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전(煎)

  • 기사입력 2022.03.18 16:58
  • 최종수정 2024.02.03 15:21
  • 기자명 김희재 작가
▲ 김 희 재 (수필가, 한국어 교육 전문가)  

 “좋아하는 음식이 뭐에요?” 

상투적인 내 물음에도 그녀는 바짝 긴장하는 눈치다. 잠시 생각하더니 조심스레 말했다. “저는 호박전을 제일 좋아해요. 동글동글한 것이 예쁘고 맛있더라고요.”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났다. 하고 많은 음식 중에서 호박전을 제일 좋아한다고 대답할 줄은 정말 몰랐다. 큰아들의 여자 친구를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내가 던진 질문과 그녀의 답이었다.

 사실 나도 호박전을 좋아한다. 아니, 모든 종류의 전을 다 잘 먹는다. 어떤 전이든 한입 베어 맛을 보면 반죽이 잘 되었는지, 기름은 적당한지, 불 조절은 잘했는지 등을 금방 안다. 그런 터라 호박전을 좋아한다는 그녀의 대답은 낯선 아가씨에 대한 호감지수를 높였다. 어쩌면 우리 식구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예감이 언뜻 스쳐 갔다.

어릴 적, 우리 집은 유난히 전을 잘해 먹었다. 황해도 사람인 아버지는 녹두빈대떡을 좋아하셨고, 경상도 출신 어머니는 달짝지근한 배추전을 즐겨 드셨다. 계절 따라 김치전, 동그랑땡, 호박전, 버섯전, 누름적, 산적, 육전, 해물파전, 굴전 등을 골고루 먹었다. 요즘처럼 풍족하지 않은 시대여서 그랬는지, 기름 냄새를 풍기면 부유한 집 같아서 좋았다.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녹두빈대떡을 만들려면 꼬박 이틀 걸렸다. 녹두를 맷돌에 갈아 반으로 쪼갠 후에 밤새 물에 담가 놓았다.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 물에 뜬 껍질을 잘 골라내고, 노르스름한 녹두를 물과 함께 국자로 떠서 맷돌 위짝 구멍에 넣었다. 손잡이를 둘이 맞잡고 호흡을 맞춰 돌리면 녹두가 곱게 갈려 나왔다.

맷돌질은 대개 아버지 몫이었다. 아버지가 딸들의 손을 교대로 감싸 쥐고 부지런히 녹두를 가는 사이, 어머니는 빈대떡에 넣을 재료를 준비하셨다. 잘 익은 배추김치를 송송 썰고, 고사리는 대충 썰었다. 돼지고기도 굵게 채 썰어 양념하고, 숙주나물은 데쳐서 숭숭 썰어 넣었다. 경상도 아내가 황해도 남편에게 배워서 만드는 녹두빈대떡은 최고의 명품이었다. 고소하고 바삭하고 아삭한 식감에 감칠맛까지 고루 갖췄다.

우리 집에서 명절에 전을 지지는 일은 정말 녹녹지 않았다. 손이 큰 어머니가 준비하신 갖가지 재료들을 다 노릇노릇 지져내려면 온종일 불 앞에서 떠날 수가 없었다. 처음엔 고만고만한 딸 넷이 모두 팔을 걷고 달려들었다. 하지만 따끈한 전 몇 개 집어먹고 나면 슬슬 다른 일거리를 핑계로 내빼곤 했다. 끝까지 프라이팬을 떠나지 못한 건 요령 없는 둘째 딸뿐이었다.

요령 없이 어머니 곁을 지키다 보니 나도 곧잘 하게 되었다. 결혼한 후에도 어렵지 않게 전을 부쳐 먹었다. 생일이며 명절이며 손님 초대 등 큰상을 차릴 때는 물론 도시락 반찬으로도 자주 했다. 덕분에 우리 아이들은 내 옆에서 전을 부치는 걸 거들며 자랐다. 전은 방금 팬에서 꺼낸 것을 뜨거울 때 먹는 것이 제일 맛있다고 하시던 어머니의 말씀도 내 말이 되었다.

그런 내가 몇 년 전부터 명절에는 집에서 전을 부치지 않게 되었다. 호박전을 좋아한다던 아가씨를 며느리로 맞이하고 난 후부터였다. 명절 쇠러 아이들이 서울에서 대전까지 오려면 귀성 차량에 갇혀 도로에서 이미 파김치가 되었다. 둘 다 연휴 시작 전까지 직장에서 바삐 동동거리다 왔는데, 오자마자 앞치마 두르고 전을 부치라고 하면 며느리 입이 나올까 봐 저어되었다. 매스컴에서 떠드는 명절 스트레스 1위가 ‘시댁에 가서 전 부치는 일’이라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무엇보다도 모처럼 모인 식구들이 여유롭게 대화할 시간을 빼앗기는 것이 제일 아까웠다.

큰며느리가 들어오고 처음으로 맞은 명절은 추석이었다. 토란국이며 나물이며 고기, 생선 등 음식 준비를 차근차근 미리 해놓고는 부산하지 않게 아이들을 맞았다. 오후에 대나무로 만든 아담한 채반을 챙겨 들고 나서며 며느리에게 단둘이 외출을 하자고 했다. “아가야, 지금 저기서 우리 동서들이 열심히 전을 부치고 있으니 얼른 가서 따뜻할 때 가져오자. 네가 좋아하는 호박전은 특별히 많이 부쳐 놓으라고 부탁해 놓았단다.”

내 말뜻을 몰라 눈이 휘둥그레졌던 며느리는 이내 알아차리고 발걸음 가볍게 따라나섰다. 마침 우리 동네 상가엔 전을 맛있게 부치는 전문점들이 밀집해서 경쟁하고 있었다. 며느리와 함께 가서 좋아하는 것으로만 골라 담으니 모든 음식 준비가 완벽하게 끝났다. 일찌감치 저녁을 먹고는 동네 산책하러 나갔다. 명절 전날, 카페에서 가족들과 커피를 마시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기는 고부(姑婦)가 다 처음이었다. 예상보다 훨씬 더 즐겁고 행복했다.

내가 지나온 시절에도 명절이면 여자들이 큰집에 모여서 어마어마하게 많은 양의 전을 온종일 쉴새 없이 부쳤다. 여자들은 대개 집안의 며느리들이었다. 대부분 촌수에 상관없이 서로를 동서라고 부르는 사이였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부침개 전문점에서 일하는 아주머니들을 ‘우리 동서들’이라고 부르게 된 모양이다. 요즘 젊은이들에겐 동서(同壻)라는 호칭 자체가 생소할지도 모르겠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공정사회
경제정의
정치개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