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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가 바이칼에 간 까닭은?

[연재16회]

  • 기사입력 2022.04.22 22:02
  • 기자명 이정식 작가

우리나라 소설에 바이칼 호수와 시베리아가 등장하는 것은 춘원(春園) 이 광수(李光秀, 1892~1950)의 소설 《유정(有情)》(1933)이 최초다. 《유정》은 바이칼에서 시작해 바이칼에서 끝난다. 주인공이 바이칼 호 인근 시베리아 삼림 속에서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하는 풀기 난감한 남녀의 애정 문제를 다룬 소설이다.

그런데 그 시절에 어떻게 바이칼과 시베리아가 소설의 배경이 되었을까? 시베리아를 주요 무대로 소설을 썼다는 것이 경이롭다. 작가가 직접 체험하지 않고는 쓸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소설에는 추운 겨울의 묘사도 많다. 지금도 겨울의 시베리아를 경험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인데 하물며 모든 여건이 어려웠을 그때야 말할 것도 없다. 

그 시절 이광수는 어떤 연유로 바이칼까지 갔을까? 우리나라 현대 소설의 개척자로 불리는 이광수는 22세 때인 1914년 바이칼 호수 인근에 있는 시베리아의 도시 치타에서 2월부터 8월까지 반년가량 머문 적이 있다. 이광수가 치타에 도착한 2월은 바이칼 호수가 가장 두껍게 어는 시베리아 겨울의 절정이다.

이광수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되는 <신한민보>의 주필로 가기 위해 치타까지 갔다가 여비 문제로 출발하지 못하고 시간을 보내던 중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유럽행이 봉쇄되면서 발이 묶였다. 러시아를 지나 유럽까지 간 후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가려고 한 당초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고 결국 조선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이광수가 바이칼에 간 것은 치타에 머무는 동안이었을 것이다. 춘원은 바이칼 호수 지역을 둘러보며 깊은 인상을 받은 것 같다.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 19년 후에 내놓은 작품이 바로 《유정》이다.

◉ 《유정》의무대 바이칼 호수

《유정》은 남편(최석)이 중국에서 데려와 자식처럼 키운 죽은 친구의 딸(남정임)과 남편 사이를 불륜으로 오해한 부인이 난리를 피우는 바람에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는 내용이다.

주인공 최석은 일본으로 유학간 정임이 아프다는 전보를 받고 도쿄로 떠나는데 부인은 그런 남편과 정임 사이를 의심한다. 의심은 정임과 같은 기숙사에 있는 조선 여학생이 부인에게 최석을 그리워하는 내용이 담긴 정임의 일기를 훔쳐 보냄으로써 결정적으로 굳어진다. 부인이 길길이 뛰며 퍼뜨린 소문 때문에 최석은 교장직에서 물러나고 신문에까지 ‘에로 교장’이라고 기사가 실리는 등 여론의 뭇매를 맞는다. 그는 결국 집을 나와 시베리아로 간다. 세상을 등지기 위해서다.

그러나 부인과 가족들은 최석이 세상을 정리하면서 친구 N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뒤늦게 진실(두 사람이 불륜에 빠진 것이 아니라는)을 알게 된다. 일본에서 서울로 온 남정임이 병중임에도 최석의 딸 순임과 함께 그를 찾아 시베리아로 떠나지만 최석은 남정임이 도착하기 직전 세상을 떠난다는 비극적인 스토리다.

▲ 27세 때의 이광수(1919 

물론 소설 속에서 최석과 성장한 남정임 사이에는 나름 사랑의 물결이 일렁이지만 그것은 정신적인 선 을 넘지 않는다. ‘그러니 스캔들로 보면 곤란하다’는 어려운 얘기를 소설은 담고 있는 것 같다. 경성(서울) 과 일본, 만주, 시베리아, 바이칼 등을 무대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바이칼 호수에서온 주인공의 편지

소설은 최석의 친구 N의 다음과 같은 설명으로 시작된다. 최석으로부터 최후의 편지가 온 지가 벌써 일 년이 지났다. 그는 바이칼 호수에 몸을 던져 버렸는가. 또는 시베리아 어느 으슥한 곳에 숨어서 세상을 잊고 있는가. 또 최석의 뒤를 따라간다고 북으로 한정없이 가버린 남정임도 어찌 되었는지, 이 글을 쓰기 시작할 이때까지에는 아직 소식이 없다.

▲ 소설 《유정》의 표지(1934년으로 추정) 

이어 N은 친구 최석과 남정임의 누명을 벗겨주기 위해 최석으로부터 온 편지 사연을 공개하노라고 밝힌다. 소설은 편지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최석이 편지를 쓴 곳은 바이칼 호숫가 부랴트족의 한 민가다.

부랴트 족은 호수 일대에 사는 러시아의 소수민 족. 몽골족의 일파로 생김새가 우리 와 비슷하다. 다음은 편지의 서두다.

믿는 벗 N 형!

나는 바이칼 호의 가을 물결을 바라 보면서 이 글을 쓰오. 나의 고국 조 선은 아직도 처서 더위로 땀을 흘리 리라고 생각하지마는 고국서 칠천 리 이 바이칼 호 서편 언덕에는 벌써 가을이 온 지 오래요 이 지방의 유일한 과일인 ‘야그드’의 핏빛조차 벌써 서리를 맞아 검붉은 빛을 띠게 되었소. 호숫가의 나불나불한 풀들은 벌써 누렇게 생명을 잃었고 그 속에 울던 벌레, 웃던 가을꽃까지도 이제는 다 죽어 버려서, 보이고 들리는 것이 오 직 성내어 날뛰는 바이칼 호의 물과 광막한 메마른 풀판뿐이오. 아니 어떻게나 쓸쓸한 광경인고. 남북 만 리를 날아다닌다는 기러기도 아니 오는 시베리아가 아니오, 소무나 왕소군이 잡혀 왔더란 선우의 땅도 여기서 보면 삼천 리나 남 쪽이어든……. 당나라 시인이야 이러한 곳을 상상인들 해 보았겠소?

이러한 곳에 나는 지금 잠시 생명을 붙이고 있소. 연일 풍랑이 높은 바이칼 호 를 바라보면서 고국에 남긴 오직 하나의 벗인 형에게 나의 마지막 편지를 쓰고 있소.

지금은 밤중. 부랴트족인 주인 노파는 벌써 잠이 들고 석유 등잔의 불이 가끔 창틈으로 들이쏘는 바람결에 흔들리고 있소. 우루루 탕하고 달빛을 실은 바이 칼의 물결이 바로 이 어촌 앞의 바위를 때리고 있소. 어떻게나 처참한 광경이 오……. 

가출한 최석의 목적지는 바이칼 호수였다. 편지에서 주인공은 묵고 있는 민가가 있는 곳이 바이칼 서편 언덕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이르쿠츠크와 가장 가까운 어촌 마을 리스트비얀카나 그 인근쯤 되지 않을까.

최석은 “소무나 왕소군이 잡혀 왔더란 선우의 땅도 여기서 보면 삼천 리나 남쪽이어든……” 이라고 했다. 선우는 흉노의 우두머리. 선우의 땅이란 흉노의 땅이니 지금의 몽골을 포함한 만리장성 이북의 광범위한 지역을 일컫는 다하겠다.

소무는 중국 전한(前漢) 때의 명신이다. 선우에게 붙잡혀 복종할 것을 강요당했으나 이에 굴하지 않아 북해(중국에서는 바이칼을 北海, 즉 ‘북쪽의 바다’로 불렀다) 부근에 19년간 유폐되었던 인물이다. 왕소군은 서한 원제(元帝) 때 흉노와의 친화정책을 위해 흉노의 왕 호한야 선우에게 시집간 궁녀인데 중국 4대 미인의 하나로 일컬어지고 있는 여인이다. 미인임에도 불구하고 궁정의 화공에게 뇌물을 주지 않아 추하게 그려지는 바람에 흉노에게 보내지게 되었다. 황제가 그림을 보고 그중 미색이 떨어지는 궁녀를 보내기로 했던 모양이다. 원제는 왕소군을 보내기로 결정한 후에야 그녀의 뛰어난 미모를 알게 되었다. 그녀가 떠난 후 화공들은 원제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전해진다. 물론 전설 같은 이야기다.

▲ 민속춤을 추는 부랴트족(우스찌오르다 부랴트 민속박물관)  

최석은 하얼빈에서 열차를 타고 북만주의 광활한 광야를 지나 얼음의 땅 시베리아로 향한다. 그가 내릴 곳은 시베리아 가운데에 있는 작은 도시 이르쿠츠크. 그곳에서 바이칼 호수로 가려는 것이다. 소설 속의 최석은 열차에서 본 시베리아의 풍경과 정처없는 나그네가 된 자신의 심정을 N에게 이렇게 전하고 있다.

가도 가도 벌판. 서리 맞은 마른 풀 바다. 실개천 하나도 없는 메마른 사막. 어디를 보아도 산 하나 없으니 하늘과 땅이 착 달라붙은 듯한 천지. 구름 한 점 없건만도 그 큰 태양 가지고도 미처 다 비추지 못하여 지평선, 호를 그린 지평선 위에는 항상 황혼이 떠도는 듯한 세계.

이 속으로 내가 몸을 담은 열차는 서쪽으로 서쪽으로 해가 가는 걸음을 따라서 달리고 있소. 열차가 달리는 바퀴 소리도 반향할 곳이 없어 힘없는 한숨같이 스러지고 마오.

기쁨 가진 사람이 지루해서 못 견딜 이 풍경은 나같이 수심 가진 사람에게는 가장 공상의 말을 달리기에 합당한 곳이오. 

바이칼에서 시작해 바이칼 이야기로 끝나는 최석의 편지는 어린 남정임을 데려다 키우게 된 사연부터 남정임의 성장과 그로 인해 집안에서 계속되어 온 크고 작은 갈등들, 그리고 남정임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이후 최석 이 시베리아에서 최후의 편지를 쓸 때까지 벌어진 모든 일들을 소상히 적고 있다. 최석의 긴 편지는 마지막 작별인사를 전하면서 이렇게 마무리된다.

인제 바이칼에 겨울의 석양이 비치었소. 눈을 인 나지막한 산들이 지는 햇빛에 자줏빛을 발하고 있소. 극히 깨끗하고 싸늘한 광경이오. 아듀! 이 편지를 우편에 부치고는 나는 최후의 방랑의 길을 떠나오. 찾을 수도 없고, 편지 받을 수도 없는 곳으로…… 부디 평안히 계시오. 일 많이 하시오. 부인께 문안드리오. 내 가족과 정임의 일을 맡기오, 아듀!

이 편지를 부친 후 최석은 시베리아의 삼림 속으로 들어가 오두막을 짓고 산다. 그러고는 오래지 않아 병으로 생을 마친다. 정임이 도착했을 때는 막 숨을 거둔 후였다. 정임은 폐결핵이 깊은 상태로 최석이 잠든 시베리아에 남 는다. “여러분은 최석과 정임에 대한 이 기록을 믿고 그 두 사람에 대한 오해를 풀라”라는 친구 N의 말로 소설은 끝난다.

《유정》은 1933년 10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76회에 걸쳐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다. 《유정》은 이광수가 가장 자랑스러워한 작품이었다. 그는 언젠가 자신의 전 작품 중 후세에 영향을 끼칠 만한 것이 있다면, 또 외국어로 번역될 만한 것이 있다면 《유정》이라고 말했다.

이광수가 치타까지 가게 된 상황을 살펴보면 톨스토이와 묘한 인과관계 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톨스토이는 이광수가 러시아에 가기 4년 전인 1910년에 세상을 떠났고, 이광수는 이전에 톨스토이를 본 적도 없지만 이광수가 치타까지 가게 된 원인 중에는 톨스토이가 있었다. 그 전말은 이러하다.

◉ 열살에 고아가 되다

1892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난 이광수는 10세 때인 1902년 8월 콜레라로 부모를 잇달아 잃고 고아가 되었다. 몰락한 양반이었던 부친 이종원은 사망 당시 52세였고, 모친 충주 김씨는 당시 33세였다. 모친은 16세 때 무려 열아홉 살이나 나이가 많은 이종원과 결혼했다. 이광수는 부친이 마흔 두 살 때 얻은 만득자(늦게 얻은 아들)다. 모친은 부친의 세 번째 부인이며 전실 소생 아들들도 있었으나 모두 어려서 죽었다고 한다. 이광수에게는 당시 애경(1897년생)과 애란(1900년생)이라는 두 여동생이 있었다.

부친은 돈벌이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어쩌다 면에서 호적 베끼는 일 등 별로 돈벌이도 안되는 자질구레한 일을 하거나 술이나 마시러 다녔으므 로 집안 형편은 날로 어려워졌다. 집안에 돈이 될 만한 것은 모두 팔아 겨우 겨우 끼니를 이어가는 형편이었다. 나중에는 내다 팔 것도 없었다. 모친은 겨울에 솜옷도 못 입은 채 떨고 지냈다.

괴질(호열자, 콜레라)이 전국을 휩쓸던 1902년 8월, 이광수의 부친이 이 병에 걸려 누운 지 며칠 만에 세상을 떠났다. 이광수가 밖에 있다가 집에 돌아 와 방에 들어가 보니 어머니가 (아버지가 이미 숨이 끊어진 줄도 모르고) 조용히 하라고 손을 내저으며 “지금 막 잠이 드셨다”라고 말했다. 손을 코 아래 대 보았다. 숨이 없었다. 동네 사람들에게 아버지의 사망을 알리고 집에 들어오니 어머니가 해괴한 짓을 하고 있었다.

집에 와서 나는 이상한 광경을 보고 놀랐다. 그것은 어머니가 젖먹이를 업고 아버지의 시체를 타고 넘는 것이었다. 타고 넘는 그 일에 놀란 것보다는 그때 어머니의 표정에 놀란 것이었다. 나는 어머니가 그때처럼 침착한 표정을 하는 것을 처음 보았다. 

(……) 

“어머니 왜 아버지 송장을 타고 넘우?” 하고 나는 어린 마음에 그 행동이 하도 수상해서 물었다.

“이렇게 시체를 타고 넘으면 데려간대. 나허구 애란이허구는 아버지를 따라가야지. 너와 애경이허구는 오래오래 살어야 하고.”

(……)

“어머니 죽지 말어. 잉.”“

아니다. 나허구 애란이허구가 죽어야 너희들이 잘 산다. 수경이가 귀하게도 되고.” 

(《그의 자서전》, 1936)*

“내가 안 죽으면 네가 지게를 지고 소를 몰아야 되는고나. 나마저 죽어야 네가 공부를 하여서 후세 귀하게 되지.”(《나》, 1947)

전염병인 콜레라로 죽었으므로 동네에서 들여다보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아버지를 밀짚 거적에 싸서 밭 어귀에 묻은 지 8일 만에 모친마저 세상을 떴다. 모친은 죽을 작정으로 식음을 전폐했다. 모친 역시 콜레라에 걸려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남매는 갑자기 고아가 되었다. 큰 여동생은 조부 이건규의 집에 맡겨졌고, 모친이 업고 있던 젖먹이 작은 여동생 애란은 민며느리로 어느 집에 맡겼는데 1년 만에 이질로 죽고 말았다.

이광수는 외가와 친척집을 전전하며 밥을 얻어먹었다. 재당숙 집에 기거 할 때 삼종 누이의 영향으로 《사씨남정기》, 《창선감의록》, 《구운몽》 등을 빌려 보았는데 이 무렵 나름대로의 이야기 하나를 창작해 삼종들에게 보인 일도 있다. 이광수는 문학이란 것을 처음 접촉한 것이 이때였다고 기억한다. 이광수는 이 시절 담배장사도 했다. 때로는 평양까지 걸어가서 담배를 사다가 시골 동네에 되팔아 조금씩 이문을 남겼다. 

◉ 고아의 행운-동학과의 만남

졸지에 고아가 된 지 1년이 조금 지난 어느 겨울날(1903년 11월경) 이광수는 조부 집으로 가는 길에 눈 녹은 산기슭에 앉아 이를 잡고 있었다. 길에서 이를 잡은 이유는 ‘광수하고 잤는데 이가 옮았다’라는 얘기를 듣지 않기 위해서였다.

지나가던 상인 승이달이 이를 잡고 있는 이광수에게 다가왔다. 승이달은 이광수를 아는 것 같았고 그를 아무 말 없이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다. 승이달은 그 지역 동학당의 중간 수령이었다. 

승이달의 집에서는 그의 부인이 이광수의 머리를 빗겨주고 옥양목으로 된 옷을 새로 입혀주었다. 그리고 동학 이야기를 하고 동학책 등을 보여주었 다. 이광수는 승이달 집에 한 달 남짓 머물렀다. 승이달이 보니 이광수가 한문을 잘 알고 글도 잘 짓는 등 영민했다. 그래서 이광수를 그의 윗선인 정주 지역 동학 두령 박찬명 대령에게 소개했다.

당시 동학의 지도자인 대도주 의암 손병희(孫秉熙, 1861~1922, 동학 제3대 교 주, 천도교 창설, 3・1운동 민족대표 중 한 사람)는 일본에 피신 중이었고, 국내의 최고 책임자인 수청대령은 후일 친일파가 되는 이용구였다.  

이광수는 1903년 12월경부터 박찬명 대령의 집에 기숙하며 심부름을 하게 되는데, 그 심부름이란 게 도쿄와 서울에서 오는 문서를 베껴서 배포하는 중요한 일이었다. 말하자면 전령 같은 역할이었는데 이광수 본인은 후일 이를 ‘비서’라고 표현했다. 동학이 탄압을 받고 있을 때였으므로 남의 의심을 사지 않을 어린아이를 전령으로 쓴 것 같다. 이광수는 그 일을 곧잘 했다. 그러한 동학과의 인연으로 이광수는 13세 때인 1905년 8월 일진회의 유학생 9명 중에 뽑혀 일본 유학을 가게 되었다. 부모를 여읜 지 3년 만이다. 이광수는 고향 정주에서 독학으로 일어를 익힌 적이 있어 그 덕을 보았다.

그러면 일진회란 무엇이며 동학과 무슨 관계인가?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터진 후 일본에 있던 동학 교주 손병희는 이 전쟁에서는 전쟁의지가 강한 일본이 승리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동학은 민족 종교이며 반일을 기치로 내세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손병희는 일단 전쟁을 치르는 일본에 협조한 후 우리나라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장차 이로울 것으로 판단했다. 그는 동학의 국내 책임자 이용구에게 동학 내 개화운동조직인 진보회와 친일파 송 병준이 만든 일진회(당초 이름은 유신회)를 통합해 1904년 12월 새로운 일진회 를 출범시키도록 했다. 이듬해 이광수 등을 일본에 유학 보낸 그 일진회다. 그러나 1905년 9월 러일전쟁 승리 후 일본이 조선에 대한 침략 야욕을 본격화하고 동학의 2인자인 이용구가 친일로 완전히 변절함에 따라 손병희는 1905년 12월 이용구 등 친일분자들을 축출하고 동학의 조직을 천도교로 바 꾼다.

이광수가 당시 일본 유학을 가게 된 것도 하나의 운이라면 그것은 그가 고아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운이라고 할 수 있다. 기구한 운명의 그에게 던져진 하나의 선물이었다고 하겠다. 이광수는 일본에 도착해 도쿄의 도카이 의숙에서 일어를 정식으로 배운 후 다음 해인 1906년 3월 다이세이 중학교 1학년에 입학했다. 이 학교 동급생 중에 후일 소설 《임꺽정》을 쓰는 홍명희(洪命憙, 1888~1968)가 있었다. 이 광수와 홍명희는 이때부터 평생 인연을 맺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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