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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대초원의 나라 카자흐스탄

[연재 38회]

  • 기사입력 2022.04.01 11:52
  • 기자명 김석동
▲ 필자 김석동  

1. 중앙아시아는 어떤 곳인가?

중앙아시아는 1990년대 초, 소련이 붕괴하고 중국이 개방되기 전까지는 우리에게 관심 밖의 땅이었다. 그러나 이 지역은 오래전부터 기마유목민이 활동해온 중심 무대이자 흉노,돌궐,몽골의 기마군단이 서방으로 진출하는 교두보였다. 기원전 3세기경 몽골 고원을 평정한 흉노 제국은 중앙아시아 일대를 정복하고 실크로드를 장악해 대제국을 건설했다. 이후 기마유목민족인 유연, 돌궐, 위구르, 셀주크 제국, 몽골 제국, 차가타이 칸국, 티무르 제국이 차례로 패권을 차지했다. 중앙아시아 지역은 투르키스탄으로 불렸고 이는 투르크인의 땅이란 뜻이다. 서투르키스탄은 460만 km2(우리나라 46배)에 달하는데 청나라·영국·러시아 등이 각축하다가 1880년대에는 러시아가 대부분을 장악했다.

소연방은 이 지역을 수 개의 공화국으로 분리 통치하면서 영국 등 해양 세력과 경쟁하기 위해 국경 지역의 철도 건설에 나서 1904년 ‘중앙아시아 철도’를 개통했다. 총 2만 km가 넘는 방대한 규모의 철도는 내륙인 이 지역 경제활동의 돌파구가 되었다. 소연방 붕괴 후 서투르키스탄 지역은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아프가니스탄으로 분리·독립했다. 동투르키스탄은 청나라의 지배를 받아오다 잠시 독립했으나 다시 중국에 편입되어 지금은 ‘신장 웨이우얼 자치구’가 되었다. 필자는 지금까지 중앙아시아 지역 중 카자흐스탄 두 번, 우즈베키스탄 다섯 번, 신장 웨이우얼 두 번, 총 아홉 차례를 다녀왔다. 중앙아시아의 민족은 유목민의 후손들로 투르크-몽골계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나 소수민족도 다수 혼재해있다. 종교적으로는 751년 탈라스 전투에서 압바스 왕조가 고선지 장군이 이끄는 당나라군을 격파하면서 중앙아시아 전 지역으로 이슬람이 확산됐다.

▲ 중앙아시아의 자연  

한편 이 지역은 천연가스, 석유, 석탄이 대량 매장된 자원의 보고이다. 중동의 걸프만과 러시아 다음으로 많은 석유와 천연가스가 매장된 카스피해 연안 지역까지 포함해서 보면 이 지역의 중요성이 새삼 강조될 수밖 에 없다. 중앙아시아에 관심을 보여온 강대국들은 ‘중앙아시아를 지배하는 자는 세계적으로 엄청난 권력을 행사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고 한다. 그동안 중앙아시아는 러시아가 지배하면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으나 소연방 붕괴 후 2000년대 들어 미국의 진출이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다. 서투르키스탄 지역인 신장 웨이우얼을 지배하는 중국도 ‘일대일로’ 전략의 한 축으로 추진하는 육상 실크로드의 핵심 지역으로 삼고 있다.

지난 2500년 간 한민족과 뿌리를 같이하는 기마군단이 활약해온 중앙아시아는 유라시아 스텝의 중심 지역으로 동서 문명 교류의 관문이었다. 이 지역에서 살아오고 활동한 사람들은 북방 알타이 문명에 기원을 두고 있고 우리나라와 생활·문화·언어적으로 많은 공통분모와 친연성을 가지고 있다. 고대로부터 초원 실크로드와 오아시스 실크로드를 통해 이들이 오간 흔적들이 무수히 남아있다. 무덤·유물 등은 물론 풍습과 언어 등에서도 확인된다. 동서 문명의 교역로인 실크로드의 출발점이자 종착 역인 한반도에서도 신라·발해·고려 시대에 이미 실크로드의 소그드인 등을 통해 중앙아시아와 교류해온 흔적이 역력하다.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에서 고대 한국 특유의 복식을 하고 있는 두 명의 사신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고, 고구려의 벽화에서도 중앙아시아인을 볼 수 있다. 신장 웨이우얼의 투르판 인근의 베제크리크 석굴에서도 고려 시대로 추정되는 한반도인의 그림이 남아있다. 고대로부터 한반도가 이들 지역과 교류가 깊었다는 의미이다. 근세사에서도 중앙아시아에는 한인(고려인)이 1937년 강제 이주된 후 70년간 거주한 지역으로 지금도 30만 명 이상이 살고 있다. 중국·미국·일본 다음으로 많은 한인이 사는 곳이다.

▲ 중앙아시아 대초원의 방목 

역사를 국경과 국민이라는 개념보다 민족이 활동하고 이동·교류하는 ‘삶의 흐름’이라는 관점에서 파악하면 보다 폭넓게 이해할 수 있는데, 특히 유라시아 기마유목민족의 역사가 그렇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의 고대사도 만주·몽골·중앙아시아, 그 서쪽 지역까지 연결하여 한민족이 활동하고 이동·교류해온 삶의 흐름을 파악하는 시각으로 다시 볼 필요가 있다.

2. 중앙아시아 대초원의 나라 카자흐스탄을 찾아서

중앙아시아의 우즈베키스탄은 실크로드편에서 기술했으므로 필자가 2013년 및 2016년 두 차례에 걸쳐 방문한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큰 나라 이자 세계에서 9번째로 넓은 카자흐스탄을 소개하고자 한다. 카자흐스탄 면적은 272만 km2로 중앙아시아 전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인구는 1,820만 명으로 카자흐인(53.4%), 러시아인(30%), 우크라이나인, 우즈벡인, 독일인, 위구르인 등 120여 개에 이르는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고, 고려인 등 한민족도 10만 명 이상 살고 있다. 종교도 이슬람 47%, 러시아 정교 44%, 기독교 2% 등으로 다민족·다종교 국가이다. 수도는 북부의 ‘아스타나’지만 최대 도시는 남동부 키르기스스탄 국경 근처에 있는 ‘알마티’이다. 석유 등 자원이 풍부해 국민 소득이 1만 2,276달러 (2015년)로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이다.

카자흐스탄의 주류를 이루는 민족인 카자흐족은 투르크-몽골계 민족이다. 15세기 중엽 몽골 제국의 하나인 킵차크칸국이 붕괴된 후 그 일족 이 중앙아시아에 진출하면서 우즈벡족이 형성되었고 그중 일파가 카자흐스탄 지역에서 독립민족으로 자리 잡아 카자흐족의 역사가 시작됐다. 이들은 대부분 유목 생활을 하던 사람들로 수니파 이슬람을 받아들였으나 유목민의 관습과 정서를 오래 유지해왔다. 한편 제정 러시아는 남하 정책을 지속하면서 17세기경에는 시베리아 대부분을 장악했고 18세기 초 이후 본격적으로 중앙아시아로 진출했다. 19세기 중반에는 카자흐스탄 대부분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20세기 들어 1917년 카자흐스탄 자치정부를 수립하기도 했으나 1936년에는 소연방의 일원이 되었고 이후 1991년 소연방 붕괴 시에 독립했다.

인천공항에서 6시간 반 정도 비행하면 카자흐스탄의 옛 수도이며 최대 도시인 알마티에 당도한다. 톈산 산맥 북쪽 기슭에 자리 잡은 알마티는 동서 교역의 통로인 초원로의 한 가운데 있다. 이곳은 작은 마을이었 으나 제정 러시아의 군사요충지로서 요새의 역할을 하는 식민 도시로 급성장했다. 지금은 인구가 약 117만 명에 달하는 교통·산업· 문화의 중심지로 1997년 아스타나로 옮기기 전까지 수도였으며 대관령과 한계령 정도의 높이인 해발 600~900 m의 높은 산지에 자리 잡아 빼어난 자연경관을 자랑한다. 알마티 역사지구 중심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판필로 프 장군과 28인 군인들의 전공을 기념하는 판필로프 공원이 있다. 이 공원에는 젠코브 러시아 정교회 대성당이 자리하고 있는데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목조 건물(54 m)이자 세계 8대 목조 건물 중 하나라고 한다.

▲ 알마티에서 본 톈산 

톈산 산맥은 신장 웨이우얼 자치구에서 키르기스 지역으로 2,800 km에 달하는 길이로 이어졌는데 알마티 시내에서도 만년설에 덮여 도심을 감싸고 있는 산맥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시내에서 차량으로 30분 정도 남쪽으로 가면 높이 3,163 m의 톈산이 있는데 현지에서는 침블락이라 부른다. 해발 1,600 m까지 올라가면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빙상장으로 유명한 메데우가 있고 이곳에서 정상까지 4.5 km 길이의 곤돌라가 설치되어 있다. 2010년 동계 아시안게임 때 침블락 스키장을 위해 개통되었다. 곤돌라를 3번 갈아타면 정상에 도달할 수 있는데 고산 지역이라 기후변화가 매우 심해서 곤돌라가 운행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 정상까지 올라갈 확률이 매우 낮다고 한다. 필자는 마침 좋은 날씨를 만나 산 정상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안내해준 지인은 톈산에 오르면 소원이 이뤄진다는 얘기가 있다고 전해주면서 첫 방문에 정상에 오는 것은 천운이라 한다. 이 산이 바로 백두산, 신장 웨이우얼의 우루무치 인근에 있는 톈산과 더불어 한민족의 시원지로 꼽히는 곳이다. 침블락에는 중앙아시아 최대의 스키장이 자리 잡고 있는데 굉장히 험준한 곳에 설치된 난코스가 있어 사고가 나면 이듬해 해빙기에야 시신 수습이 가능하다고 한다.

알마티시에서 북서쪽으로 약 170 km 떨어진 곳에는 유명한 탐갈리 유적지가 있다. 이곳에서 1957년에 대규모의 암각화군과 정착지와 무덤 유적 등이 발굴되었다. 탐갈리의 바위에 새겨진 암면조각화는 1970, 1980년대 이후 본격 연구가 이루어지고 2004년에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알마티에서 현지인의 안내를 받으며 황량한 들판을 세 시간 이상 달려 탐갈리에 도착했다. 구글 네비게이션을 활용해도 길 찾기가 만만치 않아 수차례 차에서 내려 물어가며 어렵게 목적지에 당도했다. 유네스코 문화유산 지역임을 나타내는 허술한 표지판을 지나면서 안내인이 우리 일행을 바위투성이의 골짜기로 안내하고 설명해 주었다. 입구에서부터 바위에 또렷이 새겨진 그림들이 나타났다. 유목민들의 삶과 정서를 보여주는 다채로운 바위그림들이 즐비하게 있었다. 발굴된 것만 5,000여 점이 넘는 이 그림들은 청동기 시대부터 20세기 초까지 이곳에 살아온 사람들의 모습이 담겨있는 역사적인 자료이다.

▲ 탐갈리 유적지 암각화  

암각화는 선사 고대인들이 생활과 신앙을 바위에 그려 남긴 그림들인데, 유라시아 대초원 일대에서 다수 발견되고 있다. 한반도에서도 울산 대곡리 및 천전리, 포항 칠포리 등 15군데 이상 발굴되었고 유라시아 대초원의 암각 화와 연결고리가 있다. 예를 들면 울산 반구대 암각화는 북방 초원 지대의 암각화에서 나타나는 그림들과 유사한 점이 많다 한다. 동북아역사재 단이 2009년 탐갈리 등 카자흐스탄 동남부 지역 13개 암각화 유적지를 조사한 후 2011년 발간한 조사 보고서를 통해 한반도 선사와 고대 문화와 중앙유라시아 문화 사이에 친연성이 있다고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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