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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처럼 아름답기를 바라는 큰 의미를 담은 궁궐의 ‘금천교’2

▪문화재 : (보물) 창경궁 옥천교(昌慶宮玉川橋)
▪문화재 : (사적) 경희궁 금천교(慶熙宮 禁川橋)
▪문화재 : (사적) 덕수궁 금천교(德壽宮 禁川橋)

  • 기사입력 2022.03.04 01:11
  • 기자명 정진해 문화재 전문기자
▲ 창경궁 옥천교 

  

창경궁 정문인 홍화문을 들어서면 경복궁이나 창덕궁의 금천교보다 폭과 길이가 좁은 금천교인 옥천교가 자리하고 있다. 창경궁은 본래 세종이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의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지은 수강궁이었다. 1484년(성종 15)에 수강궁 자리에 별궁인 창경궁을 건립하였다. 5대 궁궐 가운데 다른 궁궐은 모두 남향을 하고 있으나 창경궁은 동향하고 있는데, 이것은 풍수지리설에 따른 것이다. 창경궁을 지을 때 옥천교는 금천인 옥류천을 가로질러 놓은 돌다리이다. 다리의 길이는 9.9m이고 너비는 6.6m이며, 정문인 홍화문과 정전인 명정전의 대문인 명정문 사이에 있다. 석교의 이름은 창건 당시 좌찬성이던 서거정이 지었다.

 

옥천교는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으로 모든 건물이 불탔으나 돌로 만들어진 옥천교만 피해를 보지 않았다. 창덕궁은 금천교에 이어 두 번째로 궁궐의 오래된 다리이다. 옥류천의 발원지는 창덕궁 후원이다. 창덕궁 후원의 옥류천과 이름은 같으나 다른 물줄기이다. 후원의 연경당 서쪽과 부용정, 관람정에서 발원한 물줄기는 세 갈래로 이 물줄기가 춘당지에 모였다가 남쪽으로 흘러 옥천교로 지난다. 이 물은 계속 흘러 창경궁 동남쪽으로 흘러 지금은 종로 5, 6가동을 거쳐 예장동 광장시장 인근에서 청계천과 합류된다. 지금도 옥천교 아래 금천은 흐르고 있으나 창경궁을 나간 물줄기는 모두 포장되어 어떻게 흐르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옥천교 아래로 지나가는 물길 바닥에는 화강석을 다듬어 편평하게 놓고 그 위로 물이 흐르도록 하였고 그 가운데에 다듬은 돌을 옥천교 위 다리 폭만큼 옥천 가운데에 선단석을 놓고 반원형의 두 홍예를 받치도록 하였다. 선단석 앞에는 그 높이에 네모난 돌을 놓았는데 창덕궁의 금천교처럼 해태상을 두고자 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두 홍예 사이에는 잠자리무사 귀면문을 보조한 돌을 끼우고 그 위에 얇은 댓돌을 하나를 길게 올렸다. 홍예 위에는 긴 무사석을 놓고 그 위에 2단을 쌓았다.

 

▲ 경희궁 옥천교 엄지기둥의 동물상 

 

다리의 상부에는 귀틀석을 놓고 청판석을 깔았다. 다리는 3개의 길을 만들었는데, 가운데는 좌우의 길에 비해 약간 높게 하였다. 이는 어도로 왕이 다니는 길이며, 또한 가운데에 물이 고이지 않고 좌우로 흘러내릴 수 있도록 하였다. 좌우에는 돌난간을 설치하였는데, 연꽃잎 모양의 하엽동자 기둥을 4개씩 세우고, 그사이에 한 장의 돌로 만든 풍혈판석을 끼웠다. 풍혈판에는 도드라지게 새긴 하엽동자기둥을 배치하고 두 개씩 마름모꼴의 풍혈을 뚫어놓았다. 난간 양 끝에는 엄지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동물 모양의 조각을 새겨서 다리에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하였다. 이 동물은 선악을 판단하고 정의를 지키는 해태의 모양이다. 이 다리를 건너는 신하는 몸가짐을 바로 하고 들어오라는 의미와 궁궐에 침입하는 다양한 악귀를 막아 신성한 공간에서 나라의 정사를 보라는 의미이다.

 

▲ 경희궁 금천교 

 

경희궁에도 창건하면서 만들었던 금천교가 있다. 경희궁이 처음 창 건 당시는 경덕궁이라 불렀다. 1617년(광해군 7)에 창건되었으나 흉궁이라고 꺼려 길지에 새 궁을 인왕산 아래 인경궁을 다시 창건하였다. 그런데 다시 정원군의 옛집에 왕기가 서렸다는 술사의 이야기에 그 자리에 궁을 세우고 경덕궁이라 하였다. 광해군은 경덕궁에서 정사를 펼쳐보지 못하고 인조반정으로 왕위에서 물러나고 정원군의 장남에게 왕위가 넘어갔으니 그가 곧 인조이다. 여러 왕이 경덕궁에서 태어나고 승하하고, 즉위식도 거행되었다. 영조 36년(1760)에 궁명을 경덕궁에서 경희궁으로 바꾸게 되었다. 1829년에 큰불로 많은 전각이 불탔으나 1860년(철종 11)에 전각을 부분적으로 복원을 하였고, 경복궁을 복원하면서 경희궁의 자재를 이전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건물 대부분 철거되면서 그 자리에 일본인들의 학교인 경성중학교가 궁궐터에 자리를 잡게 되면서 남아 있던 건물은 철거되어 없어지거나 다른 곳으로 이전되었다. 궁역도 각종 건물이 들어섰고, 대한민국 수립 이후 서울 중고등학교로 사용되면서 궁궐의 흔적은 땅속으로 묻혀버렸다. 궁궐이 불이 나도 돌로 만들어진 금천교는 원형을 잃지 않았지만, 1988년 경희궁 복원계획이 실시되면서 자리를 떠나 있던 흥화문이 지금의 위치로 이전 복원되었고, 숭정전은 현재 동국대학교 구내에 자리하고 있으나 옮겨오지 못하고 옛 모습으로 복원된 상태이다.

  

그러나 경성중학교가 들어서면서 땅속 깊이 묻혀있던 있던 금천교가 2001년 발굴하면서 복원되어 서울시립박물관 앞에 자리하고 있다. 지금은 물이 흐르지 않은 상태이지만, 과거 금천교 아래로 흐르던 금천은 경희궁 안에서 발원해 흐르는 물이었다. 궁내에서 발원한 금천이 별도의 이름을 갖지 못하고 ‘경희궁내수(慶熙宮內水)’라고 불렀었다. 북서쪽이 높은 위치이고 남동쪽이 낮은 곳에서 높은 곳에서 모인 물이 경희궁을 빠져나오면서 지금은 새문안로를 가로지르자마자 동쪽 정방향으로 바뀌면서 광화문 사거리에서 청계천에 합류된다. 지금은 물줄기를 알 수 없게 모두 복개가 되어있어 옛 모습을 예측하기 어렵다.

 

▲ 경희궁 금천교 서수 

 

금천교는 귀틀석이나 청판석, 난간석 등 대부분이 새 돌을 다듬어 복원하였는데 그 형태가 창덕궁 금천교와 매우 흡사하다. 다리 윗부분의 동, 서 가장자리엔 각각 6개의 돌기둥을 설치한 뒤 그사이마다 난간을 설치했다. 돌기둥 중 엄지기둥의 머리 부분엔 서수를, 조각하여 올렸고 나머지 동자주엔 연잎을 아래로 덮은 모양에 염주로 연꽃봉오리 사이를 잘록하게 조인 모양으로 조각하여 장식했다. 기둥 사이마다 판석을 세웠는데, 풍혈판석은 하엽동자기둥 모양의 부조를 중심으로 풍혈을 2개 뚫어놓았다.

 

엄지기둥을 제외한 나머지 기둥 밑에는, 멍엣돌에서 튀어나온 돌로 천록 머리 상을 조각해서 놓았다. 이는 외부의 잡귀를 막는 상징적 경계인 금천에 사악하고 나쁜 것을 물리치는 동물인 천록을 둠으로써 궁궐의 신성함을 더욱 돋보이려 했다. 두 홍예 사이에는 잠자리무사 귀면문을 보조한 돌을 끼우고 그 위에 얇은 댓돌을 하나를 길게 올렸다. 홍예 위에는 긴 무사석을 놓고 그 위에 2단을 쌓았다.

 

덕수궁의 금천교는 정문인 대한문과 중문인 조원문 사이에 있다. 덕수궁은 임진왜란 이후 기존의 궁궐이 모두 불타 월산대군의 사저를 중심으로 주변의 집들을 사들여 쓴 임시 행궁이었다. 1890년대 후반 고종이 이곳으로 이어 한 후 비로소 제대로 정문, 중문, 침전, 편전 등을 지었다. 그때 금천도 팠고 금천교도 세웠다. 대한제국 초기 덕수궁의 정문은 인화문이었고 중문은 돈례문, 정전은 지금의 즉조당인 태극전이었다. 처음에는 지금의 중화전 마당에 금천과 금천교가 있었다. 1901년(광무 5년)에 새로운 중화전 공사를 시작하면서 대안문과 조원문 사이에 새롭게 금천을 팠고 금천교를 놓았다.

 

▲ 덕수궁 금천교 

  

금천교 밑을 흐르던 덕수궁의 금천은 ‘정릉동천(貞陵洞川)’이라 하였는데, 물줄기는 두 갈래로 하나는 옛 러시아공사관 근처에서 발원하여 정동 길을 따라 흐르고, 또 다른 한 갈래는 지금의 삼성플라자 부근에서 발원하여 세종대로를 따라 흘렀다. 두 물길은 덕수궁 대한문 근처에서 합류하여 약간 틀어 덕수궁 경내를 지나게 했으며, 이를 금천으로 삼았고, 이 물이 지금의 서울시청 앞쪽에서 창동천과 만나 청계천으로 흘러들었다.

 

금천교는 다른 궁궐의 금천교에 비해 간결한 구조이다. 다리의 위엔 귀틀석과 청판석이 교대로 배열하면서 표면이 거칠지 않고 잘 다듬어진 화강암으로 이루어졌다. 3개의 돌길은 가운데가 어도로 좌우의 신하가 다니는 표면보다 약간 높다. 다리 좌우에는 각각 2개의 돌로 엄지기둥을 세우고 그사이마다 동자주를 7개를 놓고 8각형의 긴 돌을 올려 난간을 설치했다.

 

엄지기둥 위에는 모래시계 형태의 가운데를 구슬이음문을 장식하고 위아래에는 연꽃의 잎사귀를 더하여 표현하고 그 위에 연화봉을 장식하였다. 동자주도 가운데에는 염주문을 나타내고 위아래에는 연꽃의 잎사귀를 더하여 표현하였다. 위쪽의 잎사귀는 바닥을 향하고 있으며 아래쪽의 잎사귀는 위쪽을 향하고 있다. 잎은 뒷면의 잎맥까지도 자세하게 나타내었다. 다리 아랫부분에 무지개 모양의 아치를 2개 만들었다. 바닥에 자갈을 높게 깔아서 선단석의 형태를 알 수 없으며, 잡귀의 침입을 막는 상징적 천록이나 해태상 등이 있는지 알 수 없다. 다리 앞에는 하마비가 세워져 있다. 원래의 위치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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