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임금이 건넜고, 백성이 건넜던 도성 밖 석교(石橋)

보물 :서울 살곶이다리(서울 성동구 행당1동 58번지)
경기도 유형문화재:만안석교(경기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679번지)
경기도 유형문화재:고양 강매석교(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강매동 660-10)

  • 기사입력 2022.03.18 08:31
  • 기자명 문화재 전문기자 정진해
▲ 살곶이 다리  

한양도성 밖에는 많은 석교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일제강점기와 6.25 한국전쟁, 그리고 도시의 개발로 인해 다리는 그 자취를 감추었다. 그중에서 서울 경기에는 3기의 석교가 남아 있는데, 청계천과 중랑천이 한강으로 유입되는 곳에 살곶이다리라고 불리는 진곶교(사적)가 자리하고, 안양시에 정조대왕이 수원으로 행차하기 위해 건넜던 만안교, 한강 서부지역 사람들이 서울로 오가기 위해 건넜던 강매석교가 남아 있다.

초기에는 대부분 목교가 있었는데, 홍수로 인해 쉽게 자취를 감추는 것보다 오랫동안 다리로서의 제 역할을 하기 위해 차츰 석교로 바꿔 나갔다. 궁궐의 다리와 도성의 다리와는 다른 임금과 백성이 함께 넘어야 했던 다리가 곳곳의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고, 길과 길을 이어주던 다리가 곳곳에 자리 잡은 석교이다. 조선 시대 이전에는 석교보다 목교가 유행했었다. 조선 시대로 넘어오면서 목교는 석교로 교체되기 시작하였다.

▲ 살곶이 다리  

조선 시대 최장교로 알려진 살곶이다리는 전장 76m에 이르는 긴 석교이다. 조선 세종 2년(1420) 5월 태종을 위하여 박자청에 명하여 중랑천 위에 석교를 놓기 위한 작업이 시작되었다. 이곳은 정종과 태종이 흥인지문을 나와 사냥을 자주 나왔던 진관평(살곳이벌)이다. 다리 공사는 진척이 없었다. 중랑천의 물살이 빨라 당시의 기술로 석교를 놓을만한 여력이 되지 않는 관계로 공사는 중단되었다. 사냥하러 다니던 정종은 1419년에, 태종은 1422년에 세상을 떠나면서 이 다리에 대한 관심이 없어졌지만, 백성들이 건너다닐 수 있게 목교였지만, 홍수로 인해 떠내려가 불편을 겪게 되자 세종이 목교를 석교로 고쳐 만들라고 하였다. 방치된 석교는 백성들의 왕래가 잦아지면서 성종 6년(1475)에 공사가 재개되어 성종 14년(1483)에 석교가 완공되면서 ‘제반교’라 불렀다.

<연려실기술>의 기록에 의하면, 살곳이벌은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돌아오는 살곶이벌로 마중 나온 태종 이방원을 보고 화가 나서 화살을 날렸다. 태종은 날아오는 화살을 보고 차일 기둥 뒤로 피하자 화살은 차일 기둥에 꽂혔다. 그래서 ‘화살이 꽂힌 곳’이란 뜻에서 ‘살곶이벌’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화살 전자에 교외라는 교자를 합쳐 전교라고도 한다. 또는 동교, 전관평으로 불렀다. 동교는 도성의 동쪽에 있는 들을 의미함이요, 전관평은 전관 즉 살곶의 벌을 의미한다.

조선의 문신인 서거정이 살곶이벌에서 ‘손바닥처럼 판판한 들에 풀은 돗자리 같은데, 맑게 갠 날 따뜻한 바람이 사람을 훈훈케 하네. 아침에 푸른 적삼 잡히어 술을 사 가자고 삼삼오오 벗을 지어 봄놀이를 나서는 곡수유산(曲水流觴)의 술잔을 속속 돌리다 보니, 고래처럼 마셔대다가 술병은 쉬 말라버렸네. 밝은 달밤에 준마 타고 집으로 돌아갈 때는 옥피리 소리 잦아들 제 살구꽃은 떨어지네."라고 하였다.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장석판교 중 가장 큰 규모의 석교이다. 가로로 세워진 석주는 4열, 세로로 16열에 모두 64개의 석주로 이루어진 다리이다. 다리의 높이는 4척 내외, 석주의 높이는 4척가량, 좌우의 교안을 장대석으로 가지런히 놓고 내모난 난 돌기둥 교각 16개소를 세웠다. 교각의 간격은 대략 11~13척 정도이며, 돌기둥 위를 3장의 장대석을 건너지른 다음 그 위에 다시 귀틀석을 놓아 청판석을 받게 한 구조이다. 기둥석 아래에는 물밑의 받침석이 네모난 주춧돌을 지탱하고 있으며, 주춧돌 사이에는 포석을 깔아 기초를 단단히 하였다. 따라서 물이 줄 때는 이 포석 면이 드러나 ‘이층다리’라고도 불렀다. 돌기둥은 흐르는 물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 마름모형으로 만들어져 있다. 큰 혹띠기로 표면을 가공하였고 조립할 때 잔돌을 많이 사용하여 뜬 곳을 메웠으며 돌난간은 없다.

▲ 살곶이 다리 석주  

1913년에 다리 윗면을 콘크리트를 사용하여 보수하였으며, 1925년에 서울 지역의 을축년 대홍수로 다리 일부가 물에 떠내려간 채 방치되었다. 그 후 1938년 5월에 이 다리 옆에 성동교가 가설되자 이 다리는 방치되어 있다가 1972년에 서울시가 무너진 다리를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하는 과정에서 하천의 폭이 원래보다 넓어져 있었기 때문에, 다리 동쪽에 27m 정도의 콘크리트 교량을 잇대어 증설함으로써 원래의 모양과는 다소 차이가 난다.

▲ 만안석교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에는 정조가 사도세자의 묘역인 현륭원을 참배하고자 놓은 만안교라 불리는 홍예교가 있다. 처음에는 임시로 가설한 나무다리였으나 정조가 수원 화성을 정기적으로 왕래하게 되면서 영구적인 석교를 만들게 되었다. 

서울에서 수원으로 가는 길은 한강을 넘어 노량진에 닿은 뒤 과천을 지나 남태령을 넘어 인덕원을 지났다. 남태령을 넘는 길이 험했기 때문에 정조는 수원 화성까지 능행에 편리함을 도모하고자 새롭게 길을 닦았는데 이 길이 시흥대로의 시초이다. 새 길은 금천을 지나 안양의 삼막천을 건너 수원에 이르는 길이었고, 이때 삼막천을 건널 다리로 만안교를 축조하게 되었다. 1795년(정조 19년) 경기도 관찰사 서유방은 돌다리를 만들라는 어명을 받고 3개월에 걸쳐 만안교를 축조하였다. 만안교라는 교명은 ‘만 년 동안 백성들이 편안하게 건널 수 있든 다리’라는 의미를 담아 정조가 직접 붙인 이름이다.

▲ 만안석교 홍예

길이 31.2m, 너비 8m의 다리는 7개의 홍예를 두어 물이 아래로 흘러가도록 하였다. 홍예는 하단부부터 곡선을 그려 전체의 모양은 완전한 반원형을 이루고 있다. 7개의 홍예 사이에는 크고 작은 선단석, 장군형 또는 잠자리무사형으로 다듬은 무사석을 차곡차곡 쌓아 빈틈없이 매웠다. 홍예 상단의 이맛돌은 중앙부를 둥글게 다듬은 장군형 무사석으로 연결하고, 그 윗면에 장대석을 쌓아 길바닥을 형성하였다. 홍예의 바닥에는 박석을 깔아 물의 흐름에 다리가 상하지 않게 하였으며, 다리 기둥의 모서리를 물의 흐름에 마찰을 줄이기 위해 마름모꼴로 하였다.

안양천은 일제강점기 직강화 공사를 하면서 물길이 바뀌어 만안교로는 더 이상 물이 흐르지 않았다. 그 이후 도로 공사와 도시화 과정에서 훼손이 있었는데 1972년의 기록에는 만안교의 상당 부분이 땅에 묻혀 있었다. 만안교는 원래 위치가 남쪽으로 약 200m 떨어진 만안로 입구에 있었으나, 1980년 국도 확장으로 지금의 위치로 이전 복원하였다.

▲ 만안교비

다리 남쪽에는 축조 당시 세운 <만안교비>가 있다. 이 비는 만안교를 세운 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사적비이다. 귀부와 비신, 가첨석을 갖춘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석비 양식이다. 석비의 전체 높이는 311cm, 비신의 높이는 165cm이다. 귀부는 하나의 돌로 마련하였는데 판석형 2매의 지대석을 놓고 올려놓았다. 하대석은 높이 15cm 정도의 받침을 귀부의 형태에 따라 마련하였다. 귀부의 발가락이 4개이며 다리를 웅크리고 앉아있는 형태이며, 꼬리는 오른쪽으로 휘어져 있다. 귀갑은 무문이고 위에 꽃무늬 형태로 돌리고 모서리 부분을 오메가형으로 장식하였다.

▲ 만안교비 

비신 전면에는 ‘萬安橋(만안교)’라 음각하고 붉은색을 칠하였다. 비신 후면에는 축조 담당자였던 경기도 관찰사 서유방이 글을 짓고 조윤형이 글씨를 쓴 축조 유래인 〈음기〉가 쓰여 있다. 〈음기〉에는 돌다리를 축조하게 된 경위와 정조가 직접 다리의 이름을 지었다는 내용과 다리를 축조한 뒤 관련자에게 포상이 있었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비의 앞면엔 유한지가 예서 대자로 쓴 만안교라는 다리 이름이 새겨져 있다. 비의 측면에는 다리의 축조에 관여한 관리의 이름들이 적혀 있다. 특히 비문에는 갑문이 5개라고 기록하였는데, 실제 7개였던 것으로 보아 오기로 보인다. 유한지는 <유한지 예서 기원첩>을 남긴 조선 후기의 문필가로 김정희에 앞서 전서와 예서를 잘 쓴 인물로 유명하다.

▲ 강매석교  

고양시에 또 하나의 석교가 있다. 고양시 덕양구 강매동 강고산마을 창릉천변에 위치한다. 석교의 전체 길이는 17.7m, 폭은 3.57m로 상판을 받치는 지주는 모두 24개로 구성되었으며 그 위의 청판석은 100개로 2열로 배치되어 있다. 이 석교의 귀틀석 가운데에 ‘江梅里橋 庚申新造(강매리교 경신신조)’라 새긴 명문을 통해 1920년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강매리’는 대한제국의 리동합병 정책에 따라 1910년 8월 25일 강고산리(江古山里)와 매화정리(梅花亭里)가 합쳐진 이름이다.

이 석교는 1920년 당시 고양의 일산, 지도, 송포지역 등 한강연안의 서부 지역에 거주하는 군민들이 서울로 오가던 교통로로, 각종 농산물, 땔감 등을 서울로 내다 팔기 위해 오갔던 다리이다. 이 석교에 대한 기록은 1755년 영조 연간에 발행된 <고양군지>에 ‘해포교(浦橋)’라 기록되었다. 1920년 이전에는 이곳에 목교가 있었는데, 석교로 신축했음을 명문에서 알 수 있다.

강고산마을은 한강의 새우젓 배들이 고양지역 사람들에게 판매할 새우젓을 내리던 동네였는데, 그 나루터는 샛강 건너의 갈대섬에 있었다고 한다. 갈대섬의 나루터는 한강의 깊은 수심에 접해있어 배를 정박하기에는 용이했지만, 강고산마을로 건너가는 것이 매우 불편해 현재 위치에 석교를 세웠다.

▲ 강매석교 

강매석교는 우리나라 전통양식의 보를 얹은 석교 중에서도 가장 격식이 있는 교량 형태의 맥을 잇고 있어 학술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공정사회
경제정의
정치개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