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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역 신고식(轉役 申告式)

  • 기사입력 2022.05.14 09:09
  • 최종수정 2024.02.03 15:19
  • 기자명 김희재 작가
▲ 김 희재(수필가, 한국어 교육 전문가)  

그 교회 이름이 ‘영양교회’인 것도 영양에 도착하고서야 알았다. 따져 보니 꼭 27년 만에 다시 찾아간 것인데, 그때나 지금이나 거의 변함이 없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교회 앞에 있던 개천이 복개공사로 깨끗하게 정비된 것이었다. 제법 규모가 큰 음식점이 몇 개 생겨났고, 새로 지은 군청 건물이 너무 말끔해서 낯설었다.

도시는 별로 변하지 않았는데도 우리가 살던 집은 통 못 찾겠다. 마치 지우개로 지운 것처럼, 작은 셋방이 있던 골목이 어디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생각나는 것이라고는 시장 근처에 있던 교회와 공중목욕탕, 중국집뿐이었다. 주일마다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렸고, 가끔 둘이 목욕탕 앞에서 헤어졌다가 머리가 젖은 채로 다시 만나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먹었다는 사실만 떠올랐다.

우리의 ‘27년 된 추억 줍기’는 불과 30분도 되지 않아 다 끝났다. 예배당 문이 잠겨 있는 교회 마당에서 기념사진 몇 장 찍고 나니 할 일이 없었다. 목욕탕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고, 중국집도 거기에 있었지만 들어가 보고 싶지 않았다.

우리를 가장 황망하게 만든 것은 남편의 부대가 예비군 훈련장으로 변해 버린 것이었다. 내륙 부대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강산이 세 번쯤 변할 시간이 지났으니 당연한 일이라고 여기면서도 당황스러웠다. 결국, 우리는 점심도 거른 채 서둘러 그 도시를 빠져나왔다. 아직 정오도 채 지나지 않은 벌건 대낮, 민망하게도 해가 중천이었다.

남편이 경북 영양에 한번 가보자고 했을 때 나는 의아해했다. 거기는 아는 사람도 없고 딱히 추억할 장소도 없는 도시였다. 그저 처음 중대장을 시작한 곳이라는 인연뿐이었다. 게다가 부임한 지 얼마 안 되어, 총기사고가 난 해안부대의 후임 중대장으로 남편이 차출되는 바람에 4개월도 채 못 살고 부랴부랴 떠난 곳이었다. 그래서 나는 영양에서 살았다는 사실조차 거의 잊고 있었다.

“이젠 속이 시원해요? 그렇게 와 보고 싶다더니...”

“정말로 여기는 기억나는 게 별로 없네. 우리 그냥 이 길로 죽변까지 가 볼까?”

“죽변까지 갔다가 집에 가려면 길이 너무 머니까 오늘은 그냥 돌아가고 다음에 여정을 새로 잡읍시다.”

“하긴 그렇네. 오늘 당일로 갔다 오려면 너무 피곤하겠지?”

입으로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의 눈엔 서운함이 그득했다. 그 길로 당장 영덕을 거쳐 울진, 죽변, 고포까지 달려가 보고 싶은 눈치였다. 거기는 해안중대장 시절에 오토바이를 타고 구석구석 다니며 밤낮없이 순찰하던 곳, 우리 젊은 날의 전적지였다.

군대 생활 30년, 아니 육사 생도 기간까지 다 합치면 34년 동안 군인이었다. 하지만 남편이 야전에서 지휘봉을 잡은 것은 해안중대장 3년뿐이었다. 중대장을 마치고는 곧바로 위탁 교육을 받으러 미국에 가서 공부했다. 석사, 박사 학위를 마치는데 7년 남짓 걸렸다. 귀국해서는 육군본부 정책부서에서 근무하다가 국방과학연구소로 가게 되었다. 그는 오랫동안 연구소에서 무기 개발하는 일을 하며 보통 생각하는 군인과는 약간 다른 길을 걸어왔다. 다른 연구원들과 똑같은 근무복을 입고 일하는 남편에게 ‘무늬만 군인’이라고 놀려도 그는 한 번도 화를 내거나 반박하지 않았다. 내 말에 수긍하여 그러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막상 군복을 벗게 되니 남편은 극심한 상실감을 토로하며 몹시 휘청거렸다. 예편해도 그의 연구소 보직은 그대로였다. 하던 일도 변함없이 계속되었다. 달라지는 일상은 아무것도 없는데도 자기를 지탱하던 마음의 중심축이 무너지는 모양이었다. 30년 이상 신고 있던 워커를 벗으려니 발이 잘 빠지지 않는다는 둥 실없는 농담을 계속 되풀이했다.

일반 대학교보다 먼저 입시전형을 치르고, 기초군사훈련과정까지 다 마쳐야 비로소 사관생도가 될 수 있었다. 집을 떠나와 처음 육사에 집결했던 날 밤에 느꼈던 두려움과 설렘 등을 남편은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우리 시대의 사관생도가 다 그러했듯이, 열아홉 살 소년의 마음에 각인된 군인 정신이 곧 그의 삶을 지탱하고 이끄는 동력이었다. 비록 야전 군인의 길에서 벗어나 연구소에서 근무했지만, 남편은 시종일관(始終一貫) 군인이었다. 평생 입었던 푸른 제복을 벗게 되자 자아정체성이 흔들리는지 휘청거렸다. 뜬금없이 군복 차림으로 가족사진을 찍고 싶다고도 했다. 정작 현역이었을 때는 양복 입고 찍던 사람이 제대한 마당에 군복이라니, 당황스러우면서도 내 마음이 짠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이게 다 삶의 한 획을 긋고 새 장을 여느라 진통하는 과정이었다.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노병(老兵)의 전역 신고식(轉役 申告式)이었다고나 할까? 나는 남편이 다시금 민간인 신분으로 돌아오는 과정을 곁에서 묵묵히 지켜보았다. 그가 원하는 대로 영양에 같이 갔고, 옷장 깊숙이 걸어 두었던 정복을 깨끗이 손질해서 내주었다.

그가 예편한 지도 어느새 14년이 지났다. 지금도 우리 집 거실 한복판엔 장교 정복을 차려입은 남편과 온 가족이 활짝 웃고 있는 큼지막한 가족사진이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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