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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이 되어

  • 기사입력 2022.05.01 21:31
  • 최종수정 2024.02.03 15:20
  • 기자명 김희재 작가
▲ 김 희 재 (수필가, 한국어 교육 전문가

 나는 오랫동안 외국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쳤다. 처음 시작할 적엔 그저 말과 글만 정확하게 잘 가르치면 되는 줄 알았다. 세월이 많이 지나고 나서야 그게 다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제대로 된 좋은 선생이 되려면 요즘 말로 ‘뷰 맛집’이 되어야 했다. 뷰 맛집이란 창문을 통해 보이는 풍경이 좋은 집을 일컫는 말이다. 그저 그런 풍경도 적절하게 잘 달린 창문을 통해 보면 액자 속의 작품이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때로는 사람이 창문이 된다. 낯선 사람에게 새로운 문화를 알려주는 통로가 바로 사람인 것이다. 그런 시각으로 보면, 한국어 선생은 외국인에게 우리나라를 차근차근 보여줄 수 있는 첫 번째 창문이다. 처음 한국에 온 외국 학생들에게 한국어 교육은 단지 강의실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선생과 함께 있는 모든 시간, 모든 장소가 다 교육 현장이 된다. 그래서 한국어 선생은 언제 어디서나 공식 직함 없는 외교관의 심정으로 외국 학생을 대해야 한다. 그들에겐 처음 만난 한국어 선생이 곧 우리나라에 대한 첫인상이기 때문이다. 

 육군대학교에서 외국 장교와 가족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칠 때였다. 그해 따라 유난히 가족을 동반하고 온 장교들이 많았다. 한국말이 안 통하는 그들에게는 한국에서의 모든 일상이 쉽지 않았다. 나는 단지 언어만 가르치는 게 아니라 생활 속 자잘한 어려움도 풀어주어야 했다. 소통할 수 있는 매개언어가 있는 학생은 가르치기가 수월한데, 아내와 어린 자녀 중엔 자기네 말밖에 못 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런 학생들과 소통할 방법은 표정과 몸짓, 눈빛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학생들과 꽤 잘 통했다. 서로의 마음과 마음이 닿은 덕분이었다.

  그녀는 카자흐스탄 장교의 아내였다. 한국에 온 지 얼마 안 되어 첫아이를 임신했다. 입덧도 그리 심하지 않게 잘 지나갔다. 같은 반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은 그녀를 막내 여동생처럼 귀여워했다. 체구가 작은 데다가 유난히 동안(童顔)인 덕분이었다. 

  임신 7개월쯤 되었을 때, 갑자기 그녀의 배가 몹시 아팠다. 구급차에 실려서 종합병원 응급실로 급히 갔지만 끝내 조산(早産)하고 말았다. 충분히 자라지 못한 채로 세상에 나온 아기는 인큐베이터에 속에서 간신히 명줄을 붙잡고 버텼다. 어미는 밤낮없이 아기 걱정하느라 애가 닳았다. 병원의 모든 시설이 다 낯선 데다가 의사소통도 원활하지 않으니 더 불안하고 답답해했다. 산모의 긴장을 풀어주고 의지가 되어줄 사람이 꼭 필요했다. 

  나는 강의를 마치면 곧장 병원으로 달려갔다. 인큐베이터 속에 있는 아가의 상태도 내가 가야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눈도 못 뜬 핏덩이가 부디 잘 견뎌내기를 진심으로 응원했지만, 아기는 겨우 5일밖에 버티지 못했다. 화장터에서 작별의식을 치르는 내내 그녀는 넋이 나간 사람 같았다. 제대로 소리 내어 울지도 못했다. 이름도 못 짓고 떠난 아기의 마지막 길을 외국 장교 가족들과 학교 관계자들이 함께 정중히 배웅했다. 모두가 다 한국에 와서 처음 만난 사람들인데, 객지에서 서로 의지하며 살다 보니 진짜 가족보다 더 가깝게 되었다. 

  장례를 마치고 난 후에 그녀는 극심한 슬픔에 빠졌다. 미역국을 끓여 가지고 가서 보니 아기를 잃은 상실감보다 더 큰 고통을 겪고 있었다. 아기는 없는데 무섭도록 탱탱 붇는 모유가 문제였다. 첫아기를 잃은 산모는 젖몸살을 다스릴 힘이 없었다. 병원에 가자고 해도 힘없이 고개만 저었다. 할 수 없이 나 혼자 의사 선생님을 찾아가 전후 사정을 설명하고 약을 처방받았다. 약봉지를 받아 들고 그녀는 오래 참았던 울음을 엉엉 토해냈다. 나도 같이 울었다. 

  행여 그녀가 우울의 늪에서 영영 헤어나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이 많았는데, 다행히 2주 만에 다시 한국어 수업에 나오기 시작했다. 모두가 따뜻하게 그녀를 보듬었다. 외국 장교들의 교육 과정은 무사히 잘 끝났고, 학생들은 졸업식장에서 서로 끌어안고 눈물로 작별했다. 

  그 학생들이 귀국한 지도 벌써 15년이 넘었다. 그사이에 나는 교단을 떠났고, 팔팔하던 그들은 중년 고개를 넘어가고 있다. 우리는 지금 SNS로 서로의 근황을 전하고 있다. 요즘 올라오는 사진을 보면 다들 부쩍 성숙한 모습이다. 그들이 올린 글에다 내가 가끔 쉽고 짧은 한국어로 댓글을 달아주면 무척 반기며 즐거워한다. 아직도 한국어를 잊지 않은 것이 정말 대견하고 자랑스럽다. 

  얼마 전에는 그녀의 남편이 아기 사진을 올렸다. 사진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아니, 팔짝 뛰게 기뻤다. 첫돌 정도 되어 보이는 예쁜 공주님이었다. 한국에서 그렇게 첫아기를 잃고 나서 오래 기다린 끝에 찾아온 천사인 모양이다. 눈이 동그랗고 뺨이 통통한 것이 그녀를 꼭 빼닮았다. 너무 반갑고 좋아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들은 여전히 나를 선생님이라고 부르지만, 실제로는 역할이 완전히 바뀌었다. 지금은 그들이 내게 다른 세상을 아름답게 보여주는 '뷰 맛집'이 되었다. 나는 SNS에 노출되는 것을 꺼리는 편인데, 그들이 올리는 소식에는 간간이 댓글과 이모티콘으로 화답하고 있다. 우리가 이런 방식으로 소통하며 여기까지 오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여하튼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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