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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호프의 시베리아 여행과 사할린 섬 방문

[연재15회]

  • 기사입력 2022.04.15 10:01
  • 기자명 이정식 작가

◉그의 문학에 전기가 되었던 모험

극작가 겸 단편 작가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1860~1904). 그는 44년의 짧은 생을 살았으나 그의 작품은 지금도 셰익스피어 다음으로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무대에 올려지고 있다. 그의 생애와 작품을 이야기할 때 30세에 감행한 시베리아 횡단과 사할린 섬 방문을 빼놓을 수 없다. 작가로서 이름이 알려지고 문단의 주목을 받을 때였다. 위험하고 의미없는 여행이 될 것이라고 말리는 이들이 적지 않았지만, 이 모험적 여행은 그의 문학에 커다란 전기가 되었으며, 그의 인생관을 크게 바꿔놓았다. 그는 여행을 떠날 때 건강도 좋지 않았다. 폐결핵이 이미 그의 몸에 들어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을 강행한 이유는 체호프 자신의 표현을 빌 면 ‘심기일전’을 위해서였다. 어느 정도의 성공 뒤에 찾아온 불안과 초조감에서 새로운 도전과 경험이 필요하다고 느꼈을 것으로 본다. 실제 당시 비평가 중에는 체호프의 작품에 주의나 주장, 주제의식이 분명치 않다고 비판하는 이들도 있었다.  

▲ 안톤 체호프

그는 1890년 4월 모스크바를 떠나 사할린에서 석 달간 머문 후 12월에 돌아왔다. 오며 가며 길에서 보낸 다섯 달을 포함, 여덟 달이 걸린 여행이었다. 갈 때는 육로로 시베리아를 횡단했고, 올 때는 배로 남중국해와 인도양을 빙 돌아왔다. 그는 사할린에서 유형수와 주민들을 만나 무려 8천 장에 이르는 조사카드를 작성했다. 본업이 의사였던 그는 그곳 유형지의 환경은 물론 유형수와 주민들의 질병에 대해서도 조사했다. 시베리아와 죄수의 섬 사할린 여행은 그의 톨스토이 관(觀)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사할린에 가기 전까지 그는 톨스토이주의자였다. 악에 대한 무저항, 비폭 력에 공감했었다. 그런데 유형지에서 극한의 비참한 처지에 떨어져 있는 인 간의 삶의 모습을 본 후 악에 대한 무저항 철학에 회의를 갖게 되었다. 체호프 는 마침내 “나는 두 번 다시 톨스토이주의자가 되지 않겠다”라고 자신의 시베 리아행을 만류했던, <신시대>지 사장 수보린에게 보낸 편지에서 밝혔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체호프는 여행기 《시베리아에서(Из Сибири)》(1890)와 사할린 섬 탐방기, 즉 현장보고서라고 할 수 있는 《사할린 섬(Остроь Саха лин)》(1893)을 내놓는다. 체호프의 《시베리아에서》는 길지 않은 여행기다. 시베리아의 추위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시베리아에서

“도대체 자네들 시베리아는 왜 이렇게 추운 거요?”

“하느님 마음이죠!”

마부가 대답한다.

그렇다. 이미 5월이다. 러시아에서 숲이 녹색으로 변하고 꾀꼬리가 쉴새 없이 지저귀고, 남쪽에는 상당히 오래전부터 아카시아와 라일락이 피어 있을 것이 나 여기 튜멘에서 톰스크로 이르는 길의 땅은 갈색이고, 숲은 앙상하고, 호수 마다 두툼한 얼음이 덮여 있고, 기슭과 풀밭에는 아직도 눈이 쌓여 있다. 대신에 나는 일생 보지 못했던 많은 야생 새들을 보았다. 야생 오리들은 들판을 거닐거나 물웅덩이와 길가 도랑에서 헤엄치고 있거나 바로 마차 옆에서 일제히 날아오르기도 하고 자작나무 숲에서 게으름 피우듯 난다. 고요 속에 갑자 기 익숙하고 아름다운 곡조가 들려와 위를 쳐다보면 머리 위 높지 않은 곳에 학 한 쌍이 보이고 왜 그런지 처량해진다. 저쪽에서 야생 거위들이 날아가고 눈처럼 희고 아름다운 고니들의 무리가 휭하니 지나간다. 사방에서 도요새들이 끼륵거리고 갈매기들이 울고 있다.

(《안톤 체호프 사할린 섬》 *, 배대화 옮김, 동북아역사재단, 2013 ) 

체호프가 모스크바를 출발한 날은 1890년 4월 21일이었다. 모스크바에서 야로슬라블까지는 기차로 갔고, 거기서부터는 배를 타고 볼가강을 따라 페름 까지 이동했다. 페름에서 다시 기차로 튜멘까지 간 후 본격적인 마차 여행을 시작했다.

길은 형편없었다. 낮에는 땅이 녹아 질퍽거리는 진흙탕이 되고 저녁이 되면 다시 얼어붙어 울퉁불퉁해졌다. 마차는 튀고 쿵쿵거리고 삐걱거렸다. 이르쿠츠크를 지나 바이칼 호수를 배로 건넜다. 다시 마차로 스레텐스크로 가서 배를 타고 아무르 강을 따라 7월 5일 태평양 연안의 항구도시 니콜라옙스크에 도착했다. 

▲ 시베리아의 여름, 가을, 겨울 풍경 

이곳의 사람들은 종교와 정치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푸시킨이나 고골은 알지도 못했다. 서쪽 러시아에서 온 그를 외국인처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체호프는 니콜라옙스크에서 3일 만에 중급 규모의 상선 바이칼호(號)를  타고 사할린 섬과 육지 사이의 타타르 해협을 따라 내려가다 데카스트리에서 일박한 후 마침내 7월 11일, 사할린 중부에 있는 알렉산드롭스크에 도착했다. 모스크바를 떠난 지 두 달 20일 만이다.  

체호프는 자신이 사할린에 가려고 한 이유를 “지긋지긋한 권태에서 벗어나 심기일전을 위해 조국의 변방을 사모했고……” 라고 여행기 속에 딱 한마디 적어놓았다. “되돌아가자니 그렇고”라며 후회의 빛도 보였다.

최종 목적지인 사할린으로 가는 배편을 기다리며 아무르 강 하구 니콜라옙스크에 있을 때는 더 심각한 회의에 휩싸였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난 이곳으로 왔단 말인가? 스스로 물어본다. 내 여행이 극단적으로 경솔한 짓이라는 생각이 든다. 유형지는 벌써 가깝고 추천장 한 장 없이 며칠 후면 사할린 땅에 내리겠지만 되돌아가라고 요구할 수도 있다는 생각, 이런 생각으로 나는 기분이 좋지 않아 불안하다.(《안톤 체호프 사할린 섬》) 

남북으로 길쭉한 사할린은 북쪽이 육지에 가까워서 1849년까지 ‘반도’로 잘못 알려졌었다. 사할린은 남북의 길이가 948km, 최대 폭은 160km다. 면적은 72,492km2로 남한 면적 99,720km2의  약 73%에 달한다. 쿠릴열도를 포함한 주(州) 전체 면적은 87,100km2이다. 체호프는 그의 책에서 어느 작가의 말을 빌려 사할린의 모양이 철갑상어를 연상시킨다고 했다. 실제 남쪽 끝은 철갑상어의 꼬리와 비슷하게 생겼다.

   

체호프는 사할린 남부의 3분의 1은 과거 일본령이었으며 1875년부터 러시아에 귀속되었다고 했는데, “사할린은 원래 아이누족의 땅이며 사할린에 일본 땅은 없다”라는 기록도 있다. 러시아와 일본은 187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에서 사할린 남쪽 바다와 쿠릴열도 사이(남부 4개 섬 이북)를 양국의 국경으로 정했다. 그 뒤 일본은 1905년 러일전쟁 말기 승리의 여세를 몰아 사할린 남부를 점령했다. 그러나 1945년 태평양전쟁 패전 후 사할린 남부는 다시 러시아에 귀속되었으며 쿠릴열도 4개 섬까지 러시아의 영토가 되었다. 일본이 사할린 남부를 점령하고 있을 때 일제 식민지하의 많은 조선인(한인)들이 탄광에 강제 징용되어 끌려갔다. 일본인들은 패전 후 모두 본국으 로 돌아갔으나 조선인들은 무국적자가 되어 사할린에 그대로 방치되었다. 1945년 해방 당시 사할린의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의 숫자는 4만 3천여 명에 이르렀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중에는 경상도 출신이 가장 많았다. 동포들은 남북 분단으로 오도 가도 못하고 이 섬에 갇힌 채 오랜 방황과 고난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사할린 인구 50만 가운데 한인이 2만 5천 명으로 러시아인 다음으로 많은 인구분포를 차지하는 이유다.

체호프는 사할린 경찰서 부속 인쇄소에서 신분, 연령, 출생지, 직업, 종교 등 12개 항목으로 되어 있는 조사카드를 대량으로 만들어 유형수와 주민들을 조 사했다. 당국은 정치범을 제외한 일반 유형수와의 접촉은 허용했다. 그는 이 카드를 토대로 유형수들의 실태는 물론, 형이 끝난 후 이곳에서 주민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비참하고 절망적인 현실을 《사할린 섬》에 담았다. 의사로서 유형지의 각종 질병에 대해서도 상세히 기록했으며 진료를 하기도 했다. 체호프는 수용소에서 유형수에게 피가 터지도록 수십 대의 태형 을 가하는 장면도 목격한다. 

그는 이 절망적인 유형지에서는 아기의 출생도 반가워하지 않는다고 썼다.

(사할린의) 가족은 새로운 인간의 출생을 반가워하지는 않는다. 아이의 요람 위에서 아무도 노래를 불러주지 않으며 들리는 것은 오로지 슬픈 푸념 소리뿐이다. 아이에게 먹일 것도 없고 사할린에서 아이들이 배울 만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가장 좋은 일은, 자비로운 주님이 아이를 가능한 한 빨리 데리고 가버리는 일”이라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말한다. 만약 아이가 울거나 보채기라도 하면 화가 나서 소리친다. “시끄러워. 그냥 뒈지든지!” 그러나 뭐라고 말하고 슬프게 푸념을 늘어놓든지 간에 사할린에서 가장 유익하고 가장 필요하며 가장 기분 좋은 인간이 바로 아이들이며 유형수들도 스스로 이것을 잘 알 고 아이들을 소중히 여긴다. 거칠고 도덕적으로 너덜너덜해진 사할린의 가정에서 어린아이들은 부드러움, 깨끗함, 상냥함과 기쁨을 가져다 준다. 순진무구한 그들은 결함 있는 어머니와 강도인 아버지를 세상의 무엇보다도 사랑한다. (《안톤 체호프 사할린 섬》)

◉사할린 거주 한국인에 대한 최초의 기록

당시 사할린 남부 서쪽의 마우카(현재 이름은 홀름스크) 지역에서는 다시마 채취 사업이 번성했다. 주로 중국에 팔기 위해서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 체결 전에는 일본인들이 하던 사업이었는데 체호프가 갔을 때는 러시아 상인 세묘노프에게 넘어가 있었다. 체호프는 《사할린 섬》에서 “세묘노프 아래에는 만자(우수리 지역과 연해주에 사는 중국인), 한국인과 러시아인이 일하고 있다. 우리 이주유형수들이 여기에 각자 개인적인 이유로 돈 벌러 온 것은 1886년 무렵이다”라고 썼다. 이 대목을 근대 사할린 거주 한국인에 대 한 최초의 기록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체호프는 《사할린 섬》 말미에 앞의 ‘다시마 채취 사업’에 대한 주석을 달 아놓았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또 <크론쉬타트통보> 1880년 제112호에서 ‘사할린 섬, 마우카 만에 관한 상당히 흥미있는 몇 가지 정보’라는 기사를 발견하였다. 내용은 마우카가 10 년간 해조류 채취권을 러시아 정부로 받은 회사의 소재지였고 그 주민은 유대인이 3명, 러시아 군인이 7명, 그리고 한국인, 아이누인, 중국인으로 구성된 노 동자가 700명이라는 것이다.(《안톤 체호프 사할린 섬》)

체호프는 모스크바로 돌아올 때는 선박을 이용했다. 10월 13일 사할린 남쪽 코르사코프 항을 출발해 블라디보스토크, 홍콩, 싱가포르, 그리고 인도양과 수에즈운하를 거쳐 흑해로 들어와 12월 8일 모스크바로 귀환했다. 56일 이 걸렸다. 육로로 갈 때(81일)보다 훨씬 빠르게 왔다.

체호프가 사할린을 다녀온 다음 해인 1891년, 제정러시아의 마지막 황제가 되는 니콜라이 황태자가 극동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리는 시베리아 횡단열차 착공식에 참석하기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났다. 경로는 체호프와 정반대였다. 해로로 갔다가 육로로 돌아왔다. 

◉체호프의 생애

체호프는 1860년 1월 17일 남러시아의 흑해 아조프 해안의 항구도시 타간로크에서 태어났다. 농노해방이 선포되기 한 해 전이다. 체호프의 할아버지는 농노였으나 스스로의 힘으로 자유를 찾은 사람이었으며 아버지 파벨은 타간로크에서 식료품 잡화상을 했다. 그러나 체호프가 16세 때 장사가 잘 안 되어 파산하고 모스크바 빈민촌으로 이주했다. 정상적인 이주가 아니고 빚쟁이들을 피해 야반도주를 하는 바람에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아버지는 폭군이었다. 자식들을 늘 매로 다스렸다. 체호프도 늘 매를 맞으며 자랐다. 그는 어려서 다른 친구들도 다 아버지에게 매를 맞는 것으로 알았다고 한다.

▲ 체호프의 서명이 들어 있는 사진

체호프는 고향에서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1879년 모스크바 의과대학에 들어갔다. 그 후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유머잡지에 콩트를 투고하기 시작했다. 필명은 자신의 이름과 비슷한 안토샤 체혼테로 했다. 체호프는 셋째 아들이었으나 두 형이 가족들을 돌보지 않아 가계도 책임져야 했다.

인기 유머작가가 되면서 1884년에는 필명 안토샤 체혼테로 6개의 단편을 실은 《멜리포메나 이야기》를 출간했는데, 이것이 그의 첫 작품집이다. 이 무렵 체호프는 그를 눈여겨본 문단의 원로 작가 그리고로비치(1822~ 1899)로부터 ‘본명으로 작품을 발표하라’는 충고를 받고 본명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로비치는 체호프를 <신시대>의 사장 수보린에게 소개한다. 체호프는 1888년 그간 발표한 단편들을 모은 《황혼》으로 러시아학술원의 ‘푸시킨 상’을 받으면서 작가로서의 성공가도에 들어선다.

이즈음부터 그는 러시아의 동쪽 끝에 있는 유형수의 섬 사할린 방문을 위한 준비를 시작한다.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 권총도 마련했다. 이 무렵 예기치 않게 당시에는 불치병이었던 폐결핵이 발병하지만, 그는 당초 계획대로 1890년 4월, 험난한 여행길에 올랐다.

그는 돌아온 후 여행기를 <신시대>에 연재하기로 수보린과 약속하고 후원금과 특파원 자격을 얻었다.

◉ 의학은 본처, 문학은 애인

여행에서 돌아온 다음 해인 1891년 체호프는 수보린과 함께 남유럽을 여행한다. 이 해에 중편소설 《결투》를 완성하는데 이는 그 후에 쓴 《6호실》등과 함께 톨스토이주의와 결별한 것으로 분석되는 작품이다.

1892년에는 모스크바 남쪽의 멜리호보에 전답을 사들여 온 가족이 이사를 한다. 그는 멜리호보에서 6년간 머물렀다. 이곳에서 그는 대표적인 희곡 《갈매기》 등 많은 작품을 썼다. 콜레라가 창궐할 때는 지역의 공중보건의로도 활동했다. 농민들을 상대로 무료 진료도 했다. 1896년에는 멜리호보에서 가까운 타레시 마을에 초등학교를 세운다.

▲ 멜리호보에서 체호프가 진료를 했던 병원 건물 

《사할린 섬》은 <신시대>에 실리지 않고 잡지 <러시아 사상>에 1893년 10 월호부터 이듬해 7월호까지 실렸다. 단행본으로는 1895년에 나왔다. 1895년에는 야스나야 폴랴나로 톨스토이를 방문하기도 했다. 체호프가 살던 멜 리호보와 야스나야 폴랴나는 멀지 않은 거리에 있다. 체호프는 1901년 9월, 톨스토이가 요양차 머물던 크림반도의 가스프라에도 갔었다.

《갈매기》는 1895년 초고를 완성해 1896년 10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알렉 산드린스키 극장에서 초연되지만, 형편없는 작품이란 혹평을 받았다. 그 후 《갈매기》는 많은 수정작업을 거쳐 1898년 12월 모스크바 예술극장에서 재상연해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 후 《바냐 아저씨》, 《세 자매》, 《벚꽃동산》 등 불후의 명작들이 잇달아 태어났다. 

▲ 체호프 부부 

체호프는 1898년 그의 희곡이 모스크바 예술극장에서 상연될 때 여배우 올리가 크니페르를 만났다. 크니페르는 당시 이 극장의 간판 여배우였다. 두 사람의 관계는 1900년경부터 빠르게 발전되어 1901년 5월 결혼식을 올렸다. 체호프의 건강 상태는 1900년부터 나빠지기 시작했다. 1902년에는 아내 크니페르도 병이 들어 그는 병든 몸으로 아내의 병간호까지 해야 했다. 1903년 1월에는 늑막염도 앓았다. 《벚꽃동산》은 이해 여름 집필에 들어가 10월에 탈고했다. 12월에는 아픈 몸으로 《벚꽃동산》 연습 을 보러 다녔다. 《벚꽃동산》은 1904년 1월 초연되어 큰 호평을 받았다.

병이 깊어진 그는 1904년 6월 3일 남독일의 바덴바일러로 요양을 떠났다. 그러나 건강을 회복하지 못한 채 7월 3일 그곳에서 장결핵으로 눈을 감았다. 유해는 7월 9일 모스크바로 돌아와 노보제비치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의학은 나의 본처, 문학은 애인”이라고 했던 천재 작가 안톤 체호프는 수많은 불후의 명작을 남기고 44세의 아까운 나이에 그렇게 세상과 이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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