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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유형이 낳은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옙스키

[연재12회] 사형 직전 유형수로 감형돼

  • 기사입력 2022.03.25 23:20
  • 기자명 이정식 작가

◉ 국립 레닌 도서관 앞의 도스토옙스키 동상

모스크바 크렘린 궁에서 가까운 언덕에 위치해 있는 국립 레닌도서관. 러시아 국립중앙도서관 격인 이 도서관 앞 광장 한복판에는 커다란 동상이 하나 서 있다. 우리에게 《죄와 벌》,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로 잘 알려져 있는 대문호 도스토옙스키의 동상이다.

도스토옙스키가 뭔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앉아 있다. 벗겨진 그의 머리와 어깨 위는 하루 종일 그곳을 휴식처로 삼는 비둘기들의 배설물로 인해 허연 얼룩이 져 있다.

▲ 모스크바 국립 레닌도서관 앞의 도스토옙스키 동상

러시아 지성의 상징인 국립 레닌도서관 앞에 서 있는 도스토옙스키 동상은 그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사랑과 존경의 표시이며, 러시아 문화와 예술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치를 말해주는 것이다.

  

도스토옙스키는 모스크바 지하철 도스토옙스키 역에서도 만날 수 있다. 이 역으로 내려가면 통로 벽면에 그려진 그의 커다란 얼굴과 만나고, 지하철 플랫폼에서는 그의 대표작인 《죄와 벌》, 《백치》, 《악령》,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을 상징적으로 그린 벽화들을 볼 수 있다. 2017년 5월 초 필자가 찾아갔을 때 그곳 도스토옙스키 얼굴 벽화 앞에서는 3인조 그룹의 경쾌한 연주가 펼쳐지고 있었다.

◉명성의 절정기에 갑자기 찾아 온 죽음

이처럼 러시아가 자랑하는 인물인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1821~1881). 그의 죽음은 창작과 명성의 절정기에 갑자기 다가왔다. 그는 28세 때 별것 아닌 일로 정치범으로 체포되어 거의 10년 에 달하는 인생의 황금기를 시베리아의 수용소와 군에서 보내야 했다.

▲ 도스토옙스키의 초상화 

시베리아에서 풀려난 후로는 늘 빚에 쪼들려 선금을 받고 마감 기일에 쫓기며 원고를 써대는 고단한 생활이 이어졌다. 그런 상황에서도 몸에 붙은 도박 습관은 좀처럼 고쳐지지 않았고 지병인 간질도 늘 그를 괴롭혔다. 쉰 줄에 들어서 겨우 형편이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다. 죽음이 찾아온 것 은 문단에서의 입지가 높아지면서 경제적으로도 다소 여유를 찾은 지 1년쯤 되었을 때였다.

당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살고 있던 도스토옙스키는 숨지기 일곱 달 전인 1880년 6월, 모스크바에서 있었던 푸시킨 동상 제막식에 문단의 거물 급 인사의 한 사람으로 초청을 받아 갔다. 집필 중이던 《카라마조프 씨네 형 제들》의 마무리 작업도 미룬 채 참석한 행사였다.

이곳에서 그는 매우 감동적인 연설을 해 참석자들로부터 열렬한 박수갈 채와 꽃다발 세례를 받았다. 연설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베스트셀러 작가로 서의 자신의 대중적 인기를 실감한 행사였다.

  

이해 가을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을 탈고한 후 그는 ‘다음 20년 동안 살 아가며 써야 할 것들’에 대한 구상을 정리했다. 그렇게 의욕을 불태웠으나 불 과 몇 달 후인 1881년 1월, 유산 문제로 찾아온 누이동생과 다투는 등 종일 이 런저런 일로 흥분한 상태에서 갑자기 폐의 동맥이 터지는 위중한 상황이 되어 그대로 병석에 눕고는 2일 만에 파란만장했던 60년의 생을 마감했다 

◉ 평생 간직한 데카브리스트 부인이 준 성경책

병석에서 그는 아내 그리고리예브나에게 성경책을 달라고 했다. 31년 전 혹한 속에서 시베리아의 옴스크로 유형을 가던 중 토볼스크에서 그를 찾아온 데카브리스트 부인 폰비지나(1803~1869)로부터 받았던 그 성경책이다. 도스토옙스키가 다른 정치범과 함께 토볼스크에 도착했을 때 폰비지나를 비롯, 몇 명의 데카브리스트 부인이 이들을 방문했다. 과거 자신의 남편들과 같은 처지에 처한 이들을 위로하기 위해서였다.

부인들은 도스토옙스키를 비롯해 이들 정치범들에게 먹을 것과 옷가지와 성경책을 주었다. 도스토옙 스키가 폰비지나로부터 받은 성경책의 표지 안에는 10루블이 감춰져 있었다. 표지 사이에 지폐를 넣고 가장 자리를 꿰맨 것이었다. 유형수들은 돈을 지닐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시베리아에서 10루블은 큰돈이었다. 성경책은 유형수들에게 유일하게 허용된 책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이 성서를 죽을 때 까지 간직했다.

도스토옙스키가 데카브리스트 부인들을 만난 때는 1850년 1월로, 데카브리스트들에게 사면령이 내려지기 6년 전이다. 데카브리스트와 그 가족들은 여전히 시베리아에서 유배 생활을 계속하고 있었으나 처음 강제노동형을 살 때와는 달리 시베리아의 일정 지역 안에서 다소의 독립적인 경제생활을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도스토옙스키는 수용소에 있을 때 폰비지나가 준 그 성서를 베개 밑에 늘 소중하게 보관했다. 그 성서를  가지고 문맹의 젊은 죄수에게 러시아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그는 생애에서 위기가 닥칠 때마다 그 성경을 아무 데나 펼쳐서 읽곤 했다.

도스토옙스키는 안나가 가져온 성경책을 펴고 한 군데를 가리켰다. ‘마태 (마태오)복음’ 3장 14~15절이었다. 안나 그리고리예브나가 그 구절을 큰 소리로 그에게 읽어주었다. 예수가 요단강에서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는 장면이다. 이해를 위해 13절부터 16절까지를 보면 다음과 같다.

13. 그즈음에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려고 갈릴래아를 떠나 요르단 강으로 요한을 찾아오셨다. 

14. 그러나 요한은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어떻게 선생님께서 제게 오십니까” 하며 굳이 사양하였다.

15. 예수께서 요한에게 “지금은 내가 하자는 대로 하여라. 우리가 이렇게 해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라고 대답하셨다. 그제야 요한은 예수께서 하자는 대로 하였다.

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시자 홀연히 하늘이 열리고 하느 님의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당신 위에 내려오시는 것이 보였다.(대한성서공회 발행, 공동번역 성서 <가톨릭용>, 1977) 

안나가 14~15절을 읽자, 도스토옙스키는 안나에게 “오늘 내가 죽을 것” 이라고 말했다. 1881년 1월 28일 아침의 일이었다. 그는 아들에게 그 성서 를 주고는 이날 밤 8시 38분에 숨을 거뒀다. 

◉ 페트라셰프스키사건

도스토옙스키의 생애에 있어 가장 커다란 사건은 뭐니 뭐니 해도 그 를 죽음 직전까지 몰아넣었던 1849년의 페트라셰프스키 사건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이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사형장까지 갔다가 형장에서 시베리아 유형으로 감형되어 목숨을 건졌다.

도스토옙스키는 1845년에 발표한 《가난한 사람들》이 성공을 거둔 다음 해인 1846년 페트라셰프스키라는 사람을 알게 되어 그가 주도하는 문학모 임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페트라셰프스키는 페테르부르크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하고 외무부에 근무하는 관리였는데 자기 집에서 프랑스의 공상적 사회주의자 푸리에(J. Fourier, 1772~1837)를 연구하는 모임을 갖고 있었다.

▲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니콜라이 1세 동상 

이 모임은 점차 체제 비판적인 성격을 갖게 되었다. 경찰이 이러한 움직임을 놓칠 리 없었다. 경찰은 이들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며 비밀리에 감시를 계속했다. 당시는 차르 니콜라이 1세 치하로, 그는 자신의 권좌를 무너뜨리려고 했던 데카브리스트들을 처형하거나 시베리아로 유형을 보냈던 인물이다. 그는 늘 이러한 비밀집회 등에 대해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중 경찰이 이 모임에 잠입시킨 한 끄나풀이 있었다. 안토넬리라는 대학생이었는데 그는 모임의 구체적 내용을 소상하게 상부에 보고했다. 마침내 경찰은 1849년 4월 22일과 23일 회원 34명을 전격 체포했다. 정치범이 된 이들은 모두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감옥에 갇혔다.

▲ 로파블롭스크 요새 

이 가운데는 도스토옙스키의 형 미하일도 있었는데, 형은 가담 정도가 경미하다고 하여 풀려났고, 군법회의에 회부된 관련자 23명 가운데 21명에 대해 사형이 언도됐다. 당시 모임 참석자들은 심각한 반체제 활동을 한 것도 아니었지만, 당국은 이들을 엄벌함으로써 체제 비판적인 지식인들에게 경종을 울릴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독재체제에서 흔히 써먹는 수법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죄는 그가 바로 전 4월 15일 모임에서 전제주의적 입장을 신봉했다는 이유로 니콜라이 고골(1809~1852)을 비난하는 내용을 담은, 당대 러시아 최고의 문학비평가 벨린스키(1811~1848)의 편지를 낭독한 죄였다. 당시 차르체제를 비판한 그 편지는 당국이 금지하고 있는, 읽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도스토옙스키는 벨린스키의 사악한 편지를 퍼뜨린 죄로 체포된 것이다. 그 모임에 참석했던 폴란드인 야스트르젬브스키는 도스토옙스키가 그 편지를 낭독할 때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을 표했다고 하여 역시 중죄인이 되었다.

▲ 벨린스키(1811~1848) 

그렇다면 왜 그 편지가 문제가 되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고골은 《검찰관》, 《외투》, 《죽은 혼》 등으로 유명한 작가다. 특히 1836년에 초연된 《검찰관》은 러시아 관료 사회의 속물성과 부패를 유쾌하게 풍자한 작품으로 오늘날에도 끊임없이 무대에 올려지는 불멸의 코믹 풍자극이다.

푸시킨보다 10년 아래였던 고골은 한때 푸시킨과 자신이 러시아 문학을 이끌어간다고 생각할 정도로 자부심이 강했다. 1837년 푸시킨이 권총 결투로 사망한 후에는 러시아 문단의 주역으로까지 여겨졌다.  

그런데 30대 후반부터 작품이 잘 풀리지 않았다. 건강 상태도 좋지 않았다. 그러던 중 1847년 《친구와의 서신 교환선》을 발표하는데, 여기에서 그의 정치적, 종교적 의식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이전까지 그를 진보적이고 비판적인 작가로 알았던 지식인들은 책으로 묶여 나온 그의 이 편지 모음집을 보고 충격과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진보적 지식인들이 당대 러시아의 커다란 문제로 생각했던 차르체제(전제주의)와 러시아 정교회, 그리고 농노제를 옹호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가령 군주체제와 관련해 고골은 당시 문단의 대선배인 주콥스키(시인, 1783~1852)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우리나라 시인들은 군주란 궁극적으로 그 전 존재가 하나의 ‘사랑’이 될 수밖에 없고 또 그렇기 때문에 민족 전체가 본능적으로 인정하듯 누구나 군주란 곧 하느님의 다른 모습임을 분 명히 알게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간파함으로써 군주의 숭엄한 의미를 깨달 았습니다. (《친구와의 서신 교환선》, 석영중 옮김, 나남, 2007)

‘군주란 곧 하느님의 다른 모습’이라고까지 아첨한 이 책이 발간되자 러시아의 문단과 독자들은 고골이 기대를 배신했다며 맹렬히 비난을 퍼부었다. 마침내 벨린스키는 고골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공개 서한인 <고골에게 쓴 편지>를 발표한다. 벨린스키는 고골의 그 책은 “진리와 인간 존엄성에 대한 모욕”이라며 “(그의 책에서는) 진실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아니라 죽음 과 악마와 지옥의 병적인 공포의 냄새가 난다”라고 비난했다. 벨린스키는 이 편지를 쓴 다음 해인 1848년 37세로 사망한다. 그리고 이듬해 페트라셰프스키 사건이 발생했다. 고골의 책은 차르나 정교회, 귀족 과 지주들의 입장에서는 환영할 만 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작 문단에 서 고골의 입지는 위축될 대로 위축되었다. 고골은 그 후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정신적으로도 이상 상태가 되어 1852년 단식으로 생을 마친다.

◉ 처형장까지 끌려갔던 사형수 도스토옙스키

도스토옙스키가 사형장에서 감형되어 목숨을 건진 상황은 극적이다. 옛날 한국 영화에서 죄인이 금부도사 앞에서 사약을 받아 들고 마시려는 순간 말을 탄 관리가 말발굽 소리도 요란하게 나타나 “어명이요!”라고 외치며 집행을 중지시키는 장면과 비슷하다.

이때의 상황에 대해 우리에게 《역사란 무엇인가》로 잘 알려져 있는 영국의 역사학자 E. H. 카(1892~1982)는 《도스토옙스키 평전》(1931)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군법회의에서 내린 사형 판결은 바뀌었다. 그러나 사형을 집행하는 듯한 쇼를 벌이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은 젊은이들에게 두려운 인생의 교훈을 준다는, 잔인하면서도 소박한 바람에서 나온 것이지 단순히 넓은 자비심을 보이려는 황제의 허영심에서 나온 것만은 아니었다. 사형 중지 결정을 알지 못했던 죄수들 은 마차로 처형장까지 갔다. 사형 선고문이 읽히고 사제는 십자가를 들고 마지막 참회를 말하라고 했다. 죄수들은 순서대로 줄을 섰고 앞의 세 사람은 실제로 기둥에 묶여 사격대를 향했다. 이때 황제의 감형장을 가진 전령이 들어서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진짜 선고문이 처음으로 읽히고 죄수들은 감옥으로 되돌 려 보내졌다.(《도스또예프스끼 평전》, E. H. 카 지음, 김병익・권영빈 옮김, 열린책들, 2011년)

극적인 대목임에도 불구하고 묘사가 평범해서 흥미진진한 맛이 없다. 도스토옙스키도 그의 글을 통해 당시 사건 관련 부분을 몇 차례 서술하기는 했는데 일관성과 명료성이 떨어진다는 것이 카의 지적이다. 도스토옙스키는 후일 형 미하일에게 보낸 편지에서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썼다.

(1849년) 12월 22일, 이날 우리는 모두 세묘노프스키 연병장으로 끌려 갔습니다. 거기서 십자가에 입을 맞추고 사형수 복으로 갈아입었습니다. 그런 다음 일행 중 3명이 처형장으로 끌려가 기둥에 묶였습니다. 저는 앞에서 여섯 번째였고, 3명씩 끌려갔으므로, 저는 두 번째 그룹에 속해 있었습니다. 이제는 정말이지 1분의 여유도 없었습니다. 그때 옆에서 나팔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기둥에 묶여 있던 사람들이 풀려나고, 감형을 알리는 황제 폐하의 칙령이 낭독된 것입니다.

이 극적인 사건은 도스토옙스키의 일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감형된 사람 중 두 사람은 엄청난 정신적 충격으로 감형 이후에도 정신이 온전치 못한 상태로 생을 마쳤다고 한다.

도스토옙스키의 간질병도 이때의 충격에서 비롯되었다는 얘기가 있다. 앞서 농노에게 피살된 아버지의 사망 이후 시작되었다는 설도 있는데 정치범으로 체포된 후 증세가 구체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이 사형장에서의 상황은 도스토옙스키의 작품 《백치》(1868)에서 누군가에게 들은 이야기의 형식을 빌려 다음과 같이 서술된다.

그 사람은 다른 죄수들과 함께 사형대 위로 끌려가서 정치범으로 총살형을 받 는다는 선고문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20분쯤 후에 사면령이 내려져 그보다 감 형된 형량을 선고받게 되었지요. (……) 그는 마치 어제 일처럼 모든 걸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 몇 분 동안 어느 한순간도 결코 잊을 수가 없다고 했어요. 세 개의 기둥이 구경꾼 들과 병사들 곁에 있는 처형대에서 스무 발자국쯤 떨어진 곳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죄수들이 여러 명 되어서였지요. 처음엔 세 명의 죄수를 그 기둥으로 끌고 가서 거기다 묶었습니다. 그리고 옷자락이 긴 흰 가운 같은 사형복을 입히고, 총이 보이지 않도록 흰 벙거지를 눈 위까지 눌러씌웠지요. 그러고 나서 각 기둥의 정면에 서너 명의 병사가 한 조를 이루어 정렬을 했습니다. 내가 아는 그 죄수는 앞에서 여덟 번째로 서 있었고, 세 번째 처형을 기다리고 있었지요. 신부가 십자가를 들고 모든 죄수들 앞을 돌아다녔습니다. 그에게 목숨이 붙어 있을 시간은 5분 정도밖에 없었던 거지요. 이 5분이 그에게 있어서는 무한대의 시간이고 엄청난 재산처럼 여겨졌다고 그는 술회했어요.(……) 그는 남아 있는 5분 동안에 해야 될 일을 정리했던 거지요. 우선 동료들 과의 작별에 2분을 할당하고, 마지막으로 자기 자신을 성찰해보는 데 2분, 그 리고 나머지 시간은 마지막으로 주변을 둘러보는 데 할당했답니다. 그는 이 세 가지 결정을 시간에 맞춰 그대로 실행에 옮겼던 일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어요. (《백치》, 김근식 옮김, 열린책들, 2009)

도스토옙스키는 《백치》에서 “사형선고보다 더 심한 고통은 이 세상에 없다”며 “어쩌면 사형선고를 받고 고통을 당한 뒤 ‘가라, 너를 용서해주겠다’라 는 말을 듣고 풀려나온 사람이 있을지도 몰라요. 바로 그러한 사람은 상세히 얘기해줄 수 있을 겁니다”라며 위와 같이 자신의 경험을 말하고 있다. 

◉ 눈물을 흘리며 시베리아 유형지로

도스토옙스키는 사형에서 강제노동 4년, 군 복무 4년으로 감형(실제로는 시베리아에서 5년 이상 군에 있었다)되어 즉각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옴스크로 이송되었다. 유형수들은 족쇄가 채워진 채 뚜껑 없는 썰매에 실렸다. 1849년 12월 24일 밤, 집집마다 촛불을 밝히고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살을 에는 추위와 어둠을 뚫고 그들은 말로만 들었던 유형지를 향해 떠났다.

그로부터 17일간 여행은 그치지 않고 계속되었다. 어떤 때는 영하 40도가 되었다. 우랄 산맥을 넘을 때는 눈사태 때문에 몇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이럴 때는 감상적인 기분에 젖어 남자로서 흘려서는 안 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들의 배후에는 유럽과 과거가 있고 앞면에는 아시아와 미지의 미래가 있었다. 언제나 용의주도하지 못했던 도스또예프스끼는 따뜻한 옷가지가 넉넉지 않아 <심장까지 얼어붙는 듯>했다. 두 명의 동행도 동상으로 고통을 받았다. 또볼스끄에서는 6일간을 머물렀다. 여기서는, 1825년의 음모에

▲ 작가 이정식

가담했던 제까 브리스뜨 당원의 몇몇 생존자의 아내들이 죄수들을 찾아왔다. 이 여인들은 남편의 뒤를 좇아 시베리아로 와서 25년간을 머물고 있었다. 이 여인들로부터 도스또예프스끼는 돈과 음식과 옷가지를 선물로 받았고 죄수들에게 공식적으로 소유가 허락되는 유일한 책인 성서를 받았다.또볼스끄에서 동행했던 야스뜨르젬브스끼는 떨어져 남게 되고 도스또예프스 끼와 두로프는 사흘간의 여행을 끝낸 뒤 옴스끄의 감옥에 도착했다.(《도스또예프스끼 평전》) 지옥 같은 비참한 유형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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