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시들지 않는

  • 기사입력 2022.03.04 10:45
  • 최종수정 2024.02.03 15:21
  • 기자명 김희재 작가
▲ 김 희 재 (수필가, 한국어 교육 전문가)  

                                       [Ⅰ]

아침볕이 제법 따갑다. 모자를 썼는데도 눈이 부시다. 주말이라 그런지 드넓은 주차장에 빈자리가 없다. 어디서 단체로 왔는지 목에 명찰을 건 사람들이 떼 지어 걷는다. 다들 손에 꽃을 한 다발씩 들고 있다. 색이 고운 플라스틱으로 만든 꽃이다. 생화(生花)보다 더 진짜 같은 조화(造花)를 든 그들은 포장도로를 따라 걷고, 나는 ‘보훈 둘레길’로 들어선다. 

언제나 넉넉하게 품을 내주는 국립대전현충원 둘레길이다. 혼자 걸어도 두렵지 않은, 잘 다듬어진 산책길이다. 멀리서 보기엔 야트막한 동산인데 안으로 들어가면 잘생긴 소나무가 울창하다. 지천으로 떨어진 솔잎이 푹신하다. 소나무 숲을 지나면 바로 대나무 숲으로 연결된다. 대숲에 들어서니 바람 소리가 솔숲과는 확연히 다르다. 소리뿐 아니라 느낌도 다르다. 

대숲을 빠져나와 한 굽이 돌면, 무수히 많은 비석이 대오를 가지런히 맞추고 있는 넓은 묘역이 보인다. 햇볕 아래 묘비가 하얗게 빛나고 있다. 그 앞에 놓인 꽃 색깔이 알록달록 선명하다. 순국 영령(殉國 英靈)들이 계시는 곳이라 그런지 음습한 기운은 전혀 없다. 오히려 따뜻하고 밝고 당당한 기운이 가득하다. 나는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리어 묘역으로 들어갔다. 

작고 소박한 묘비엔 아무런 장식도 없었다. 앞에는 계급과 이름만 새겨 있고, 뒷면에 두어 줄 짤막하고 간결한 문장으로 고인의 삶을 요약해 놓았다. 비슷하면서도 겹치지 않는 사연들이 대하 드라마보다 더 방대하고, 끝없이 이어졌다. 고인(故人)들이 담담한 말투로 명료하게 들려주는 이야기 같다. 겨우 스무 살 남짓 살고 가신 분들도 많았다. 묘역을 천천히 걷다 보니, 나도 모르게 가슴이 벅차오르고 눈물이 울컥 넘어왔다. 

묘비마다 똑같은 모양의 작은 화병이 놓여있고, 형형색색(形形色色)의 조화(造花)가 빠짐없이 다 꽂혀 있다. 생명 없는 플라스틱 꽃은 조화(弔花)로 바쳐지는 순간, 진짜 꽃보다 더 아름답게 빛난다. 사시사철 시들지 않는 그 꽃다발들 덕분에 현충원 묘역은 언제나 화사한 꽃동산이 되었다. 

                                                                [ Ⅱ ]

이집트 카이로 박물관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곳은 ‘투탕카멘 전시관’이었다. 그곳에는 유명한 황금마스크를 비롯해 어마어마하게 많은 황금유물이 있었다. 황금마스크의 주인은 투탕카멘이었다. 그는 아홉 살에 즉위해 열여덟 살에 비명횡사(非命橫死)한 비운의 파라오였다. 어린 파라오와 동갑내기 왕비는 금슬이 아주 좋았다. 전시되어있는 그림 속 파라오 부부는 여전히 풋풋하고 사랑스러웠다. 

살아생전에 모든 역량을 다 동원해서 자신이 들어갈 웅장한 피라미드를 지었던 역대 파라오들과는 달리, 어린 투탕카멘은 아무 준비도 못 하고 갑자기 돌아갔다. 람세스의 왕조기록에도 오르지 못한 그의 작은 피라미드는 차츰 세간의 이목에서 멀어졌고, 마침내 흔적조차 찾기 힘들어졌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까닭에 투탕카멘은 도굴범의 손을 피할 수 있었고, 많은 부장품과 함께 세월의 강을 무사히 건너올 수 있었다. 

사람들의 기억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던 투탕카멘의 피라미드는 영국 출신의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의 집념 어린 노력으로 발굴됐다. 나이도 어리고, 왕의 위엄을 갖추기도 전에 급사(急死)한 그의 작은 무덤에서 대박이 터졌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보물의 출현에 전 세계가 깜짝 놀랐다. 

투탕카멘의 피라미드를 열고 들어간 하워드 박사가 가장 감동한 것은 황금유물이 아니었다. 관 주변에 놓여있던 작은 꽃다발이었다. 그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그 꽃다발은 남편을 잃은 어린 아내의 마음이었다. 찬란한 제왕의 호화로움과 화려함도 무색하게 하는, 여전히 아름답고 아련한 그리움이었다. 3천 3백 년이란 긴 세월조차 극히 짧은 시간임을, 어제와 오늘의 경계에 불과함을 말해주고 있다.’

하워드 박사가 전해 준 애틋한 사랑 이야기는 가이드의 입을 통해 계속 전해졌다. 사람들은 꽃다발을 보러 우르르 몰려갔고, 나도 그 틈에 끼어있었다. 단단히 밀봉해 둔 덕분에 오랜 시간을 잘 견뎌낸 꽃다발은 유리 상자 속에 들어있었다. 겉보기엔 그저 바싹 마른 초콜릿색 건화(乾花)에 불과했다. 다행히 내 눈에도 3천 년 세월도 뛰어넘은 애절한 그리움이 보였다. 꽃에 담아 둔 마음은 조금도 시들지 않았다. 말로 설명하기 힘든 감동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내가 카이로 박물관에 다녀온 지도 벌써 25년이 넘었다. 황금마스크와 함께 전시관에 즐비했던 황금으로 된 물건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다 잊어버렸다. 하지만 쓰레기나 다름없던 마른 꽃다발의 모양은 지금도 또렷하게 떠오른다. 눈물을 흘렸던 기억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정말로 귀한 것은 그 가치를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공정사회
경제정의
정치개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