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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얼기설기한 골프 편력기

  • 기사입력 2022.05.06 16:51
  • 기자명 이석복 작가
▲ 歡喜 이석복(수필가, 차세대미래전략연구원 이사장

 나의 골프 역사(歷史)는 1981년 가을부터 시작되었다. 의정부에 있었던 한미야전군사령부(CFC:Combined Field Army/1992년 6월 공식해체)에서 근무할 때였다. 그곳에서 대령진급예정자로 명령을 받은 날이 목요일이었는데 다음날 부사령관(한국군 최선임자, 육군소장)께서 토요일에 진급 축하 라운딩을 할 예정이니 골프준비해서 나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그 부대는 영내에 미군들이 만든 9홀짜리 골프코스(18홀이 정규코스)가 있어 한국군은 불문율(不文律)로 참모급인 대령 이상만 골프를 허락하고 있었다. 나는 당연히 골프채도 없고 어떻게 플레이하는 줄도 몰랐기 때문에 난감했다. 우여곡절(迂餘曲折) 끝에 같은 부서에서 근무하다 귀국하는 미군 소령이 폐기하려 했던 고물 골프채를 양도받아 우선 아쉬운 대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골프 소모품은 영내 골프숍에서 한국군 회원에게도 판매하기 때문에 골프화와 장갑 등을 준비해서 다음 날 부사령관의 골프 초청에 허겁지겁 응할 수 있었다.

첫 타석에서 앞서 플레이하는 분들이 하는 대로 티(Tee)를 꼽고 볼을 올려놓은 다음 내 딴에는 드라이버를 힘껏 휘둘러서 볼을 쳤다. 그런데 아뿔싸! 아무런 타격 느낌이 없는 게 아닌가. 아래를 보니 볼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헛스윙을 한 것이었다. 너무 무안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데 부사령관이 괜찮으니 천천히 볼을 끝까지 보면서 다시 쳐보라고 다독여 주었다. 두 번째도 볼이 빗맞아 뜨지 않고 잔디위로 데굴데굴 굴러갔다. 아무튼 그렇게 정신없이 첫 라운딩을 했는데 완전 생초짜와 함께 라운딩을 해주신 부사령관의 인내심과 배려(配慮)에 감사하고 죄송했을 뿐이었다. 

그런 인생 첫 골프 라운딩 후 골프 관련 책도 사서 읽어보고 영내 닭장같이 생긴 간이연습장에서 몇 번 볼을 때리는 연습을 하니 골프공을 그럭저럭 맞출 수는 있었다. 그 다음 주 라운딩에서는 캐디에게 코치도 받고 같이 플레이하는 선배들에게 조언을 받으며 조금씩 골프 매너와 실력이 발전해 갔다. 통상 골퍼가 되려면 사전에 티칭프로 지도하에 연습장에서 충분히 연습 후 필드(골프코스)에 나오지만 나의 경우는 바로 필드에 나가 배우면서 플레이하는 ‘실전군인형’ 골퍼라고나 할까? 아무튼 최단 시간에 골퍼가 된 것은 틀림없었다.

캐디의 말에 의하면 실제로 미군들은 그런 경우가 흔하다고 했다. 6개월 후 그 부대를 떠날 때에는 골프에서 가장 중요한 매너를 체득한 신사다운 정직한 규칙준수와 동반자에 대한 배려 등을 그런대로 터득하고 타수도 100타(기본타수가 72타)를 깰 수 있었다. 

그후 서울 용산의 합동참모본부로 전근(轉勤)을 했고 바쁜 업무 때문에 골프 할 기회가 별로 없었다. 그러다가 1982년 9월 경, 정보본부장(군 정보분야 최고직위, 중장)을 수행해서 태국에 정보교류회의 차 출장을 나간 적이 있었다. 그런데 주말에 태국측으로부터 방콕에서 멀지않은 휴양지 파타야로 골프 초대를 받았다. 물론 태국측에서 우리 일행을 위해 골프채를 비롯해 모든 준비를 완벽히 해서 골프 라운딩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 골프장에 나가보니 맙소사! 골퍼 1인당 캐디가 4명이 따라 붙는 것이 아닌가? 골프채 담당, 우산 담당, 의자 담당, 전방 볼 담당 이런 식이었다. 내 평생에 이런 골프는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태국의 외국 귀빈을 모시는 의전은 골프뿐 아니라 만찬 등에서도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전방 연대장 근무를 마치고 미국 국방대학원(워싱턴 D.C.)으로 군사유학(軍事遊學)을 가게 되어 난생 처음으로 새 골프채(Ping)를 구할 수 있었다. 워싱턴에서는 주말에 근교의 군 골프장에서 주미(駐美) 무관부 요원이나 해리티지 재단에 있던 선배분하고 가끔 1달러 내기 골프를 즐기기도 했다. 이때쯤 내가 나름대로 목표했던 보기플레이(Bogey, 핸디캡 18, 90타)를 하는 수준이 되었던 것 같다. 

미 국방대학원을 졸업하고 귀로(歸路)에 스위스를 들렀을 때 마침 대사(大使)로 계신 옛 상관(대대장시 사단장)께서 골프 초대를 해주셔서 알프스산과 호수의 숨막히는 경관을 즐기며 라운딩을 했던 추억도 있다. 귀국해서는 역시 바쁜 업무로 별로 골프를 즐길 여유가 없었고, 장군으로 승진해서도 별반 기회가 많지 않았다. 골프를 칠 환경이 되지 않는 전방 근무 시에는 주로 테니스로 여가를 즐기고 체력을 단련하곤 했다. 사단장을 마치고 국방부에서 국장 근무를 하다가 갑자기 한미연합사령관(CFC C/G)의 요청으로 부참모장(군사정전위원회 수석대표 겸무)으로 보직이 바뀌어서 때아닌 골프 복(福)이 터지게 되었다.

군사외교(軍事外交) 상 오고가는 미군 장성들과 성남 미군 골프장에서 자주 라운딩을 했다. 한미 연합군사훈련을 성공리에 마치고 나서 가끔 미군 사령관이 한미연합사 전(全) 한·미군 대령급 이상을 초청하여 골프운동을 하기도 했는데, 대상이 많아 모든 팀을 1홀부터 18홀까지 배치하여 지정된 시간에 동시에 플레이를 시작하는 식의 골프 게임을 하기도 했다. 운동 후 장타상, 근접상, 최저타상, 행운상(맨 꼴찌 바로 앞) 등을 시상하면서 만찬을 즐겼던 낭만도 있었다. 라운딩을 비교적 자주 하다 보니 내 골프목표(Bogey play)를 초과해서 80타대 중반(핸디캡 14)을 치는 수준으로 업그레이드가 되기도 하였다.

내 군생활 마지막 보직이었던 이때 내가 과거에 모셨던 옛 상관을 초청해서 라운딩 후 클럽하우스에서 랍스타 요리와 포도주로 정성껏 대접해 드렸던 흐뭇한 기억도 있다. 전역한 후 내가 잘한 일은 테니스만 하던 아내에게 좀 늦었지만 더 늦기 전에 골프를 권유한 것이었다. 나이 들면서 부부가 함께 운동할 수 있는 것은 골프가 최고라는 선배들의 말도 들은 바 있었고, 아내도 군 골프장에서는 회원 대우를 받아 비용도 큰 부담이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전역할 때 미군 성남골프장의 회원권을 1년 정도 유지할 수 있어서 정식 라운딩이 끝난 오후 3시 경이면 집사람과 둘이서 9홀을 자유롭게 라운딩 할 수 있었다. 아내가 친 볼이 마음에 안 들면 몇 번이고 다시 치기도 하고 어쩌다 한 번 잘 치면 천재적 소질이 있다고 칭찬도 해 흥미를 갖도록 애썼다. 나의 이런 지극 정성으로 아내는 이내 먼저 골프를 시작한 동기생 부인들과 어울릴 수 있었다. 

그 후 몇 년간 동기생 부부 4쌍이 일 년에 한 번씩 일본 후쿠시마(사고 전)나 구마모토 지역에 골프 여행을 가서 온천과 음식을 즐기기도 했다. 2015년 쯤 인가 한 번은 일본 큐우슈 섬의 남단에 있는 미야자키에 겨울 골프를 한 여행사의 안내로 우리 부부가 간 적이 있었다. 같은 일행 중에 중년부부가 있었는데 우리 부부를 보고 자기들의 꿈이 우리 부부 나이 때 까지 골프를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듣기 좋은 얘기지만 어른으로서 오히려 조심스러웠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이후에는 나라 상황도 어렵고 또 이어서 코로나 사태도 겹쳐 우리 부부는 골프를 자제하고 있다. 올해 여든이 되었는데 더 나이 들기 전에 다시 우리 부부가 마음 편히 골프를 칠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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