖에 10개소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정확히 이름과 위치를 알 수 있는 곳은 69개소이다. 

도성 안의 최초의 다리는 경복궁 서쪽 바깥 지역에 금청교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그 흔적을 알 수 없고, 도성 내 처음으로 설치된 돌다리는 광통교이다. 태종 10년에 가설됐으며, 그 후 청계천의 오간수문을 거쳐 중랑천에 합류하기 전 영도교, 중랑천 상류의 송계교가 있었다. 하류에는 살꽂이교가 지금도 남아 있다. 현재 청계천에 남아 있는 석교는 광통교와 수표교이다. 수표교는 원래의 자리에서 장충공원으로 이건 되어 있는 상태이고 광통교만 옛 자리에 남아 있다.

▲ 광통교  

청계천은 개천이라는 이름에서 시작됐다. 일제 강점기 이전에는 ‘개천’으로 불렀다가 이후 하천이 정비되면서 청계천이란 새로운 이름을 같게 되었다. 백악산에서 발원한 청계천은 경복궁을 거쳐 이곳으로 오면서 큰 개천이 되었고 이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태종 11년(1411) 12월 하천을 정비하기 위한 개거도감(이듬해 개천도감)을 설치하고 1412년부터 대대적인 정비를 해 광통교와 혜정교 등 돌다리를 만들어 놓게 됐다. 세종 23년(1441) 홍수를 예방하기 위해 마전교 서쪽 수중에 눈금을 새긴 수표를 세워 개천의 수위를 측정할 수 있도록 했다. 청계천은 1925년부터 정비라는 명목으로 지금의 종로 신교동에서 도렴동까지의 백운동천, 옥류동천, 사직동천 등을 복개하고 1937년 태평로에서 무교동 구간을 복개되면서 청계천은 점점 모습을 감추기 시작했다. 1955년 광통교 상류, 1958년~1961년에는 광교에서 동대문운동장, 1965~1967년에는 청계8가 신설동까지, 1970~1977년에는 신답철교까지 복개가 되고 그 위에 청계고가 도로가 1971년 8월 15일에 완공됐다. 청계천이 복개되면서 옛 광통교는 자취를 감추었다가 2004년 4월에 옛 청계천이 빛을 보게 되면서 다시 광통교의 모습이 드러났다.

토교로 만들어졌던 광통교는 큰비가 내릴 때마다 다리가 떠내려가고 인명피해까지 지면서 태종 9년(1409)에 제왕의 능묘가 도성 밖에 있는데, 정릉만 도성 안에 있어 이를 도성 밖 지금의 성북동 정릉동으로 옮기게 됐다. 능을 옮긴 후 다시 홍수가 나면서 청계천의 토교는 사라지면서 이를 그대로 지켜볼 수 없어, 천장 후 남은 석재를 광통교를 만드는데 사용하게 됐다. 이 다리는 조선 왕조 500년 동안 어가행렬과 사신 행렬이 있을 때 이 다리를 이용하게 되었으므로 도성 제일의 다리로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광통교의 훼손은 일제 강점부터 시작됐다. 바로 옆 동쪽 편에는 전철이 놓이고, 확장하면서 양편에 철근 콘크리트로 보강했다. 이때 '달' 난간석이 원래 위치에서 확장된 다리 양편으로 옮겨졌다. 그 후 1923년 청계천 암거 공사를 하면서 북측 교대 가운데에 콘크리트 하수관을 박았고, 남쪽에도 배수 시설을 위해 토관을 박았다. 1954년 청계천 복개 때 서쪽 난간의 것이 사라지고, 1958년에는 동쪽 난간석이 사라졌는데 일부가 창경궁과 탑골공원으로 흩어졌다. 

▲ 광통교 석재 

전체가 복원되지 못하고 일부가 복원되면서 당시 신덕왕후 강 씨의 무덤에 사용되었던 석재가 청계천 좌우의 벽면에 옛 모습대로 쌓여 벽면을 이루고 있다. 석재는 병풍석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천상계를 상징하는 구름 속에 신선이 손을 모으고 서 있는 모습 석재와 우석으로 사용되었던 영저문양의 새겨진 석재가 바르게 또는 뒤집어 놓였다. 구름문양은 만물을 소생시키는 비를 내리게 하고 거두거나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모습 때문에 농경사회에서는 길흉을 점칠 수 있는 신령스러운 존재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왕권을 상징하는 용 대신 그보다 한 단계 낮은 구름문을 새김으로써 최고의 자리에 오르고 싶은 열망을 표출하는 방편으로 사용되어 신분 높은 권위와 위엄을 상징하기도 하였다. 옛사람들은 구름은 천신이나 신령들이 타고 다니는 것이라 했고, 세속을 벗어나 상서로운 이미지를 나타내기 위해서 용이나 학과 같은 상서로운 동물과 함께 나타내는 예가 많았다. 구름이 있는 곳은 그곳이 곧 하늘을 나타낸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하늘을 나타내었다는 것은 곧 천상계를 뜻한다.

▲ 광통교 석재

정비된 청계천을 따라 광통교 아래에서 발걸음을 멈춘다. 그리고 청판석을 받치고 있는 병풍석과 영저 앞에 서서 여말선초의 흔적을 엿보는 시간을 갖는다. 지금은 청계천의 명물로 신덕왕후에게 원한을 가졌던 태종의 복수라는 후대 사람들의 의견을 묻는다.

▲ 세종때 청계천에 놓였으나 지금은 장충단 공원으로 옮겨져 있는 수표교   

청계천의 또 하나의 석교는 수표교이다. 지금은 장충단공원에 이건 되어 있다. 수표교는 길이가 27m, 너비가 7m이다. 1959년 청계천 복원공사 때 신영동으로 이건되었다가 1965년 장충단공원 지금의 자리로 다시 옮겨 놓인 상태이다. 서쪽에 있었던 수표는 현재 세종대왕기념관 뜰에 이전되어 있다. 

▲ 수표교 교비 

수표교는 마전교라는 명칭으로 세종 2년(1420)에 개천에 놓은 다리이다. 다리 주변에는 우마시전이 있어서 붙어진 이름이다. 석교는 화강석을 다듬어 가구식으로 짜 맞추어 만든 석교이다. 석주의 아래는 매우 거칠게 다듬어진 네모난 돌로, 위로 올라올수록 다듬은 네모난 석주를 만들어 2단으로 포개 쌓으면서 물의 흐름을 유연하게 하려고 4 각주는 모서리를 물이 흐르는 방향에 맞추어 배열했다. 석주는 9줄 5열로 배열했고 기둥 위에는 양 끝을 반원으로 다듬은 긴 석재를 세로로 걸쳤고 그 위에 두 줄의 청판석을 가로와 세로로 짜 맞추어 바닥 면을 구성했다. 석교의 좌우 언저리에 6각의 석제를 다듬어 안전을 위해 난간을 세웠다. 각 언저리에 11개의 엄지기둥을 세우고, 그 사이 동자기동 1개씩 세워 난간석을 받쳤다. 난간의 부재에는 연화봉, 연잎 등을 모티브로 하여 조각 됐는데, 이것은 조선 시대 돌난간의 전형적인 형식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다리의 석주에는 수위를 측정할 수 있는 10척까지 눈금을 새기고, ‘庚辰地平(경진지평)’ 글을 새겨 수준(水準)으로 삼았고, ‘丁亥改造(정해개조)’·‘戊子禁營改造(무자금영개조)’등의 글씨가 남아 있어 여러 차례 수축하였음을 알 수 있다. 영조 때는 다리 동쪽에 준천사(濬川司)란 관청을 두어 홍수의 조절을 위해 수량의 변화를 한성판윤에게 보고하게 함으로써 중요한 역할을 한 다리로 남아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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