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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평화》에서 《안나카레니나》로

[연재 10회]당시 실제로 있었던 한 여인의 열차 투신자살 사건을 소재로

  • 기사입력 2022.03.11 12:01
  • 기자명 이정식 작가

《안나 카레니나》 역시 오랜 구상과 준비 끝에 집필에 착수하게 되는데, 아내 소피야의 일기 가운데 이에 관한 대목이 기록되어 있다. 소피야는 1870년 2월 24일 이 작품과 관련해 남편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어제 남편이 나에게 말하길, 순결하지 못한 상류사회의 기혼 여성상이 떠올랐다고 했다. 남편은 또 자신의 임무는 이 여인을 애처롭고 비난받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 여인의 주위를 맴도는 일련의 남성상도 떠올랐다고 말했다.(《톨스토이》)

1870년이면 톨스토이가 《전쟁과 평화》를 마무리한 다음 해다. 그는 1873년부터 1877년까지 4년에 걸쳐 이 소설을 쓴다. 주인공 안나에게 초점을 맞 추어보면 《안나 카레니나》의  줄거리는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젊고 뛰어나게 아름다운 안나의 남편은 스무 살이나 나이가 많은 재미없는 관리 카레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나는 남편을 존경하고 어린 아들과 활기찬 나날을 보낸다. 그러나 기차역에서 젊은 총각 브론스키를 만나면서 모든 것은 변한다. 브론스키와 눈이 맞아 공공연히 바람을 피우다가 딸까지 낳으면서 안나의 가정생활은 사실상 파국을 맞는다.

남편과 아이와 모든 것을 버리고 사교계에서도 배척받은 그녀가 기댈 곳은 브론스키의 사랑뿐이지만 브론스키는 그러한 안나가 부담스럽다. 안나에 대한 그의 애정도 차츰 식어간다. 브론스키의 변심을 알아차리고 절망에 빠진 그녀가 갈 곳은 없었다. 안나는 마침내 기차역 플랫폼으로 들어오는 화물 열차에 뛰어들어 생을 마친다. 

단순히 한쪽 면의 줄거리만 보면 통속 소설이요, 요즘 흔히 말하는 불륜 드라마다. 그러나 소설 전체를 흐르는 인간 심리에 대한 통찰력 있는 분석, 19세기 러시아 사회의 문제와 지식인들의 깊은 고민, 러시아의 자연에 대한 아름다운 묘사 등 예술적 가치가 통속성을 초월함으로써 지금까지도 세계 최고의 문학 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문학가들은 예술적 완성도 면에서는 《전쟁과 평화》보다 《안나 카레니나》를 더 높이 인정하고 있다

▲ 모스크바의 톨스토이 박물관과 톨스토이 박물관 내부 

 ◉실제로 있었던 한 여인의 열차 투신자살사건

도스토옙스키가 신문에 보도된 사건에서 소설의 소재를 많이 찾았듯 톨스토이의 작품들 역시 그가 알게 된 사건과 이야기에서 출발한 경우가 많다.

《안나 카레니나》의 여주인공이 마지막에 열차에 뛰어들어 자살하는 장면은 매우 충격적인데, 실제로 그러한 일이 소설을 구상하던 당시 톨스토이 주변에서 있었다. 사건은 1872년 1월 톨스토이의 저택이 있는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멀지 않은 야센키 역에서 발생했다.

톨스토이의 이웃에 안나 스테파노브나 피로고바야란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지주 비비코프의 정부였다.그런데 비비코프가 변심해 아들의 가정교사에게 청혼을 했다. 이 사실을 알고 나서 절망에 빠진 그녀는 어느 날 야센키역에 나가 화물열차에 몸을 던진다.

톨스토이는 이때 일부러 야센키역에서 실시된 검시에 입회했다. 시체는 참혹했다. 톨스토이는 깊은 생각에 사로잡혔다. 《안나 카레니나》에서 열차에 몸을 던지는 안나의 비극적 종말은 바로 이러한 사건에서 영 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안나란 이름도 여기에서 온 것이 아니었을까.

▲ 영화<안나카레니나>(2012)에서 안나역을 맡은 영국 출신 배우 키이라나이틀리 

◉그러면 왜 여주인공이 자살로 생을 마무리 하도록 했을까?

그때까지의 소설이나 연극, 오페라에서는 남편을 배신하거나 사랑의 약속을 저버린 여인을 남자들이 살해하는 일이 흔했다. 톨스토이도 고민했 을 것이다. 그러나 톨스토이는 ‘탈선한 여자를 징벌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마땅히 신이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안나로 하여금 스스로 화물열차에 뛰어 들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

《안나 카레니나》는 톨스토이가 연재를 약속한 <러시아 통보>에 1875년 1 월에 첫 원고가 실렸다. 작품은 1877년에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러시아 통 보> 발행인인 카트코프와의 견해 차이로 안나가 자살한 후의 에필로그에 해 당되는 8부는 <러시아 통보>에 실리지 않고 별도의 단행본으로 발표되었다.

도스토옙스키는 《안나 카레니나》에 대해 “완벽한 예술 작품이며 현재까 지 발표된 유럽 문학 작품들 가운데 비견할 만한 것을 찾아볼 수 없는 작품” 이라고 격찬했다.

《안나 카레니나》 역시 《전쟁과 평화》를 쓸 때처럼 아내 소피야가 정서를 해주었다. 톨스토이는 그러한 정성에 대한 보답으로 소피야에게 2개의 큰 루비가 박힌 반지를 선물로 사 주었다. 이 반지는 지금 톨스토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모스크바 하모브니키 톨스토이 저택 

◉명문가 출신 모친이 가져온 부(富)

레프 톨스토이는 데카브리스트 혁명 3년 후인 1828년 야스나야 폴 랴나(러시아 말로 ‘숲속의 양지바른 초지’란 뜻)에서 니콜라이 일리치 톨스토이 (1797~1837)와 마리야 니콜라예브나 발콘스카야(1791~1830)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톨스토이의 집은 아버지 니콜라이가 결혼할 무렵 가세가 기울어 경제적 으로 어려웠다. 그런데 니콜라이가 한 해 전 세상을 떠난 부유한 발콘스키 공작의 외동딸 마리야와 결혼하면서 집안에 엄청난 재산이 굴러들어오게 되었다. 

그래서 이 결혼을 기울어져가는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한 니콜라 이의 정략결혼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아무튼 마리야와의 결혼으로 야스나야 폴랴나의 저택과 1천500헥타르의 땅을 비롯한 마리야의 막대한 상속 유산이 톨스토이 집안의 재산이 되었다.

마리야는 31세 때 결혼했다. 당시로서는 매우 늦은 결혼이었다. 신랑보다 도 여섯 살 위였다. 원래 약혼자가 있었는데 결혼 전에 죽었다. 그 바람에 결 혼이 늦어졌다. 톨스토이의 아버지 니콜라이 일리치 톨스토이는 가진 것은 별로 없었으나 인물이 좋았다.

니콜라이는 나폴레옹 전쟁 때 장교로 참전해 성 블라디미르 훈장까지 받고 육군 중령으로 제대했다. 데카브리스트의 혁명은 그가 군대를 떠난 지 6년 후 에 일어났다. 데카브리스트들 중에는 그의 친구들도 몇 명 있었다고 한다.

▲모스크바 하모브니키 톨스토이 저택 박물관 내부.

◉졸지에 고아가 된 5남매

부부는 결혼 후 1~2년 터울로 네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어머니 마리야는 니콜라이, 세르게이, 드미트리, 레프 그리고 끝으로 마리야를 낳고는 1830년 마흔도 안 되어 세상을 떠났다. 딸을 출산하 다가 얻은 산욕열이 원인이었다. 레프가 두 살 때였다. 레프는 아홉 살 때인 1837년 아버지마저 잃었다. 니콜라이가 툴라에 일을 보러 갔다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사망 원인에 의심스러운 구석도 있다 고 전해진다. 아무튼 5남매는 졸지에 고아가 되었다.

톨스토이의 형제들은 아버지가 죽고 나서 친척집을 전전하게 된다. 톨스토이 형제들이 카잔에서 대학을 다니게 된 것도 카잔에 후견인이 된 작은 고모 베라게야 일리니치나 유시코바 백작 부인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학시절 어학에 소질보여

톨스토이는 카잔대학에서 동양어학부의 아랍・터키어과를 다녔 다. 그는 입학시험에서 아랍어, 터키어, 타타르어에 만점을 받았을 만큼 어학에 소질을 보였다. 그러나 톨스토이는 대학교육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던 모양이다. 졸업을 하지 않은 채 대학을 그만두었다. 그 후 스물세 살 때인 1851년 휴가를 나왔던 큰형 니콜라이를 따라 카프카스에 갔다가 그곳의 포병 여단에 자원 입대해 장교가 되었다.

▲ 모스크바 하모브니키 톨스토이 저택 정원에 세워져 있는 노년의 톨스토이 부부 사진 

틈틈이 글을 써 왔던 톨스토이는 1852년 카프카스에서 그동안 써 온 《유 년시대》를 마무리해 당시의 유명 시인 네그라소프가 편집인으로 있던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문학잡지 <현대인>에 보냈다. 네그라소프는 《유년시대》를 읽고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톨스토이에게 보냈다.

원고는 잘 읽었습니다. 대단히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곧 잡지에 발표하겠습니다. 다른 글은 보지 못했기 때문에 단언할 수는 없지만 당신에게는 충분한 자질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 이 작품은 당연히 속편이 있을 것으로 기 대됩니다만 ‘움직임’이 좀더 가미된다면 훨씬 훌륭한 소설이 되리라고 생각합 니다. 다음 작품도 계속해서 나에게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 그리고 당신 이 우리 문단의 일시적인 손님이 아니라면, 익명으로 하지 말고 정정당당하게 이름을 밝혀서 내놓는 게 좋지 않을지, 권해드리는 바입니다.

톨스토이는 당시 그의 앞 이름의 이니셜 ‘L. N.’이라는 이름으로 원고를 보 냈다. 처녀작 《유년시대》는 그해 9월 <현대인>에 실렸으며, 익명이긴 했지만 그가 처음 세상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투르게네프는 이 작품을 읽은 후 “이 작가가 오래 산다면 틀림없이 우리를 놀라게 할 것이다”라고 칭찬했다고 한다.

▲ 장교 시절의 톨스토이(1854) 

◉황후가 읽고 감동한 《12월의 세바스토폴》

톨스토이는 1855년에는 한창 전쟁(크림 전쟁) 중이던 흑해 연안 크림 반도의 세바스토폴 전투에 투입되었다. 본인이 자청한 것이었다고 한다. 전쟁은 1853년 10월 러시아와 터키 사이의 분쟁으로 촉발되었는데,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저지하기 위해 이듬해 3월 영국과 프랑스가 러시아에 선전포 고를 했다. 세바스토폴은 크림반도 남단 의 항구도시로 러시아 흑해 함대의 기지가 있는 곳이다. 세바스토폴을 두고 치열한 공방전이 펼쳐졌다. 공방전은 1854 년 10월부터 이듬해 9월까지 1년간이나 계속되었다.

톨스토이는 이 전쟁터에서 《12월의 세바스토폴》(1855년 4월), 《5월의 세바스토폴》(1855년 7월), 《1855년 8월의 세바스토폴》(1855년 12월) 등 3편의 작품을 써서 <현대인>에 보냈다. 전쟁의 참상, 포위된 세바스토폴에서 러시아 병사들과 주민들이 보여준 용기와 희생정신 등을 담은 것이었다.

세바스토폴에서 처음 써 보낸 《12월의 세바스토폴》은 <현대인> 1855년 6월 호에 실렸는데, 알렉산드르 2세의 황후가 먼저 읽고 감동해 남편에게 읽도록 권했다. 알렉산드르 2세는 이 작품을 프랑스어로 번역할 것과 이 작가를 위험 한 곳에 보내지 않도록 하라고 지시했다고 전해진다.

▲ 야스나야 폴랴나 저택에서 집필 중인 톨스토이(그림)

《1855년 8월의 세바스토폴》은 이듬해인 1856년 1월호에 실렸다. 톨스토이의 이름을 정식으로 내건 최초의 작품이었다.

니콜라이 1세는 전쟁 중인 1855년 2월 사망했고 전쟁은 러시아의 패배로 1856년 3월에 끝났다. 그리고 황위를 계승한 알렉산드르 2세에 의해 30년 만에 데카브리스트들에 대한 사면령이 내려졌다. 

◉《안나 카레니나》후 소설《데카브리스트》의 재집필을 시도했지만.

톨스토이는 1856년 11월 군에서 제대했다. 그리고 소설 《데카브리스트》를 구상하고 이를 위해 나폴레옹 전쟁 등을 깊이 탐구한 결과 역사적인 대장편소설 《전쟁과 평화》를 탄생시켰다. 그리고 그 뒤 40대 후반에 《안나 카레니나》로 창작의 꽃을 활짝 피웠던 것이다.

▲ 모스크바 톨스토이 공원에 있는 톨스토이 동상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를 쓴 직후 다시 한 번 《전쟁과 평화》의 속편이 될 《데카브리스트》의 집필을 시도한다.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상트페테 르부르크에도 가고, 생존해 있던 당시의 데카브리스트들도 만났다. 톨스토이는 정부의 문서 보관소에 있는 당시의 자료들이 필요했으나 당국은 자료의 열람을 허락하지 않았다. 《데카브리스트》를 쓰려던 톨스토이의 오랜 노력은 아쉽게도 여기에서 중단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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