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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기행문으로 쓰려다 소설이 되다

[연재 18회]

  • 기사입력 2022.05.07 08:33
  • 기자명 이정식 작가

이광수의 《유정》은 당초 기행문으로 구상되었던 것이다. 그는 청년시절 자신이 경험했던 시베리아와 바이칼 호수의 이야기를 신문에 기행문 형식으로 실으려고 했다가 소설로 만들어 연재하게 되었다.

《유정》이 <조선일보>에 연재되기 시작한 1933년 10월은 이광수가 7년간 <동아일보> 편집국장의 자리에 있다가 <조선일보>로 자리를 옮긴 직후였다. 이광수는 이해 8월 <조선일보> 부사장에 취임했다. 《유정》은 말하자면 이광수가 <조선일보>로 옮긴 후 처음 쓴 ‘신고작(申告作)’이라고 할 수 있다. 이광수는 《유정》을 <조선일보>에 연재한 지 7년 후인 1940년 10월 파인 김동환(金東煥, 시인, 1901~1950, 납북)이 운영하던 월간지 <삼천리>에 실은 ‘단종애사와 유정’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이렇게 밝혔다.

이전에도 시베리아 방랑시절에 한 번 보기는 했지만, 그 후 재차 하얼빈에서 치치하얼을 거쳐 만주리로 갈 때 보주선(寶州線, 만주서부선, 즉 만주에서 시베리아로 연결되는 철로) 그 일망무제한 넓은 벌을 석양에 지나가게 되는데, 붉은 낙조의 세례를 받는 광야의 특유한 풍경은 실로 한 장관을 정(呈)하고 * 있어서 그것을 꼭 한 번 기행문으로 쓰려고 마음먹고 <동아일보>에 쓰려 하다가 그만 <조선일 보>사로 자리를 옮기자 중지했으며, 그 후 이야기를 집어넣어서 소설화시키는 것도 매우 좋으리라 생각하고 ‘유정’이란 제목을 붙여 소설화시킨 것이다. (<삼천리>, 1940년 10월)

그런데 위의 글을 보면 “재차 하얼빈에서 치치하얼을 거쳐 만주리로 갈 때”란 말이 나온다. 이광수가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탔던 1914년 그때는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한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만주를 지나갔다. 만주 북쪽 도시 만주리를 지나면 얼마 안가 러시아 영토인 치타에 도착한다. 그것이 최초의 시베리아 횡단열차 동쪽 노선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바롭스크를 지나는 지금의 노선은 1916년에 완공되었다.

    

이광수는 시베리아 치타에 갔다가 6개월 만에 귀국한 후 다시 시베리아에 간 일은 없다. 1932년 <동아일보> 편집국장 시절 만주를 시찰했던 적은 있는데, 심양, 안산, 대련 등 남만주 지역이었다. 그래서 ‘재차’라는 그 대목은 무슨 의미인지 알 수가 없다. 

이광수는 해방 후인 1948년에 쓴 《나의 고백》에도 다음과 같이 《유정》을 쓰게 된 동기를 적어놓았다.

나는 한 달 동안 추정(이갑)의 말동무를 하다가 눈이 많이 내리는 어느 밤 기차로 물린(穆陵, 우리말로는 목릉이며 현재 중국어 발음으로는 무링)을 떠나서 치타로 갔다. 치타는 아라사 땅으로서 바이칼 주의 수부(수도)다. 눈 덮인 몽고 사막과 흥안령을 넘어서 시베리아로 달리는 감상은 비길 데 없이 광막하여서 청년 나의 꿈을 자아냄이 많았다. 나의 소설 《유정》은 이 길을 왕복하던 인상을 적은 것이다. (《나의 고백》, 춘추사, 1948) 

이광수의 젊은 시절 시베리아 방랑의 경험은 그의 일생을 통해 수많은 작품에 영향을 주었다. 장편소설 《유정》(1933)은 물론이거니와 《어린 벗에게》 (단편, 1917), 《시베리아의 이갑》(수필, 1931), 《무명씨전》(단편, 1931), 《그의 자 서전》(장편, 1936), 《다난한 반생의 도정》(자전, 1936), 《나의 고백》(자전, 1948) 등 많은 작품 속에 흔적을 남기고 있다.이 가운데  《유정》 외에 시베리아 이야기가 가장 많이 들어 있는 것이 《그의 자서전》과 《나의 고백》이다. 

특히 《그의 자서전》에는 오산학교를 떠난 후의 이광수의 방랑 일정이 자세히 나온다. 말하자면 그가 기행문으로 쓰려던 것을 《유정》에 일부 쓰고, 또 그것을 포함한 나머지 내용을 《그의 자서전》에 대부분 기록한 것이다. 《그의 자서전》은 이광수 자신의 자서전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군데군데 소설적인 허구를 집어넣어 재미를 가미했음에도 불구하고 상당 부분이 광수의 실제 자서전이며 기행문을 혼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의 고백》은 해방 후 쓴 것이지만 시베리아 이야기를 많이 담고 있다. 당시 시베리아에 간 것이 독립운동가로서 간 것임을 말하고 싶어서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어쨌든 이 작품들을 보면 러시아와 시베리아에 대한 이광수의 애착 같은 것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은 이광수가 중학교 시절 이래로 톨스토이를 숭배하는 톨스토이주의자이기도 했지만, 시베리아 치타에서의 경험과 러시아인들 에게서 받은 긍정적인 인상이 러시아에 대해 평생 좋은 기억을 갖게 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 시베리아의 조선 사람들

소설 《유정》은 물론 시베리아 방랑에 대해서 쓴 이광수의 여러 작품 들은 100년 전 시베리아를 오가며 하얼빈 등에서 본 나라 잃은 조선 사람들의 모습과 시베리아에서 살고 있던 동포들의 가난한 생활상,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 직후의 러시아의 모습을 보여준다. 

《유정》에서 이광수는 시베리아로 가면서 하얼빈에서 본 조선인들의 측은한 모습을 최석의 눈을 통해 이렇게 그려놓았다.

하얼빈에 내린 것은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석양이었소.

나는 안중근이 이등박문(伊藤博文, 이토 히로부미)을 쏜 곳이 어딘가 하고 벌판과 같이 넓은 플랫폼에 내렸소. 과연 국제도시라 서양 사람, 중국 사람, 일본 사람이 각기 제 말로 지껄이오. 아아, 조선 사람도 있을 것이오마는 다들 양복을 입거나 청복을 입거나 하고 또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말도 잘하지 아니하여 아무 쪼록 조선 사람인 것을 표시하지 아니하는 판이라 그 골격과 표정을 살피기 전에는 어느 것이 조선 사람인지 알 길이 없소.

아마 허름하게 차리고 기운 없이, 비창한 빛을 띠고 사람의 눈을 슬슬 피하는 저 순하게 생긴 사람들이 조선 사람이겠지요. 언제나 한 번 가는 곳마다 동양이든지 서양이든지 ‘나는 조선 사람이오!’ 하고 뽐내고 다닐 날이 있을까 하면 눈물이 나오. 더구나 하얼빈과 같은 각색 인종이 모여서 생존경쟁을 하는 마당 에 서서 이런 비감이 간절하오.

아아, 이 불쌍한 유랑의 무리 중에 나도 하나를 더 보태는가 하면 눈물을 씻지 아니할 수 없었소.

이광수가 《유정》을 <조선일보>에 연재한 1933년은 그가 안창호 선생의 지시로 국내에 만든 민족운동단체인 동우회(수양동우회)를 이끌고 있던 때였다. 민족에 대한 측은한 감정과 안타깝고 답답한 조국의 모습을 소설 속에서 그대로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이제 하얼빈을 지나 치타에 온 이광수. 이광수가 본, 시베리아에서 사는 조선 사람들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이광수는 《그의 자서전》에서 “치타에 있는 조선 사람들은 더러는 감자와 오이 농사를 하고, 더러는 빨랫간(세탁소)을 하 고, 조선에서 온 인텔리들은 궐련마는 일을 해서 밥벌이를 하고 있었다. 모두들 정성도 있고 친절도 하고 좋은 사람들이었으나, 또 모두들 궁한 사람이 었다”라고 적고 있다. 

◉ 금점꾼 이야기

그런가 하면 당시 시베리아에는 조선 사람 금점꾼이 많았던 모양이다. 금점꾼이란 말은 요즘엔 잘 안 쓰지만 과거에는 소설에서도 심심치 않게 나왔던 직업이다. 원래는 금광에서 일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었지만 여기서 말하는 금점꾼이란 사금채취꾼이다.

가끔 금점꾼들이 내 사무실을 찾아왔다. 그들은 대개 십여 년씩 금광으로 방랑하는 사람들이었다. 꽁이깨 짐(침대를 아라사 말로 꼬이까라고 하는데, 조선 사람들은 꽁이깨라고 발음을 한다)을 지고 도끼 하나, 삽 하나, 마른 면보(빵) 한 자루, 이것만 있으면 시베리아 벌판 어디고 못가는 데가 없다. 대개는 삼사 인이 한 ‘알쩨리’(한팀)가 되어서, 수입은 평균 분배를 하고, 또 열, 스물이 의형제를 모아서 고락을 같이한다고 한다. 겨울 여행에는 날이 저물면 땅을 파고 통나무를 찍어서 그 구덩이에 불을 놓고 불이 다 탄 뒤에 그 구덩이 속에 들어가 자면 아주 뜨뜻하다는데, 어떤 때에는 자다가 깨어 보면 하늘에서 눈이 내려서 이불 모양으로 몸을 덮는다고 한다. “모두들 삽 하나씩은 있것다, 구덩이 파는 재주는 있것다.” 그들은 이 구덩이 파고 자는 것을 퍽 유쾌하게 말하였다.

그러다가 금 있는 데를 얻어 만나면 통나무들을 찍어다가 우물 정(井)자로 올려 쌓고 가는 나무로 지붕을 덮고, 그러고는 쇠털같은 풀을 뜯어다가 문틈을 막고 창으로 서양목 헝겊을 치고 물을 뿜으면 얼어서 유리창처럼 되고 그러고는 방 한편 구석에다가 돌멩이 더미를 쌓고 밑에 아궁이를 만들고, 거기다가 불을 때어 돌들이 뻘겋게 단 뒤에 물을 퍼다가 뿌리면 방 안이 더운 증기가 꽉 차서 아주 후끈후끈하게 된다고 한다. 

눈이 많이 오는 날이면 사슴 사냥을 해서 구워 먹고 다만 한 가지 걱정이 여편 네가 없는 것이어서 어떤 사람은 십사 년간 조선 여자 구경을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사금을 한 전대씩 허리에 차고는 이르쿠츠크나 웰흐네우진스크나 치타나 이러한 도시에 나와서 술과 계집에 그 전대를 톡 털어 버리고는 또 꽁이깨 짐을 지고 나선다고 한다.

 

“아무개는 계집아 손 한 번 잡아 보고 반 숟가락, 입 한 번 맞추고 한 숟가락~ 이렇게 퍼 주었읍디.” 

한 숟가락이란 물론 금가루 말이다. 나는 이런 생활을 하는 사람을 백 명은 더 만났을 것이다. 그들은 다 낙천적이 요, 되는 대로 살아간다는 맘 놓음이 있었다.<그의 자서전>

조선 사람들은 이곳에서 정교회의 세례를 받는 일도 많았다. 종교적인 이유가 아니라 사회적인 신분의 확보와 경제적 도움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정교회의 세례를 받고, 그 증서인 메트리카 한 장을 몸에 지니는 것은 여행권 이상의 효과를 가졌었다. 이 메트리카가 있으면 여행도 자유롭게 할 수 있고 취직도 할 수 있었다. 이것이 없는 사람은 거의 법률의 보호권 밖에 있었다. 정교회의 세례를 받은 이에게는 또 한 가지 좋은 일이 있었다. 그것은 교부와 교모를 가지는 것인데, “내가 세례를 받게 되었으니 교부가 되어주오, 교모가 되어주오” 하고 청하면 어떠한 신사 숙녀라도 그것을 거절하지 않았다. 또한, 한 번 교부와 교모가 된 후에는 일생에 부자관계, 모자관계를 계속 할 뿐더러 그 교부, 교모의 자녀들과도 형제자매의 관계가 있었다. 그래서 경 제적으로 될 수 있는 대로 도움을 주었다. 조선 사람들 중에는 이것을 이용 하는 사람들도 있어서, 이광수가 치타에 갔을 때는 아라사 명사들이 조선 사람의 교부, 교모 되기에 진저리를 낸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이광수가 금점꾼들을 만났을 때는 미국가는 일도 틀어지고 돈도 다 떨어 져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금점꾼들을 따라 시베리아를 방랑 해볼까’, ‘시베리아에서 방랑하는 수십만 동포를 가르치고 인도하는 자가 되 어볼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때 마침 제1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하루에도 몇 번씩 호외가 돌고 총독부 앞 넓은 마당에는 징발되어 오는 장정들이 천 명씩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와 차르에게 서약식을 행하고는 짐 차에 실려서는 서쪽으로 서쪽으로 향하였다. 이 집에서 저 집에서도 남편을 빼 앗긴 아내, 자식을 빼앗긴 부모들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내가 묵는 방에서는 밤이 깊도록 이웃집에서 나는 울음소리가 들리고 길거리에 나가 다니면 어느 구석에서도 울음소리 아니 들리는 곳이 없었다.

장정을 실은 열차가 치타 역을 떠날 때에는 남자들은 “우라(만세)”를 부르나 부인네들은 목을 놓아서 울었다. 그 우는 소리가 조선 부인네들 울음소리와 다름이 없었다.

 

치타 강가에 앉았노라면 장정과 말을 실은 열차가 길다란 구렁이 모양으로 딸려 나와 까사르라는 치타 교외의 정거장을 떠나서 모스크바 쪽으로 향하고 기운차게 달리는 것이 보였다.

(……) 내가 날마다 먹을 것을 사러 가는 가게에는 하루는 전혀 보이지 않던 늙은이 하나가 앉았을 뿐이요, 낯익은 주인은 보이지 아니하였다. 그것은 나와 친한 유쾌한 젊은 사람이어서 내게 외상을 곧잘 주고 농담도 잘하던 사람인데, 그 사람이 없었다.

나는 면보(빵)며 설탕이며 순대며, 이런 것을 사자고 했다. 그 노인은, 나는 물건이 어디 있는지 값이 얼만지도 모르니, 예전에 사던 값을 내고 마음 대로 가져가오. 하는 말이 퍽 슬펐다. 아들 형제가 다 전장에 나간 것이었다. (《그의 자서전》)

◉ 이광수가목격한, 불안에 떠는 러시아의유대인들

이광수가 치타에서 만난 독립운동가 이강은 1902년 하와이로 노동 이주를 떠났다가 1904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안창호 선생을 만난 이후 독립 운동에 투신한 분이다.

그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안창호 선생 등이 조직한 신민회 지부를 설치하고 1908년부터 <해조신문>과 <대동공보>를 차례로 발행하며 독립의 식을 고취하는 데 힘썼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으로 떠나기에 앞서 블라디 보스토크의 <대동공보>에 들러 이토 히로부미의 하얼빈 방문 소식을 확인하고 출발했다. 이강은 당시 연해주 지역의 독립운동 지도자 최재형과 더불어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거사를 뒤에서 지원한 인물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이강은 1910년 <대동공보>가 정간되자 시베리아 치타로 가서 <대한인 정교보>를 발행했다.이강의 집은 시베리아 국민회 본부이자 국민회의 기관지 <대한인 정교보> 의 발행소였다. 방 두 칸 부엌 한 칸의 조그마한 러시아 집인 이곳에서 이광수는 <대한인 정교보>에 글을 쓰며 미국에서 여비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 다. 몇 달 후 여름이 오면서 이강이 생활고로 집을 줄여 이사를 하게 되는 바람에 이광수는 따로 유대인 집에 방 하나를 얻었다. 그 방은 그 집에서 가장 큰 방이었다. 방을 얻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제1차 세계대전이 터졌는데, 유대인들은 포그롬(유태인 대규모 학살사건) 이 또 오지 않나 하여 전전긍긍했다.

전쟁이 나자, 집주인은 딸을 부랴부랴 혼인시켰다. 어찌될지 모르는 세상이니 딸의 주인이라도 정해주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신랑도 언제 전쟁터에 불려갈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의 자서전》의 시베리아 유대인에 대한 이 야기는 《나의 고백》에 이렇게 이어진다.

그들(유태인들)은 슬라브족에게서 미움과 천대를 받는다. ‘예우레이(유태 사람)’ 이라면 큰 욕이 될 정도로 유태인은 미움을 받았다. 역사상으로 포그롬이란 것은 러시아인의 유태인 학살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래도 그들은 러시아를 위해서 나가 죽어야 하였다. 내 주인집 사위도 그렇다. 그는 건강한 청년이었다. 그들의 교당인 시나고그에서 유태교식으로 결혼을 하고 돌아와서 내 방을 빌어서 잔치를 하고 춤을 추는 것이었다. 신랑과 신부는 서로 껴안고 수없이 입을 맞추면서 춤을 추었다. 손님들은 손뼉을 치고 발을 굴러서 음악을 대신하여 주었다. 신랑 신부는 천지간에 자기네 둘 밖에 없는 것처럼 열광적으로 껴안고 입을 맞추고 하다가 나중에는 신랑이 신부를 번쩍 쳐들어 가지고 내 침대로 가 버렸다.

뒤에 남은 손님들은 초상집에서 경야(밤샘)하는 사람들 모양으로 시무룩하고 술을 마셨다. 며칠 후에 주인집 딸 나딸리아는 혼인 때에 입던 옷을 입고 울면서 내 방으로 뛰어 들어와서 내 목에 두 팔을 걸고 매달리며, ‘내 야꼽이 전장에 나갔어요. 다시는 못 돌아와요.’ 하고 내 가슴에 낯을 비비고 흐느껴 울었다. 그는 열여덟 살이었다. 그의 어머니도 주름 잡힌 얼굴에 눈물을 흘리면서 따라 들어왔다.

그 당시 유대인은 나라 없는 백성이었다. 2000년 동안 나라없이 떠돌면서 유대인들이 세계 도처에서 당한 고난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치타 역의 벽화 앞에 서있는 러시아 군인들 

◉ 치타를 떠나 귀국길에오르다

이광수는 치타에서 샌프란시스코에 갈 여비를 기다리는 동안 처음부터 일이 잘못되었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는 상해를 떠날 때는 블라디보스토크나 이갑이 있는 무링까지만 가면 여비가 해결될 줄로 생각했다. 그런데 <신한민보> 주필 여비로 샌프란시스 코에서 온 천 불이 상해에서 거의 없어지고 나머지 200불가량만을 가지고 떠난 것임을 알았다. 

물론 그가 치타에서 미국행을 포기한 것이 단순히 여비 문제 때문만은 아니었다고 《그의 자서전》 등에서 쓰고 있지만, 첫째는 언제 올지 모르는 여비를 막연히 기다릴 수 없었고, 둘째는 치타에 머무는 동안 미국행에 대한 매력이 식어버렸기 때문이다. 

미국 쪽에서 다시 오라는 기별을 치타에서 받았을 때는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유럽으로 가는 길 자체가 막히게 되었다.  1914년 8월 초, 러시아가 전국에 총동원령을 내리자 이광수는 더 이상 치타에서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결국 그는 8월 하순 치타를 떠났다. 귀국 여 비는 이강이 마련해 주었다.

이광수는 귀국해 오산에 들렀다가 오산학교 측의 요청으로 다시 그곳에 서 약 1년간 학생들을 가르쳤다. 또한 시간이 되는 대로 경성(서울)을 오가며 육당 최남선이 차린 출판사 신문관(新文館)에 들러 최남선이 창간한 <소년>, <청춘> 등에 글을 쓰며 편집을 거들었다. 이 잡지들은 후에 일제에 의해 모두 폐간되었다. 

▲ 효자동 집에서 집필 중인 이광수(1941)

이듬해인 1915년, 최남선은 뒷날 <동아일보> 사주가 되는 호남 부자 인촌 김성수(金性洙, 1891~1955)에게 이광수를 소개하는데, 이광수는 그의 지원으 로 이해 9월 재차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그는 일본 와세다대학 고등예과에 약 1년간 다닌 후 1916년 9월 같은 대학 철학과에 입학한다. 

그뒤 <매일신보>로부터 연재소설을 청탁받는데, 이때 쓴 것이 1917년 정 월 초하룻날부터 이 신문에 실린 장편연재소설 《무정(無情)》이다. 25세 때다. 조선 최초의 신소설로 일컬어지는 《무정》은 독자들로부터 큰 반향을 불러일 으켰다. 그는 일약 유학생들 사이에 명사로 떠오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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