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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이야기

  • 기사입력 2022.08.06 08:56
  • 최종수정 2024.02.03 15:16
  • 기자명 김희재 작가
▲ 김희재 (수필가, 한국어 교육 전문가)  

  고운 눈발이 희끗희끗 소리도 없이 내리는 밤이다. 한껏 부풀어 터질 듯한 둥근 달을 배경으로 소담스레 흰 꽃을 매달고 있는 매화. 그 등걸에 앉아 머리를 맞대고 있는 참새 두 마리의 모습이 마냥 정겹다. 분명히 눈이 오고 있는데도 전혀 춥게 느껴지지 않는다. 춥기는커녕 오히려 포근하기까지 하다. 소곤소곤 정답고 단아한 풍경이다.

  우리 집 거실에 걸려 있는 한 폭의 한국화 이야기이다. 아직 무명에 가까운 젊은 화가가 심혈을 기울여 완성했다는 이 그림이 유독 마음에 들었다. 거의 무채색에 가까운 매화 등걸과 차분한 달빛과 새들이 만들어내는 하모니가 좋았다. 약간 수줍은 듯이 서로 고개를 살짝 숙이고, 닿을 듯 말 듯 거리를 두고 앉은 새들의 함초롬한 모습은 사랑이고 신뢰였다. 

  엄밀히 말하자면, 내 눈에 그렇게 보였다는 말이다. 어떤 추위도 다 녹여낼 것 같은 뜨거운 사랑에 빠져 있으면서도 결코 선정적이지 않은, 첫사랑의 정갈한 설렘 같은 느낌이다. 사랑에 도취한 것은 비단 참새들뿐만이 아니다. 늘 외롭게 빈 하늘을 지키고 있던 달과 속절없이 피고 지던 매화 등걸도 덩달아 흠뻑 취해 있다. 조촐하면서도 차분한 분위기다. 

  이 그림만큼은 절대로 팔지 않고 평생 자기가 소장하려고 했다는 화가에게 간곡히 부탁한 끝에 겨우 살 수 있었다. 우리 집 거실 복판에 걸어놓으니 정말 흐뭇했다. 손님을 초대하여 이 그림을 소재로 이야기하면 화제가 풍부해져서 좋았다. 어쩌다 내 생각과 똑같은 사람이라도 만나게 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즐거웠다. 사실, 다분히 꿈보다 해몽이었다. 그림에서 유추해내는 사랑 이야기는 어쩌면 자기 암시적인 나의 바람이었는지도 모른다. 

  칠순 잔치를 하고 난 후부터 부쩍 기력이 떨어지고 아픈 곳이 많아진 친정어머니가 모처럼 오셨다. 밥상을 물리고 난 후 차를 마시며, 나는 습관처럼 그림 이야기를 꺼냈다.

  “엄마, 저 그림 속에 있는 새들이 꼭 무슨 얘기를 하는 것 같지 않아요?”

  “얘기? 무슨 얘기?”

  어머니는 별 희한한 소리를 다 듣는다는 표정으로 그림을 한 번 힐끗 올려다보시고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으셨다. 나도 노인네를 붙잡고 사랑 타령을 하는 건 아니다 싶어서 얼른 다른 이야기로 돌렸다.

  늦은 밤까지 거실 컴퓨터 앞에 앉아서 강의 준비를 하고 있는데, 초저녁에 깜박 한잠 들었다가 깨어나신 어머니가 성경책을 들고 거실로 나오셨다. 바닥에 앉아 조그만 탁자에다 성경책을 펴 놓고 소리 내어 읽으시다 말고, 문득 생각이 난 듯 말을 꺼내셨다. 

  “저 새들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이제 알겠다.”

 돋보기를 콧날 아래로 밀어 내리고 안경 너머로 눈을 동그랗게 뜨셨다. 벽에 걸린 그림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어머니의 표정이 아주 진지하시다.

  “에고, 우린 이제 다 죽었네. 날도 추운데 눈까지 이리 펑펑 오니…”

  내가 달콤한 세레나데를 연상했던 그림에서 어머니는 허망하고 슬픈 종말을 찾아내신 모양이다. 자못 처연한 어조로 참새의 대사(臺詞)를 읊조리기 시작하셨다. 

  “그래, 더 늦기 전에 우리 작별 인사나 미리 하세. 그동안 참으로 고생 많이 했네. 부디 잘 가시게. 나도 곧 따라갈 테니.”

  마치 대본을 보고 읽는 것처럼, 가느다란 떨림까지 섞어가며 실감 나게 표현하셨다.

  처음엔 그저 실소(失笑)를 머금고 이야기를 들었다. 똑같은 그림을 놓고, 우리가 이토록 극명하게 다른 해석을 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일제 식민시대와 한국전쟁 등 온갖 풍상을 다 겪은 세대여서일까. 어머니의 이야기 속엔 끝 모를 절망과 회한, 쓸쓸함이 가득했다. 듣고 있는 내 마음이 말할 수 없이 복잡해졌다. 그런 내 속도 모르고, 어머니는 슬픈 기색도 없이 신파조로 넋두리를 계속 풀어내셨다. 그건 이미 참새들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나는 어떻게든 어머니의 생각을 밝게 돌려놓고 싶었다.

  “아녜요, 엄마. 쟤들은 지금 달밤에 데이트하고 있는 거예요.”

  “너는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곧 얼어 죽을 새들이 그렇게 한가한 줄 아니?”

  내 말에 강하게 반발하는 뜻으로 코에 걸쳤던 안경까지 벗어들고 정색을 하시는 어머니의 표정이 자못 단호하시다. 나는 더 우기지 못하고 그만 입을 다물었다. 주름살이 그득한 어머니 얼굴. 틀니를 다 빼놓은 바람에 입술이 입속으로 쏙 말려 들어가 합죽해졌다. 느닷없이 눈물이 울컥 넘어왔다. 내가 떠나온 둥지는 어느새, 이미 많이 허물어지고 있었다. 

  나는 슬그머니 컴퓨터 화면을 향해 돌아앉았다. 어머니도 이내 성경책을 웅얼웅얼 다시 읽기 시작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컴퓨터 화면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무슨 소린지 정확하게 알아들을 수 없는 어머니의 목소리만 선명하게 파고들었다. 자꾸만 목이 메었다. 

  그 후로는 누구와도 섣불리 그림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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