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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와 허영숙–만남, 영원한 이별

[마지막 연재 19회] 한때는 중이 되고자 절에 들어가기도...납북돼 평양에서 사망
양주동 박사, "20 세기 초 조선의 천재 중 첫째가 이광수"

  • 기사입력 2022.05.07 09:32
  • 기자명 이정식 작가

그는 대학을 1918년 여름에 그만둔다. 성적은 우수했다. 그런데 그 시절 이광수는 애정문제로 복잡한 상황이었다.  이광수가 두 번째 부인이 된 허영숙(의사, 1897~1975)과 알게 된 것은 1917년이었다. 도쿄여의전에 다니던 허영숙은 도쿄의 유학생 모임에서 처음 이광수를 만났다. 허영숙은 이광수보다 다섯 살 아래다. 이광수는 허영숙이 의학교에 다닌다고 하자, “폐병에는 무슨 약이 좋으냐?”라고 물었고, 며칠 후 허영숙이 약을 사들고 이광수의 하숙집을 찾아갔다. 이 무렵 이광수는 소설 쓰기와 학교 공부 등 과로로 인해 폐병을 앓고 있었다. 허영숙은 이광수를 극진히 돌봤고 그는 허영숙의 정성스런 간호 덕에 건강을 회복한다. 그러면서 두 사람은 차츰 연인 사이로 발전했다. 이광수는 한때 미술공부를 하던 나혜석(화가 겸 소설가, 1896~1948)과도 사귄 적이 있으나 결국 허영숙에게 기울어졌고 결혼을 약속하기에 이른다.   

이광수는 아무 정도 없이 지냈던 첫 부인 백혜순과 1918년 9월, 얼마 동안 생활비를 보내주는 조건으로 이혼에 합의했다. 

이광수가 이혼을 했다고는 하나 자식까지 딸린(아들 진근) 그와의 결혼을 허영숙 집에서 승낙할 리 없었다. 당시 허영숙의 부친은 이미 세상을 떠나 집에는 모친뿐이었으나 모친은 완강하게 결혼을 반대했다.

1918년 7월 허영숙은 도쿄여의전을 졸업하고 귀국했다. 그런데 모친이 결혼을 끝내 승낙하지 않자 허영숙은 이해 10월 모친의 돈 거금 2천 원을 훔쳐 이광수와 북경으로 애정 도피행각을 벌였다. 허영숙을 따라 북경까지 가긴 했지만 이광수의 심중은 난처하고 복잡했다. 

그러던 중 이광수는 이곳에서 제1차 세계대전 종전과 더불어 약소민족의 독립과 자주적 결정을 존중해야 한다는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제창 소식을 들었다. 그는 11월 북경에서 급거 귀국한다. 이어 12월에 일본으로 돌아가 이듬해인 1919년 초, 2・8독립선언서(조선청년독립선언서)를 기초한다. 2・8 독립선언서에는 최팔용, 김도연, 송계백, 백관수, 이광수 등 11명이 서명했고, 2월 8일 도쿄의 한국YMCA에서 많은 유학생들이 참석한 가운데 발표되었다. 3・1운동의 기폭제가 된 독립선언서였다.

현재 도쿄의 한국YMCA 건물 앞에는 2・8독립선언기념비가 서 있고, 10층에는 조그만 2・8독립선언기념자료실이 있으며, 자료실로 올라가는 계단 벽에는 이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11명의 사진이 걸려 있다. 이광수의 사진도 물론 여기에 있다.  

국내에서 3월 1일 낭독된 기미독립선언서는 이광수가 10여 년 전 일본 유학시절부터 가깝게 지낸 최남선이 기초했다. 최남선이 이광수의 2・8독립선언서를 참고했을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광수는 2・8독립선언서를 쓴 직 후 동료들의 권유로 상해로 탈출했다. 그후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의 사장 겸 편집국장을 맡아 일했다. 그러다 1921년 상해로 찾아온 허영숙의 설득으로 귀국한다. 귀국 도중 체포되었으나 바로 불기소 석방되어 민족진영의 의심을 받기도 했다. 이광수는 이해 5월 허영숙과 정식으로 결혼한다. 

◉ 동우회 사건으로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

결혼 후 이광수는 <동아일보> 편집국장, <조선일보> 부사장의 자리에 있으면서 소설 등을 계속 집필한다. 그러면서 도산 안창호 선생의 지시로 만든 민중계몽단체 동우회의 지도자로서의 활동도 계속한다.

그러나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7년 일제는 동우회를 독립운동 단체로 간주하고 이해 6월 대대적인 체포에 들어가 안창호, 조만식, 이광수, 주요한, 김동원, 홍난파 등 40명 이상을 옥에 가둔다. 이광수는 이 사건으로 5년형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이해 12월 병보석으로 풀려나온 뒤 8개월간 병원생활을 한다. 안창호 선생은 감옥에서 병이 악화되어 병보석으로 나온 이듬해인 1938년 봄 세상을 떠났다. 수감되었던 동우회원 2명도 옥사했다. 동우회원이었던 작곡가 홍난파는 출옥 후 감옥에서의 고문 후유증으로 1941년 8월 세상을 등졌다. 동우회를 이끌었던 이광수는 결국 일제에 무릎을 꿇고 만다.

▲ 동우회 사건으로 수감된 이광수(1937)

1939년 친일 문학단체인 조선문인협회 회장이 되는 등 친일 노선을 걷기 시작한 그는 1941년 가야마미츠오(香山光郞)로 창씨개명을 한다. 그의 전향의 결과인지는 몰라도 재판을 받던 동우회원 40여명은 1941년 11월, 4년 반 만에 모두 무죄선고를 받는다. 결국 이들을 전부 전향시켜 친일의 대열에 올려놓았으니 일제의 술책은 성공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광수는 그 뒤 각지를 순회하며 친일 연설을 하고 도쿄에 가 재일 조선 유학생들에게 학병에 나갈 것을 권유하는 등 적극적인 친일 활동을 한다. 그러다가 1945년 해방을 맞는다. 

◉ 이광수의고백과 불운한 최후

이광수는 1944년부터 경기도 양주군 사릉에 농가를 짓고 칩거하던 중에 해방의 소식을 듣는다. 해방 후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친일파에 대한 단죄의 움직임이 일자 허영숙은 1946년 5월 이광수와 이혼을 결행한다. 가족과 재산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광수는 해방 후에도 2년 이상 사릉에서 두문불출하다가 1948년 12월 《나의 고백》을 내놓는다. 변명으로 보이지 않도록 애를 썼지만, 결국 자신의 친일 행위에 대한 변명을 쓴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해방 이후까지의 자신의 인생에 대한 자전 형식의 긴 글이다.

이광수는 《나의 고백》의 뒷부분에 자신의 심경을 이렇게 적었다. 

과거 칠팔 년 걸어온 내 길이, 그 동기는 어찌 갔든지 민족정기로 보아서 나는 정경 대도를 걸은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조선 신궁에 가서 절을 하고, 가야마 미츠오로 이름을 고친 날, 나는 벌써 훼절한 사람이었다. 전쟁 중에 내가 천황을 부르고 내선일체를 부른 것은 일시 조선 민족에 내릴 듯한 화단(禍端)을 조 금이라도 돌리자 한 것이지마는, 그러한 목적으로 살아있어 움직인 것이지마는 이제 민족이 일본의 기반을 벗은 이상 나는 더 말할 필요도 또 말할 자격도 없는 것이다.

가장 깨끗하자면 해방의 기별을 듣는 순간에 내가 죽어 버리는 것이지마는 그것을 못한 나의 갈 길은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그래서 나는 해방 후 만 이 개년 가만히 있었다. 내가 사릉 집도 버리고 양주 봉선사로 간 것은 아주 산중에 숨어 버리자는 결심에서였다. 그러나 나의 건강과 가정의 사정이 그것을 허하지 아니하여서, 산에서 나와 다시 소설을 쓰게 되었다. (……)

몇몇 친구들은 벌써부터 나더러 참회록을 쓰기를 권하였다. 그러나 나는 그 권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그것은 내가 나를 변명하는 것이 사내답지 못하다고 생각하였음이다. 

(……)

그런데, 반민법도 이미 실시되었으니 내가 언제 심판을 받을는지도 모르고, 심판을 받으면 어떠한 법의 처분을 받을는지 모르니 아직 글을 쓸 수 있는 동안에 민족운동과 나와의 대략을 적어서 평소에 나를 사랑하고 염려하여 주던, 또는 나를 미워하고 저주하던 이들에게 내 심경을 알리고자 하여 이 글을 쓴 것이다. 나는 동포에 대하여 아무러한 장래의 약속도 할 처지에 있지 아니하다. 대개 나는 국법의 죄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생명이 남아 있는 동안 내게는 무슨 사명도 남으리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 사명을 따라서 여생을 바칠 것이다.

이광수는 1949년 1월 친일행위와 관련해 반민특위의 재판을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2월에 병보석으로 풀려난다. 사릉 농민 300여 명이 이광수의 석방을 위해 탄원서를 제출했고, 당시 중앙중학 6학년이던 아들 영근이 “병중에 잡혀간 아비 대신 갇히게 해 달라’는 내용의 혈서를 써 반민특위에 내기도 했다. 

이광수는 출감 후 《사랑의 동명왕》을 집필하는 등 다시 글쓰기를 시작했 고, 이해 9월 반민특위의 불기소로 자유로운 상태가 되었다. 그는 이해 12월 《사랑의 동명왕》을 탈고했다. 모처럼의 편안한 시기를 맞았으나 이 또한 오 래가지 못했다. 고혈압과 폐렴으로 효자동 집에 누워 있을 때 6・25가 터졌다. 병중의 그는 피난도 갈 수 없었다. 7월 5일 효자동 집은 인민군에 의해 차압되었고, 그는 12일 북으로 끌려갔다.

▲ 지금은 음식점으로 변해 버린 효자동의 이광수 집.

6・25때 납북되었다 탈출한 전 국회의원 계광순의 증언에 의하면, 7월 18일 평양감옥에서 이광수를 봤는데, 기침을 너무 심하게 해 독방으로 옮겨졌다고 했다. 평양감옥에서 수갑을 찬 채 갈가리 찢어진 셔츠를 입고있던 이광수를 본 사람도 있었다. 이광수는 비참한 상황 속에서 사경을 헤매다 후에 북한의 부수상까지 오른 옛 친구 홍명희의 도움으로 만포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으나 끝내 회복하지 못한 채 이해 10월 25일 숨을 거뒀다. 현재 평양시 룡성구역에 있는 ‘재북인사의 묘’에는 이광수의 묘비가 위당 정인보의 묘비 등과 함께 서 있다.

◉ 허영숙에게 눌려 지낸이광수

우리나라 최초의 여의사 중 한 사람이요, <동아일보>에서 의학전문 기자도 했던 허영숙. 부잣집 딸로 자라 17세에 혈혈단신 일본 유학을 감행한 허영숙은 당시 대표적 신여성 중 한 사람이었다.

결혼 후 가정에서의 주도권은 대체로 허영숙에게 있었던 것 같다. 부부관계가 그다지 편안했던 것 같지는 않다. 이에 관해서는 둘째 딸 이정화 씨의 증언이 참고가 될 만하다. 미국에 살고 있는 이정화 씨는 2014년 잠시 귀국 했을 때 <조선일보>와 가진 인터뷰(2014년 10월 14일 자)에서 이렇게 말했다.

“ ( 어머니는) 생전에 아버님을 많이 구박했지요. (……) 어머니는 강한 성격이었 고, 가족을 위해서는 물불을 안 가렸지요. 자신이 운영하는 산후원(산부인과 병원)에서 일을 잘 못하고 말 안 듣는 의사나 간호사의 뺨을 때리기도 했어요. 소설의 주인공이 돼도 좋을 캐릭터이지요. 흥미로운 일생을 사셨어요. (……) 아 버님이 꼼짝 못했어요.”

《유정》 속에서 아내의 감정 변화를 분석하는 조용한 성격의 최석의 모습은 바로 이광수의 모습이 아닐까 한다. 마찬가지로 최석 부인에게서 보이는 성격적 일면 역시 허영숙의 어떤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유정》에서 최석이 시베리아로 가출하는 상황 설정은 톨스토이의 가출을 연상케도 하지만, 가정에서 부인에게 늘 눌려 지냈던 이광수의 정신적 도피 심리를 나타낸 것으로 분석되기도 한다. 그러한 분석은 근거가 있다. 이광수가 1930년 <별건곤(別乾坤)>이란 잡지 10월호에 짤막하게 쓴 ‘부인 허영숙 씨에 대하여’란 글도 그중 하나다.

( 허영숙은) 무엇이든지 자기가 나보다 잘났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하는 일이라든지 신변에 관해서 간섭을 아니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보면, 늙은 어머니가 어린 아들에게 하듯 하는 것 같습니다. 내가 하는 일은 모두가 미덥지가 못하고 마음이 놓이지 아니하는 모양이지요. 그래서 그러한 일로 전에는 싸움도 많이 했지만 인제는 싸움을 할 용기도 나지 아니하고 해서 그저 복종을 할 따름입니다. 내 신변에 관해서는 심지어 구두, 양말까지도 전부 참견을 합니다 그려, 허 허…….

◉ 허영숙의후회

6・25전쟁이 끝나고 허영숙은 남편의 소설과 글들을 모아 전집을 출간할 생각으로 출판사를 설립했다. 1956년 이광수의 ‘광’과 허영숙의 ‘영’을 합쳐 광영사라는 이름으로 효자동의 자택 겸 병원이었던 허영숙 산원에 세운 출판사가 그것이다.  그러나 흩어져 있는 글들을 모아 전집을 만든다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광영사 이름으로 《춘원선집》 24권을 내긴 했지만 미진해, 결국은 몇 년 후 조직이 갖춰져 있는 삼중당의 도움을 받아서 제대로 된 《이광수 전집》 20 권을 출간하기에 이른다. 삼중당에서의 전집 출간은 1960년대에 수년에 걸쳐 진행되었다. 

▲ 이광수의 가족. 왼쪽부터 허영숙, 둘째 딸 정화, 큰딸 정란, 아들 영근, 이광수(1939년경)  

이에 앞서 1955년 문선사(文宣社)란 출판사에서 《사랑하는 영숙(英肅)에게》라는 제목으로 젊은 시절 이광수가 허영숙에게 보낸 편지를 모아 책을 냈다. 그때 허영숙은 출판사의 요청으로 납북된 남편 이광수를 그리는 ‘남편 춘원을 생각하고’란 제목의 애절한 글을 여기에 실었다. 이 글은 10폰트 글자로 A4용지 12매에 이르는 짧지 않은 분량이다. 글에는 허영숙이 결혼생활 동안 남편에게 심하게 한 것을 자책하고 후회하는 내용이 많으며 일반인이 잘 모르던 춘원의 모습도 들어 있다. 다음은 그 글의 일부다.

◉ ‘남편 춘원을 생각하고’-허영숙의 글

나는 당신과 삼십여 년을 살았고 그 반 이상을 병구완만 하고 지냈습니다마는 나는 당신에게 좋은 아내는 아니었습니다. 당신의 인격의 가치를 깊이 깨닫고 높이 받들고 묵묵히 복종하는 아내는 아니었습니다. 내가 당신보다 잘난 것처럼 잘난 체를 하고 내 말이 옳고 당신 말은 옳지 않다고 주장하는 아내였습니다. 당신을 떠나 육 년 동안 깊이 반성해 본 후에 당신의 가치를 이제야 겨우 알았사오며 내가 교만하고 잘난 체한 것이 이렇게 뼈아프게 후회되나이다. 이제 당신을 다시 만나기만 한다면 다시 그런 죄를 범하지 아니하겠다고 맹세합니다. 이제 당신을 다시 만나기만 한다면 내 무덤에 ‘이광수의 착한 아내’ 라고 쓰기에 넉넉하리만치 섬기오리다. 

(……)

나는 당신이 아직 살아 계신다는 것을 믿지 못하겠습니다. 점점 날이 갈수록 믿지 못하겠습니다. 그렇게 병이 많은 당신, 혈압이 높고, 신장이 하나밖에 없 고, 늑골이 두 마디가 끊어지고 척추가 세 마디가 썩고, 폐가 삼분지 이밖에 황량이 없는 당신이 어떻게 지금껏 사셨기를 바라오리까.

(……)

바로 혼인하던 날 저녁에 당신은 병석에 누워 거의 팔 년 동안을 일어나지 못하였습니다. 그사이의 쓴 글은 모두 누워서 쓰셨거 나 내가 대필한 것입니다. 나는 혼인하고도 여덟 해 동안 아기를 낳지 못하였습니다. 나는 이렇게 오랫 동안 당신의 병구완으로 좋은 시절을 다 보냈지마는 나는 당신의 좋은 아내는 아니었습니다. 내가 당신보다 잘나고 당신은 내 덕에 사시는 것처럼 나는 당신을 휘둘렀습니다. 당신은 얼마나 괴로운 부부 생활을 하셨습니까. 나는 당신하고 같이 사는 동안 당신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 했습니다. 혹은 물질적으로 평가하고 혹은 육체적으로 평가하여 당신을 괴롭혔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큰 사건이 우리의 이혼사건입니다. 

◉ 허영숙이밝힌이광수와의이혼 사유 세 가지

이광수・허영숙 두 사람의 이혼은 해방 후 이광수가 친일파로 몰리고 있는 상황에서 허영숙이 혼자 저지른 일이다. 허영숙은 이광수의 오산학교 제자이자 백병원 설립자인 백인제 씨의 친동생 백붕제 변호사(형제 모두 6・25 때 납북)와 상의해 이광수가 경기도 사릉에서 지낼 때 남편도 모르게 이혼 수속을 했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봄의 일이다. 허영숙은 백붕제 변호사와 함께 종로구청 호적계를 찾아가 이혼 수속을 끝냈다. ‘이광수의 지병으로 인한 오랜 병간호와 이씨의 생활력 부족으로 부부생활을 원만하게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란 게 이유였다.

▲ 젊은 시절의 허영숙과 나혜석 가족. 왼쪽부터 나혜석, 나혜석의 남편 김우영, 허영숙, 나혜석의 작은오빠 나경석, 나혜석의 동생 나지석  

이유는 짐작하다시피 재산을 지키기 위한 것이 가장 컸다. 이에 대해 허영숙은 계속되는 이 글 ‘남편 춘원을 생각하고’에서 이혼사건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다. 특히 이광수를 따르던 시인 모윤숙(1910~1990) 등 일부 여성들에 대해서는 적개심을 숨기지 않고 있다. 이혼사건이 있었던 1946년 겨울 사릉에 있던 춘원은 돌베개를 베고 자다 입이 돌아간 일까지 있었다. 허영숙의 글은 이렇게 이어진다.

내가 이혼한 이유는 세 가지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첫째 나는 원래가 서울 한 바닥 종로 상인 허종이란 분의 막내딸로 자라났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드름전 (포목상)도 하셨고 배전(배만 파는 곳)도 하셨고 집장사도 하시고 종종 고리대금도 좀 하신 것 같습니다. 그런 분위기에서 자라난 나는 물질이라든지 금전에 대해서 담박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일확천금을 하려고 서두르지는 아니하였어도 절검저축을 목적으로 삼고 한 가정의 장래의 생활을 위해서는 남의 일을 돌아볼 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에 당신과 갈등이 있었습니다. 

춘원을 잘 아시는 분은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춘원은 돈이라든지 물질이라든지에는 거의 떠난 사람이었습니다. 거지가 문전에 오면 나는 일 전짜리를 주지마는 춘원은 손에 잡히는 대로 일 원짜리도 십 원짜리도 아낌없이 내어주는 사람 이었습니다.

(……)

은행 보증을 서서 차압의 독촉장들이 나오고 가난한 친구들의 방문으로 제때에 밥을 제대로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 방문객이 많아 병환이 나고 그 병 구완은 나 혼자 도맡아 하게 되니 가정생활의 충돌이 자주 생겼습니다. 지금 나이 육십이 되어 남편을 잃어버린 자리에 앉아 생각하면 그것이 다 내 잘못이며 이제 다시 안 그러리라 깨닫지마는 젊은 시절 상인의 가정에서 자란 나로서는 진정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 그리하여 이분하고 이러고 살다가는 늙게 아이들 공부도 못 시키고 거지가 되겠다 하는 것이 내가 이혼한 이유의 하나였습니다. 

둘째로 내가 이혼한 이유는 반민법 때문이었습니다. 국회에서 정한 반민법 법규에 의하면 중한 자는 사형, 종신, 십오 년 이상, 경한 자는 재산 몰수하고, 귀양 보낸다. 이러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원래부터 춘원이 여기에 걸려서 죄를 받으 리라고는 믿지 아니했지마는 재산 몰수를 당하지나 아니할까 하는 의심을 혼자 가지고 있었습니다. 대개 다른 나라의 예를 볼지라도 정치적 소동이 일어나면 그 일에 흥분된 민중들은 시비를 가리지 못하고 날뛰면서 잔인한 행동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내 이혼문제에 대해서는 북쪽으로 납치되어 가신 P(백붕제) 변호사(당신의 친구)께서 많이 조언해 주셨으며 그것은 전혀 우리 가족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P 변호사가 안 계셨더라면 내가 할 줄 몰라서도 또는 겁이 나서 못 하였을는지도 몰랐을 것입니다. 재산이라야 내가 친정에서 가지고 시집온 집 두어 채 논 마지기였던 것이나 만일 그것조차 빼앗기면 우리 아이들의 장래 가 암담했기 때문입니다.

(……)

내가 이혼한 원인의 마지막 이유는, 춘원을 따르는 여성이 많았던 것입니다. 혹은 문학을 배우러 오고 원고를 가지러 오고, 문학 이야기를 하러 오시라고도 오고, 원고 쓰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도 오고, 춘원의 방에는 문학소녀의 센티 멘탈한 그림자가 떠날 날이 없었습니다. 병이 나서 입원하고 있는 동안에도 여 자들이 늘 와 있어서 내가 가도 들어가 조용히 이야기할 틈이 없는 것이 나는 끔찍이도 싫었습니다. R양, P양 M여사, L여사, 미망인 N, K, 기생 출신, 또 K양, 꼽아보면 열 사람은 됩니다. 

춘원이 그들을 찾아간다든지 은근히 둘이 만난다든지 그런 일은 없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늘 앓고 있었고, 또 춘원은 양심적이기 때문에, 나를 속이는 일은 절대 없었으리라 나는 믿습니다마는 그들이 찾아다니는 것이 나는 싫었습 니다. 춘원은 나더러 “어머니나 형님과 같은 마음으로, 그 여자들을 애무해 주 라” 그러지마는 나는 그러한 선녀 같은 마음을 가질 줄 모릅니다. 마침내 M여사와 P양에 대해서는 세상에서 떠들게 되었습니다. 춘원을 두고 시집을 썼느니,* 이십 리나 떨어진 춘원의 정양처인 자하문 밖으로 매일같이 방문을 한다는 둥, P양은 내가 일본 가 있는 동안에 영근이의 가정교사로 집에다 데려다 두었다는 둥–나는 이 여러 가지 소문을 듣는 게 싫었습니다. 

춘원이 그 여자들하고 세상 사람이 말하는 그러한 저속한 연애에 빠지지 아니 하리라고는 깊이 믿는 바이지마는 공연히 쓸데없이 내 존재를 무시하는 짓을 하고 있는 것 같고, 몸이 조금 건강해지면 이런 소문을 내고, 그 계집아이들과의 교제에 피곤하여 병이 나면 그 병구완은 내가 하게 되고, 나에게는 얼마나 원통 한 일인지 몰랐습니다. 그런 일 저런 일로 내가 몰래 민적을 갈라놓고 가만히 되어가는 모양을 보자고 한 것이 이렇게 나쁜 일을 저지르게 된 것입니다. (……)나는 춘원에게 과연 매달려 산 사람이었습니다. 입으로는 강한 체하고 잘난 체 했지마는 기실은 춘원에게 대롱대롱 매달려 살다가 그 줄이 끊어지니, 나는 구렁텅이에 빠져 버린 것입니다. (……) 당신은 지금 어디 계십니까, 살아계십니까, 살아계시면 어느 곳에 계십니까, 진정으로 살아계신 줄만 안다면은 괴나리 봇짐 짊어지고 지팽이 짚고, 삼천세계를 다 돌아 걸어도 당신을 찾아내고야 말 것이언마는 그것조차 못 하는 이 슬픔이여!  1955. 10. 20 허영숙

《유정》 이야기를 하다가 여기까지 왔다. 이광수는 《유정》을 연재한 다음 해인 1934년 끔찍이도 사랑하던 일곱 살 된 아들 봉근을 병으로 갑자기 잃고 크게 낙담했다. 허영숙과의 사이에 결혼 8년 만에 낳은 첫 아이였다. 상심한 그는 <조선일보> 부사장을 사직하고 중이 되기 위해 금강산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를 안 허영숙이 금강산까지 달려가 난리를 피우는 바람에 속세로 돌아오고 말았다.

허영숙은 훗날 이광수가 납북되고 생사조차 알 수 없을 때 차라리 그때 남편이 중이 되도록 내버려두었다면 더 이상의 불행을 겪지 않았을 것이라며 후회하기도 했다고 한다.  

◉ 자신의 운명을 저주했던 천재, 그 안타까운 일생

이광수가 소설가가 된 것은 명석한 머리에 타고난 글재주가 그를 그 길로 이끌었으리라고 보지만, 그의 말에 따르면, 기구했던 어린 시절과 그 전 후의 정답고 쓰라린 일들을 그려보고 싶은 충동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 왜 소설을 썼는가? 그것은 불쌍한 부모님의 일, 나 자신의 기구한 어린 시대의 잊혀지지 않는 정다운 기억을 그려 보고 싶은 충동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것이다. 《무정》도 그 첫 부분인 영채의 어린 시대는 곧 나의 어린 시대의 정다 운 또는 쓰라린 기억이었다. 이것이 내가 처음에 소설에 붓을 대게 된 동기이다. (《다난한 반생의 도정》, 1936)

여기에다 톨스토이주의자인 이광수는 소설가요, 사상가인 톨스토이와 같은 길을 걷고자 하는 욕망도 당연히 가졌을 것이다.

위의 《다난한 반생의 도정》은 그가 40대 중반에 쓴 것인데, 그는 앞서 30 세에 쓴 글에서는 자신의 운명을 저주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10세 때 고아가 되어 갖은 고생을 하고, 10대 중반에 일본 유학의 기회를 갖는 등 남다른 경 험을 하기도 했으나 어쩌다 피 말리는 작업을 해야 하는 소설가요 문사의 길을 걷기 시작해 그사이 두 차례 결혼을 하고 서른에 다다른 시점이었다. 그는 자신의 지난 운명에 대해 ‘저주’라는 말로까지 표현했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돈 한 푼 없는 몸이 동서로 표류하여 가난의 고초를 받을 때 돌아갈 부모의 품도, 애인의 품도 없어, 혹은 시베리아 눈 쌓인 광야에, 혹은 일본의 비 뿌리는 풀판에, 혹은 고국의 무너지는 성의 비낀 볕에, 또 혹은 강남의 흐린 물가에 고독의 추움을 당할 때 나는 얼마나 나의 생명을 저주하였 던가요. 진실로 나는 내가 난 날을 저주하였고, 나를 먹여 기른 젖과 풀과 나무 의 열매를 저주하였으며, 나를 이 세상에 있게 한 모든 힘을 저주하였습니다. 천지의 만물이 모두 나의 미움과 원망과 저주의 대상이었습니다. (《인생의 향기》, 1922) 

이광수 스스로가 자신의 지난날의 기구한 운명에 대해서 한 이러한 이야기는 비장감 감도는 서사시적 느낌이 있다. 그가 중학시절부터 읽었을 구약 성서의 시편 등을 연상케 하는 문장이기도 하다. 《인생의 향기》에서 그는 단 순히 원망과 저주에 그치지 않고 다음과 같이 오늘날 자신을 있게 한 주위의 도움에 감사의 헌사도 바친다.

내게 있는 것이 없으매 내가 남에게  준 것은 하나도 없이 (고아가 된 후) 이십 년 을 하루같이 남에게 받아만 왔습니다. (……) 나를 무엇이기에 생면 부지하는 여러분들이 이처럼 먹여 주시고, 입혀 주시고, 공부시켜 주시고, 담배 사 주시고, 어디 간다면 차비와 선비(뱃삯인 듯) 주시고, 오면 반가이 맞아 주시고, 떠날 때에는 눈물로 작별하여 주셔서 오늘날까지 살아오게 하십니까. 아아 생각수록 감격의 눈물이 흐를 뿐입니다.  (……) 이제 와서는 내게는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 이제부터의 나의 생활은 실로 ‘감사와 사죄’의 생활일 것이외다.

그는 이 글에서 자신이 감사할 은인 중에 첫 분은 당신(하나님) 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당신(하나님)이 허영숙을 “일생에 나를 안아 보호할 아내”로, 구원의 사자로 보내신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결혼 다음 해에 쓴 이 글을 보면 이광수는 허영숙과의 결혼에 지극히 만족해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고, 비로소 마음의 평안과 생활의 안정을 찾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고난의 터널이 끝났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만족한 세월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광수의 전 인생을 통해 볼 때 그에게는 평안과 안정을 누렸던 기간보다는 고난의 시기가 더 길었고, 납북되어 홀로 맞은 최후 또한 비참했으니 그의 인생에서 행복을 떠올 릴 만한 기간들은 그리 길지 않았던 것 같다. 

▲ 이광수와 문인들. 왼쪽부터 이광수, 이선희, 모윤숙, 최정희, 김동환(1932) 

언젠가 국문학자 양주동(梁柱東, 1903~1977) 박사가 대학 강의 시간에, 20 세기 초 조선의 천재 중 첫째가 이광수요, 둘째는 홍명희, 셋째는 최남선, 넷 째는 정인보 그리고 자신이 다섯 번째쯤 된다는 얘기를 했다고 한다. 우리나라 근대 문학의 선구자로서 당시 조선의 천재 중 으뜸이라고 했던 이광수지만 그의 생애는 그야말로 영광과 오욕, 희극과 비극이 얽히고 설킨 장대한 드라마였다. 청년시절의 독립운동에도 불구하고 일제 말의 친일 행위로 말미암아 그의 이름은 변절한 지식인의 대명사가 되었으니 그 또한 안 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의 공과(功過)에 대한 논란은 오늘날에도 여전 히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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